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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艸丁) 김상옥 (金相沃)선생

Jimie 2024. 5. 6. 05:30

류지미 2023. 9. 8. 10:43

 

 

 

 

 

<남망산 정상>에서 내려 오면서 보이는 <통영시내>.
  바로 아래 <강구안> 출입구엔 海橋가 새로 놓여있고, 
  멀리 <한국의 나폴리> "통영운하"가 <통영대교>와 함께 조망된다.
  <해저터널>이 저곳에 있다.

 

 

봉선화, Impatiens balsamina , 鳳仙花, 봉숭아

봉선화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이다. 꽃의 생김새가 봉황을 닮아 봉선화라고 부른다. 키는 60cm 정도이며, 잎은 피침형으로 어긋나고 잎가장자리에 잔 톱니들이 있다. 꽃은 7~8월에 잎겨드랑이에 1~3송이씩 모여 피며, 꽃색은 홍색, 백색, 자색 등 품종에 따라 다양하다. 

 

고려 고종 때 문인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 1241년 완성된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7월 25일경 오색으로 꽃이 피고 비바람이 불지 않아도 열매가 자라 씨가 터져 나간다는 봉상화(鳳翔花)"가 언급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책에는 봉선화로 되어 있고, 이 봉선화가 봉숭아로 발음된 것 같다.

 

부녀자들이 언제부터 손톱을 물들이는 데 봉선화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충선왕 때 손톱에 봉선화를 물들인 궁녀에 대한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봉선화꽃을 백반과 함께 짓이겨 손톱에 동여맨 후 하루가 지나면 곱게 물든다.

 

초정(艸丁) 김상옥 (金相沃)선생의 , 봉선화(鳳仙花)

 

「봉선화(鳳仙花)」

김상옥 작시    윤이상 작곡

편지

김상옥 Sangok Kim(1920-2004), Lyrics(modern Sijo)

윤이상 Isang Yun(1917-1995), Composition(1941)

서예리 Yeree Suh, Soprano

미하엘 마이어 Michael Meyer, Piano

https://www.youtube.com/watch?v=OTGRo4e9Z24 

 

2017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제(통영국제음악재단)기간 윤이상초기가곡 5곡 녹음

Recording Isang Yun‘s Early Art Songs during TIMF 2017 Memorial project for the 100th Anniversary of Isang Yun

 

 


그의 고향 통영에는 봉선화 시비, 초정거리, 초정 좌상 등이 있고 매년 초정 김상옥 시조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초정의 초기 시조 <봉선화,鳳仙花 (1939년) >시비.

 

봉선화(鳳仙花)  -  艸丁 김상옥(金相沃) 

 

비오자 장독대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 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편지

바리톤 김동규

https://www.youtube.com/watch?v=FNOetkYLPvI 

 

초정(艸丁) 김상옥 (金相沃)선생

김상옥(金相沃) 호는 초정 (艸丁·草汀·艸汀·草丁)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은 1920년 5월3일 경남 통영군 길야정 64번지(현 통영시 항남동)에서 아버지 김덕홍(金德洪)과 어머니 진수아(陳壽牙)의  1남 6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글을 읽는 선비였으나 생계를 위해 갓을 만들었다. 솜씨가 빼어나 철종 임금의 국상(國喪) 때 사용한 백립(白笠)을 만들어 진상했다고 전한다. 통영갓방 중 ‘선창골 갓집’이라면 김씨의 부친이 하던 갓집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8세때  부친을 여의고  1927년 통영보통공립학교 입학하여 12세에  프린트판 교지 『여황(艅艎)의 록(綠)』에 동시 「꿈」을 실었고,  월사금이 없어 쫒겨 나서는 산으로 올라가 동요 「삐비」를 지었다. 1933년에 졸업하고 집안형편이 어려워 남강인쇄소 인쇄공이 되었다. 14세 때인 1934년 금융조합 연합회 회보 공모전에 "제비" "연필" 등을 발표 당선됐다.  

 

* 여황(艅艎)은 아름답게 장식한 큰 배

 

통영보통학교 동급생 같은 반 친구 김용익은 미군정청 진해주둔 사령관 캐스턴 소령의 통역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꽃신, 뒤웅박등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두해 선배가 윤이상이고 두해 아래가 김춘수다.

 

1930∼35년 사이에 최초 시조동인지 『참새』 동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문학청년의 시절을 보냈다.  1936년 17세 때  조연현과 함께 활동한 동인지 『아(芽)』에 「무궁화」를 발표하여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아  그해 장응두, 윤이상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된 이후 해방될 때까지 세 차례 옥고를 치르고 쫓겨 다녔다.

