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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연인 왕수복

Jimie 2024. 5. 7. 19:53

류지미 2023. 10. 29. 17:52

 

 

이효석의 연인 왕수복, 北 체제 선전가수가 되다

 

1935년  월간지  '삼천리'에서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다. 독자 투표로 남녀 각 5명을 뽑는 방식이었다.

1위로 뽑힌 평양기생출신 왕수복은 이효석의 연인으로도 유명하였다.

 

남자가수 1위는 채규엽. 함흥출신으로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유학파였다. 

1930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봄노래 부르자’를 취입한 ‘직업가수 1호로 당대 스타였다.

 

여자 가수 1위는 열여덟이던 평양 기생 왕수복이었다. 남녀 1만130표 중 1903표를 얻었다. 채규엽은 1844표를 얻어 남녀 통틀어 1위는 왕수복이 차지했다.  같은 평양기생 출신인 선우일선이 2위(1166),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 3위(873)였다.

 

 

"인생의 봄" (1933) 
朱大明 작사/ 朴龍洙 작곡/ 後藤純 편곡/ 노래 王壽福

(앨범/ 1933년 폴리돌레코드 발매 19086-B)

https://www.youtube.com/watch?v=i9FyNnVKHGI

 

 

< 1 >
노란 꽃잎 붉은 꽃잎 봄 따라 핀 꽃
人生의 봄 靑春이라  내 마음도 피네
새벽 이슬 맞어가며 곱게 피여서
人生의 봄 靑春을 노래부르세~

< 2 >
아즈랑이 풀 그늘에 봄맞이 노래
人生의 봄 靑春이라 노래부르세
지나간 봄 가신 님을 더듬지 말고
오시는 님 새 봄을 노래부르세~

< 3 >
지는 꽃은 오실 봄을  期約하련만
人生이 봄이 한때라  놋치지 말고
새벽 이슬 맞어가며  힘껏 피여서
人生의 봄 靑春을 노래부르세~

 

왕수복이 이 노래를 부를 때, 나이는 16세였다. 인생의 봄과 계절의 봄이 맞닿은 때.

이 노래 <인생의 봄>을 부른 3년 뒤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서양음악을 정식으로 배운다. 평안도 화전민의 딸 치고는 화려한 입신(立身)이었다. 

노랫말에 절기는 인생과 계절이 겹친다. 작사가 주대명과 작곡가 박용수의 고뇌가 엿보인다.

 

1933년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해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종전 후, 1920년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제안으로 설립한 국제기구다. 하지만 미국은 상원의 베르사유조약 비준동의 거부로 불참한다. 독일과 소련도 처음에는 가입을 거부당했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은 영국·프랑스·일본제국·이탈리아왕국 4개국이었다. 이는 UN출범 후인 1946년 4월, 제 21차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해체하고 UN에 자산이양을 결정했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괴뢰정부 만주국을 설립한 지 2년 째,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극심해지자 국제연맹을 탈퇴했었다. 그리고 나남에 주둔한 일본국 19사단을 중심으로 만주와 간도 일대에 대한 노략질을 강화한다. 그래서 꽃이 피는 계절에 이팔청춘 왕수복이 부르지만, 곡조에는 시름 방울이 주렁주렁 맺혀 있다.

 

 

 

 

王壽福의 본 이름은 王誠實. 1917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출생하여 2003년 86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화전민 가정, 편모 슬하에서 평양 명륜여자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한다. 평양기생학교는 1926년 설립한 최초의 기생학교다. 3년 과정이었다. 

 

그녀는 16세이던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울지 말아요>, <한탄>으로 기생출신 최초로 대중가요가수가 되었다. 최초라고 하지만 그 이전에는 대중가수라는 직업이 없었다. 양반(兩班) 51% 천반(賤班) 49%였다고 할 수 있던 봉건 조선사회에서는 창(唱)과 판소리와 민요를 하는 전문소리꾼이 있었을 뿐. 그래서 최초라는 브랜드가 붙은 것이다. 봉건과 근대문명의 충돌지대에서 발생한 신문화 발생의 트렌드.

왕수복은 소설가 이효석과 경제학자 김광진의 연인

1942년 이효석이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고, 이후 시인 노천명의 연인이던 김광진과 결혼. 김광진의 월북행에 동행하여 평양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중앙라디오 전속가수, 교향악단 성악가수로 활동했다. 

 

그 후 공훈배우칭호를 수여받고 살다가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에 위치한 북한의 묘지. 이곳에 6.25전쟁 당시 항미원조(抗美援朝) 중국인민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사망한 마오쩌뚱의 아들 모안영(毛岸英)도 묻혀 있다.

 

작사가 주대명(朱大明)은 콜럼비아 소속으로 <사공의 노래>, <월야소곡>을 남겼고, 포리돌 음반으로 <어스름 달밤>, <인생의 봄>을 남겼다. 그의 생멸을 밝혀내는 일도 우리의 과제다. 

 

작곡가 박용수(朴容洙)의 대표곡은 <청춘비가>, <그리운 고향>. 그가 작사 작곡을 동시에 한 <두만강 비곡>, <망향곡>, <못 잊어 원수>는 콜럼비아 음반에 전한다. 포리돌악단 반주로 취입한 그의 곡은 <그리운 고향>, <눈물>, <몽상의 봄노래>다. 그의 생멸이력도 궁금하다.

