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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노래', 작사.작곡가 김노현(金魯鉉 1920~1993)

Jimie 2024. 5. 6. 05:37

류지미 2023. 9. 12. 19:16

 

모란봉과 대동江은 평양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모란峰 정상의 최승대[最勝臺]가 보이고 그 아래에

을밀대[乙密臺]가 있고  강변쪽에 있는 누각건물이 부벽루[浮碧樓]이다. 최승대는 옛날에는 봉화대로 이용하였다 한다.

부벽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우리나라 사대루(四大樓)​로 역사적 명소이다.

이 사진은 작가 미상으로 1947년경에 촬영된 것으로 희귀한 흑백 작품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

가곡 '황혼의 노래', 작사.작곡가 김노현(金魯鉉 1920~1993)

 

치과의사이자  성악가, 작곡가인 김노현 (金魯鉉 1920~1993 ) 선생은  1920년 9월 20일 치과의사인 아버지 김재조와 어머니 조재만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평양 태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현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신인 경성치전을 졸업한 치과의사로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숭실중학교 재학시절 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우면서 성악가 박정원과 숭실전문 교수 루스부인과 성악가 일본인 교수로 부터 개인지도를 받았고 중2때부터 작곡가 김동진에게 바이올린을 개인지도 받았으며,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서 부친의 모교인 경성치전에 입학했다.

 

총학생회장, 기독학생회장, 음악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제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다가  붙잡혀 1년간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부 친의 반대로 성악가를 접고  대학을 졸업한 후  치과병원을 개업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제1회 독창회'(1949년 1월)를 개최하였고  '한국 성가 순례단' 단장(1950년 1월)을 역임했다.

 

아울러 < 칼멘>(1960년 2월)에서  에스카 미엘로 역을, <마루타> (1961년 1월)에서 투룬켓 역을 맡기도 했다.또한 '한국 성가 순례단' 일본 순회연주(1961년 12월),  <일트로바토테>( 63년 10월)에서 헬란도 역을 맡았다.
 
1963년 이후부터는 성악활동 보다 작곡활동에 주력하였으며,  첫번째 작곡집 <낙화암> (1972년 4월)과 두번째 작곡집< 낙화암> (1972년 7월), 그리고 제1집과 제2집에 수록된 곡들을 선별하여 세번째 작곡집 <황혼의 노래> (1983년)를 차례로 출간했다.
 
또한  '류관순 기념관'에서 '김노현 가곡의 밤' (1987년 9 월 28일)을 개최하여  <두고온 고향>등 21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환자가 없는 때를 이용해서 작곡도 하고  피아노도 쳐보고 하모니카도 붑니다'라는 그 자신의  말처럼 , 음악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자신이 원장으로 잇던 '인성 치과병원'의 자리를 비우곤 했다. 이처럼 음악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그는 53세가 되던 1973년에 경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김동진교수의 지도로 작곡을 전공,석사학위를 받았고(1975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79년 11월).
 
'시의 이미지와 곡을  일치시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강조하던 그는 직접 작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 < 황혼의 노래> 외에 <오솔길>,< 고대>, <돌아오려마>,<자장가>, <잘가오> 등을 작사하였다.
 
그가 직접 작곡한 대표곡으로는  <널뛰기>, <별후>, <진달래꽃>, <풀따귀 > 등이 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가곡 50여곡,성가 20여곡, 현악4중주곡 등이 있으며,  오페라 <심청전> 과  <사랑과 죽음> 이 있다.
그는 '한국 음악회' 회장, '한국 벨칸토회' 회장, '한국 성가작곡가회' 회장, '한국 작곡가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낙천주의자, 여행가,오토바이를 타고 낙화암과 백마강을 둘러보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 보곤 하던 김노현, 중후한 풍채(173cm - 73kg), 미성의 바리톤, 시원한 이마의 호인의 모습을 보여주던 그는 그렇게 그리던 고향을 가보지 못하고 1993년 4월 25일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향년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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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생인 그가  <황혼의 노래>를 작곡한 시기가 1970년이니까그의 나이 50살이 되던 해였다.  집안의 반대로 치과의사가 되었지만평생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음악에 대한 일이라면 병원 문을 닫고 참석했다는 일화에서도 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낄 수 있다.

 

치과의사 김노현은 쉰 살이 넘어  본격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음악을 위해 경영하던 병원을 곧잘 비웠고  중후한 풍채의  바리톤에  고향 생각이  애달픈 운명이었지만 인생을 후회없이 즐기는 낙천주의자였다고 한다. 

 

북에서 월남한 그는 울적하고 고향 생각이 사무칠 때마다  찾아간  부여에서 고향의 위안을 느겼을 것이다. 낙화암과 고란사  절벽 밑으로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면서,  늘 대동강과 부벽루청루벽, 능라도 반월섬에서 놀며 보냈던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며 향수를 달랬다는  실향민  김노현은 남쪽에 살면서도 한평생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으랴.

 

1970년 어느 봄날 낙화암에 올라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꽃처럼 몸을 날려 백마강에 투신한 한서린 정경을 상상하다가

지금쯤 진달래 꽃피고 아지랑이 피고 있을 고향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해가 서쪽 수평선으로  잠기는 황혼녘이라 애수는 더욱 짙어만 갔다.