 

1936년 독서회 사건으로 첫번째 투옥된 후 웅기로 시집간  깜둥이 누나 넷째  김부금이 살고있는 함경도 두만강변으로  간다.  통영 미결감에 면회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누님을 찾아  1937년에  경부선-경원선-함경선-청진-나진, 함경북도 웅기웅기의 변씨촌까지.

 

본격적인 시작詩作은 함경도 청진 "서수리"라는 동네다.

청진에 있는 서점에 취직하고 문학활동을 시작, 일하면서 김용호,함윤수 등과  함께  『맥(貊)』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뒤에 임화, 서정주, 박남수, 윤곤강 등이 합류했다.  『문장(文章)(창간 1939년 2월)』  1권 9호(1939년 10월호)에  가람 이병기 추천으로 시조 「봉선화」가  게재 되었고, 11월에는 『동아일보』시조 공모에「낙엽(落葉)」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누님의 죽음으로 1940년 통영으로 낙향. 항남동에서 "남원서점"을 열었다.  이 서점에 걸린  낭산 이후의 우국시가  문제되어 통영경찰서에  두번째로 체포됨.  1942년에 삼천포로 피신하였다. 1945년 2월 일본헌병대의 검거 소식을 미리 알게 되어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윤이상과 함께 서울에서 피신하였다.  윤이상은 부산 대연동 '남광 보육원' 원장역임. (동아대학교 교가 작곡. 작사는 초정.)  서울에서 함께 도피생활을 할 때 일본 패망 소식을 듣고 김상옥을 찾아옴.

 

윤이상(작곡)과 김상옥(작사)은 동아대학교, 욕지중학교 등 해방 후 교가지어주기 운동을 벌였다. 광복 이후 20여 년에 걸쳐 마산고, 경남여고, 통영중 등 부산,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에서 교편을 잡고 부산과 경남에서 박재삼, 이제하, 김병총, 송상옥 등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김상옥은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후 풀려난 윤이상에게 백자 항아리에 정원의 흙을 담아주며 

"고국의 흙으로 빚은 항아리에다 고국의 흙을 담았으니 고국이 생각나면 보라" 고 했다. 

월간 중앙 1989년 2월호에 기고글 '윤이상과의 교유기'에서 시인 이영도 여사의 기지로 윤이상의 사상 서적을 물동이에 담아 내와 가택 수색에서 일경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사연, 그와 함께 일본 헌병대를 피해 서울로 와서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던 이야기가 회상되어있다.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자 김상옥은 유치환, 윤이상, 김춘수, 전혁림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여 향토문화창달에 힘쓰고, 11월삼천포문화동지회를 창립하여 한글운동, 교가 보급운동을 이끌었다.

 

1946년부터 20여 년 동안 부산,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47년 첫 시조집 『초적(草笛)』(수향서헌)의 편집, 조판, 인쇄 등을 직접했으며, 1949년 1월에 『고원(故園)의 곡(曲)』(성문사), 6월에 『이단의 시』(성문사)를 발표했다. 

 

1949년 작곡가 윤이상이 부산에서 출판한  첫 작곡집 '달무리'에 조지훈의 '고풍의상', 박목월의 '달무리'와 더불어 김상옥의 시 「추천(鞦韆)」, 「봉선화(편지)」에 곡을 붙여  함께 수록하였다.

 

1952년에 동시집 『석류꽃』(현대사)을 출간하였다. 

1952년 통영으로 온 이중섭과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1953년에 출간한 시집 『의상(衣裳)』(현대사)출판기념회에 초대되어 술잔을 기울이던 이중섭은 다음날 찾아와 "나는 돈이 없어 축하금을 낼 수 없어 그림으로 가져왔다" 하며 닭 한 마리가 꽃 한 송이를 물고 있고, 오른편에는 게와 꽃잎이 그려진 그림을 주었다.  당시 통영시장이던 김기섭 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팔아 주었다. 그   그림은 지금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문교부편수국 심의위원을 지내고,  1954년 남망산에 충무공 이순신 시비건립을 주도하였으며  (특히 건립 취지문은 명문으로  노산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없는 말이라고 극찬함), 통영문인협회을 재건하고 『참새』지를 타블로이드판으로 복간했다. 1956년 시집 『목석의 노래』(청우출판사)출간, 1958년 동시집 『꽃속에 묻힌 집』(청우출판사)을 펴냈고, 1960년 『한국시단』 편집장을 맡았고 사회공로훈장을 받았다.