 

권번기생 출신 1호 가수 왕수복

- 고도의 정한, 그리운 강남, 능수버들, 아리랑 등 14곡

https://www.youtube.com/watch?v=smHBspjEDOw

 

00:00 01. 고도의 정한(孤島의 情恨) 1933년 10월 03:13 02. 그리운 강남 金龍煥ㆍ王壽福 1934년 5월 06:29 03. 능수버들 - 作詩 : 王平, 作曲 : 金敎聲 1936 09:43 04. 달맞이 1937/1 李雲芳 作詞/金冕均 作曲 12:42 05. 마즈막 아리랑 1936 15:52 06. 본조 아리랑 1936 18:37 07. 사공의 아내(沙工의 안해) 김정호 작사/유현 작곡/1936년 21:21 08. 생의 한(生의 恨) 1933년 12월 박용수 작곡 24:34 09. 신 방아타령 1933년 8월 박용수.작곡 27:49 10. 워디부싱(나의 불행) - 1933.윤영우 사. 곡 30:20 11. 월야의 강변(月夜의 江邊) (33/9) 작사작곡 미상 33:17 12. 인생(人生)의 봄 1933년 10월 주대명 작사, 박용수 작곡 36:32 13. 지척천리(咫尺千里) 1936년 3월 편월 작사/오무라노쇼 작곡 39:44 14. 청춘을 찾아 - 王平 作詞/任碧溪(金龍煥) 作曲 1934,07

 

음반이 산업화되고 있을 때 이른바 유행가라 불리는 대중적 가요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26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를 시작으로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 손금홍의 「낙화암」, 왕수복의 「고도의 정한」, 전옥의 「항구의 일야」, 채규엽의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등이 한국인의 정서를 바꾸어놓았다.

이 무렵에 활동한 가수들, 이를테면 황금심, 신카나리아, 고복수, 김용환, 선우일선, 박단마 등은 억압받던 시대에 대중의 감수성을 그대로 대변해준 스타들이었다.

이때 방송기생처럼 또 하나 새롭게 등장한 이름이 바로 기생가수였다. 음반이 도입되면서 전통음악이 새로운 오락거리로 각광을 받던 시절, 한편에서는 유행가 가수가 대중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쪽으로 진출하여 재능을 인정받은 기생들이 등장한 것이다.

평양출신 왕수복은 그중 대표적인 기생이었다. 왕수복의 뒤를 이어 등장한 선우일선 역시 평양출신으로 명성을 드날렸다. 이은파, 김복희, 한정옥, 왕조선, 김춘홍, 이화자 등이 그 뒤를 이어 기생가수로서 화제를 뿌리며 활동했다.

유행가수 제일인자로 선정된 평양 출신 기생 왕수복(「매일신보」. 1935. 1. 3.)

「매일신보」에서는 신년을 맞이하여 각계 제일인자를 선정, 게재했는데 변사에는 김조성, 권투에는 서정권, 미용사로는 오수경, 만담가로는 신불출, 그리고 가수로는 왕수복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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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전통소리든 유행가든 레코드가 등장한 이래 한국 연예계를 주름잡은 기생들은 단연 평양출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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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조선에 있어서 레코드 가수의 태반은 평양출신이다. 더구나 여류가수에 있어서 그 경향이 일층 농후하다. 그야 일이 회씩 취입한 가수들 단위로 잡는다면 물론 경성이 조선에 있어서 수위의 도시일 것이요, 문화의 중심지이므로 단연 그 수가 많겠지마는 전속가수로서는 도저히 경성은 평양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여류 전속가수로서 대표적인 존재를 빛내고 있는 자들을 열거한다면 왕수복, 선우일선, 최연연, 김연월, 최창선, 한정옥, 김복희, 최명주 등등 모두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더구나 그들이 모두 기생이라는 것이다······.

평양출생의 기생으로서 경성화류계에서 이름이 높은 명기이면서도 레코드 가수로서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기생들의 면모를 찾아보기로 하면 전기의 선우일선, 최창선 등 이외에서 조선권번 소속으로는 오비취, 김여란, 임명월, 김옥선, 김옥진, 장향란, 고비앵, 백운선, 이진홍, 이소향, 곽향란, 장옥화, 조소옥 등이 있고, 또 한성권번에는 김옥엽, 이죽엽, 조목단, 백모란 등을 셀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선우일선, 왕수복, 김복희, 최창선, 김은옥 등은 실로 조선 여류 레코드 가수계의 대표 격이라 할 만하다.
- 「삼천리」, 193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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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성기 음반이나 박찬호의 『한국가요사』를 참고해보면 기사에 나오는 기생가수 중 왕수복은 「고도의 정한」 · 「패성의 가을밤」 · 「망향곡」 · 「신방아타령」 · 「한탄」 등으로 유명했고, 선우일선은 「조선팔경」 · 「원앙가」 · 「꽃 피는 샹하이」 등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 밖에 김연월은 「푸른 하늘」, 최창선은 「못 오시나요」, 최연연은 「울지 않아요」, 최명주는 「임자 없는 꽃」, 김복희는 「애상곡」 등으로 유명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 땅의 연희라는 형태를 먼저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기예를 지니고 있던 기생집단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연예의 단계가 이루어질 때 그곳에 기생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변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