나이로 보아서도 인생의  황혼에 선 그로서는 고향이 더욱 그리워졌을 것이다.

 

황혼녘에  낙화암에 오른  시인은  그리움에 밀려드는  향수를  담아  ‘황혼의 노래’를 만들었다.  평남 대동군 고향의  봄을 사무치게 그리움으로 회상하며  어스름 해 지는 황혼녘, 그의 머릿속에는 다시는 가 볼 수 없는 꿈의 고향이 마음에 저리도록  애련한 그리움으로  담겨지고  있었다.

 

시인도 아니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시정을 그대로 토해냈다.

그리고 곡을 붙였다.

악보를 정리한 곳은 전쟁후 살아온 서울 서댜문구 홍제동 169의 10 자택겸 병원(안성치과)에서였다.

 

영영 가지 못하는 고향을  그리면서  아련한 시어(詩語)들로  망향의 아픔을 달래면서  써내려간 노랫말은 애잔함도 느끼게 하지만  서정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선율이다. 

 

김노현은  오페라 <심청전> <카르멘> <마루타> <일 트로바토레등을  작곡 하였고, 오페라  가수로 출연하였으며작품집 낙화암도 출판 하였다.

 

가곡 <황혼의 노래> <진달래 꽃> <풀 따기> <낙화암>등 50여곡의 가곡을 작곡 하였고,  황혼의 절정기인  73세에 (1993년)  성가곡집을 출판하였다.
한국교회작곡가협회 부회장,  한국성악회 회장등을 지냈으며, 한국치과의료인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김노현 [ 金魯鉉 ] : 작곡가·성악가(오페라). 

출생  1920년

한국 작곡가,성악가,치과의사. 평남 대동군에서 출생. 1948년 서울 치대를 졸업할 때 제1회 독창회를 열었다. 53세에 경희대 음대 대학원에서 수학(1975년 졸업). 김동진선생에게 사사. 미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창작을 하면서 치과의원 원장을 같이했다.한국성가순례단장,필그림합창단장,한국벨칸토회장,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부회장,한국 성악회장 등 역임. 그는 교회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가 직접 작곡한 대표곡으로는  <널뛰기>, <별후>, <진달래꽃>, <풀따귀 > 등이 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가곡 50여곡,
성가 20여곡, 현악4중주곡 등이 있으며,  오페라 <심청전> 과  <사랑과 죽음> 이 있다.

 

1948년 1월과 4월 베르디의 "춘희" 공연 때 출연했고, 1949년 제1회 독창회를 열었으며, 오페라 "심청전"을 완성하였다. 1960년 5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공연 때 출연했고, 1961년 12월 후로토의 "마르타"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60년 이후 오페라 "카르멘"·"마루타"·"일 트로바토레" 등에 출연했고, 1971년 첫 작품집 『낙화암』을 발간했으며, 1972년 두 번째 작품집을 출간하였다.

 

1975년 경희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한국교회작곡가협회(韓國敎會作曲家協會)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치과의료인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가 직접 작곡한 대표곡으로는  <널뛰기>, <별후>, <진달래꽃>, <풀따귀 > 등이 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가곡 50여곡,
성가 20여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1988)  현악4중주곡 등이 있으며,  오페라 <심청전> 과  <사랑과 죽음> 이 있다.

 

 

 

황혼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신 김노현에 대한 글을 읽고

김경선 (221.♡.0.40) 자유게시  2004.11.24 10:20

 

다른 전문직을 가지고 계시면서 우리 가곡을 작곡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변훈선생님의 명태, 쥐는 일품이지요

 

1920년 태어나셔서 1993년 작고하신 김노현선생님에 대한 글을 황혼의 노래와 함께접했지요.치과의사인 아버지 덕택에 중학교시절에 성악을 개인지도받았고 이어서바이올린을 배웠답니다. 그러나 경성치전을 졸업하여 치과의사의 길을 갔지만대학시절부터 바리톤으로 오페라활동을 하였으며 1963년 이후에는 작곡활동도 하였답니다.53세에 정식으로 경희대 대학원에서 김동진교수에게 작곡을 배워 대학원과정도 마쳤대요.

 

황혼의 노래는 1970년에 낙화암에서 평남 대동군의 봄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회상하며 작사작곡한 노래랍니다.

 

멋있는 분이셨네요.

황혼의 노래

-김노현 시, 김노현 곡 -김남희 노래

* 치과의사 김노현이 시를 짓고 곡을 붙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VloxgiTtCE 

 

 

아지랑이 하늘거리고 진달래가 반기는 언덕

깨어진 꿈 추억을 안고 오늘 나는 찾았네

내 사랑아 그리운 너 종달새에 노래 싣고서

 

그대여 황혼의 노래 나는 너를 잊지 못하리

마음 깊이 새겨진 사랑이 아롱지네

맑은 시내 봄꿈을 안고 어린 싹이 눈을 비빌 때

그 옛날의 아련한 모습 내 맘에 새겨진다.

 

그대여 황혼의 노래 나는 너를 잊지 못하리

마음 깊이 새겨진 사랑이 아롱지네

맑은 시내 봄꿈을 안고 어린싹이 눈을 비빌 때

그 옛날의 아련한 모습 내 맘에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