 

 

1994년 5월 진해 김구선생 글씨 비석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보러와서 해군사관학교에 글씨를 써줌(낙관을 붉은 볼펜으로 새김)

 

1963년 초봄  서울로 이주하여 인사동에 골동품가게 아자방亞字房을 경영하면서 시중에 흩어진 문화재를 수집,그 가치를 바로잡고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종합적인 예술활동을 벌였다.

 

1972년일본 도쿄에서 서화작품전을 개최하였고, 2000년대까지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73년 삼행시집  『삼행시65편三行詩六十五篇』(아자방)을 펴냈고, 1975년 산문집 『시와 도자』(아자방)를 출간, 1980년 회갑기념시집 『묵을 갈다가』(창작과비평사)를 출간, 1983년 이호우와 함께 『한국현대문학대계』22를 저술했으며  1989년 고희기념시집 『향기 남은 가을』을 펴냈다.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4년 5월 진해 김구선생 글씨 비석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보러와서 해군사관학교에 글씨를 써줌(낙관을 붉은 볼펜으로 새김)

1995년 동인지 『맥』을 재창간,  1998년 시집 『느티나무의 말』(상서각)을 출판하였다.

 

 1974년 노산 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1982),  통영시 문화상(1994),  삼양문화상(1997), 2001년 가람시조문학상을 받았다.  ** 육당 문학상, 문화훈장 보관장(1995)은 수상거부

 

 

2004년 10월26일에 부인 김정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 닷새 후인 10월31일  향년 84세로 부인을 뒤따르듯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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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삼천포에서 서울로 피신 하면서 청도의 이호우의 집에서 보름간 숨어 지냄.

시조시인 이영도가 윤이상의 사상 서적 숨긴 사연.

이영도 여사가 보낸 편지 내용 "창원 성주사로 꽃구경 가자' 라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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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2018 MAGAZINE

《월간조선》08 2018 이 소개하는 〈은선암 즉흥〉과 〈은선암 소견〉은 초정이 말년에 쓴 작품이다. 초정의 가족들은 “시인이 2000년 무렵 제자들과 함께 김천 직지사의 오래된 암자인 은선암을 찾았다”며  “이 시 두 편이 마지막으로 쓰신 시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붓글씨로 쓴 시첩詩帖에는 이밖에도 여러 편의 시가 담겨 있는데 그중 〈안개 낀 항구〉와 〈어머님〉은 말년의 초정이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을 함께 써놓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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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항구〉는 초정이 1952년 펴낸 동시집 《석류꽃》(현대사 刊)에 담긴 시다.  초정은 시첩에 이 시를 쓰고 말미에 “선고(先考·세상을 떠난 아버지)께서는 글을 읽는 선비였으나 생계를 위해 입자장(笠子匠)이 되셨다. 선고가 그립다”며 아버지를 그리는 소회를 짧게 적었다.

 

 “우리 집은 선창(船倉)곬 갓방집. 선고(先考)께서는 글을 읽는 선비였으나 생계를 위하여 입자장(笠子匠)이 되었다. 한말의 국상(國喪) 때는 백립(白笠)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창곬에 밤이 되면 나를 업고 ‘안개 낀 항구’를 돌며  떡국과 곶감을 사 주시기도 하였다. 마령(馬齡) 팔십에 나는 나의 선고가 그립다.”

서어(書於) 서울 세브란스(世富蘭西)병원 107동 환자 초정(艸丁) 도지(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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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첩의 마지막 시인 〈어머님〉은 첫 시집 《초적》에 실린 〈어무님〉과 동일한 시다.

내용은 같으나 〈어무님〉은 문장을 이어 쓴 전체 3행이고 〈어머님〉은 행갈이를 했다는 점이 다르다.

역시 시 말미에 “어머님의 사진을 40년 가까이 머리맡에 두고 뵈었다”며 소회를 적고 있다.

 

 “어머님의 사진을 40년 가까이 머리맡에 두고 뵈었다.  어느 날 언제 소각해야 할찌… 어머니, 할기(割肌)의 결의(決意)!”

서어(書於) ○○(판독불가-편집자)를 닿을 때!… 2004년 10월
  남의 자식(子息), 남의 부모(父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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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思鄕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白楊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시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북포루>가 있는 "여황산 艅艎山 해발174m"

"여황산 艅艎山 해발174m"
  <한국지명유래집>을 보면
  <여황 艅艎>은 호화롭게 장식한 배, 그리고 군세를 갖춘 큰 <전선 戰船>이라는 의미인데,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 吳>나라 임금이 지극히 아끼던 화려한 배 "여황(艅艎)"에서 유래하며
  <여황산>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통제영'을 진호하는 산이란 상징성에 맞는 이름을

갖추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