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iting Articles

민주당 일제히 조국 엄호…"한국판 드레퓌스" 칭송까지

Jimie 2023. 6. 14. 19:31

 

민주당 일제히 조국 엄호…"한국판 드레퓌스" 칭송까지

입력2023.06.14. 오전 11:04
 
 수정2023.06.14. 오전 11:06
 기사원문

 

/TV조선 방송화면 캡처서울대가 조국 전 법무장관을 교수직에서 파면하기로 하자 더불어민주당이 일제히 조 전 장관 엄호에 나섰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딸 동양대 표창장 문제 등으로 엄마는 징역 4년, 아버지는 교수직 파면, 딸은 입학 취소"라며 "서울대의 조국 교수 파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말했다.

장경태 최고위원은 YTN 라디오에서 서울대가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집권 여당이 됐기 때문에 조 전 장관 징계 논의를 시작한게 아니냐고 말했다.

강상구 기자(kang39@chosun.com)

 

민주 정청래 “조국 멸문지화 너무 가혹…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https://gall.dcinside.com/

2023.06.14 13:32:51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서울대 교수직에서 파면된 것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이 과거 프랑스의 간첩 조작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에 빗대 조 전 장관을 두둔했습니다.

 
정 최고위원은 오늘(14일) 오전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서울대의 조국 교수 파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면서 “검찰의 뇌물 수수 기소는 기각됐고 ‘김영란법’ 위반으로 억지 적용해서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딸 동양대 표창장 문제 등으로 엄마는 징역 4년, 아버지는 교수직 파면, 딸은 입학 취소”라면서 “부산대 의전원 합격자 표창장 하나로 멸문지화를 당한 조국 교수의 가족,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가조작 혐의, 논문 표절 의혹, 학력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대통령의 아내는 제대로 조사조차 받지 않고 ‘퍼스트레이디 놀이’를 하고 있다”면서 “윤 씨네 가족은 무죄, 조 씨네 가족은 유죄, 윤 씨네 가족의 희극, 조 씨네 가족의 비극. 이 희극과 비극은 언제까지 지속 될 것인가”라고 주장했습니다. 
 
장경태 최고위원도 오늘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서 “서울대가 갑자기 작년 7월에서야 여러 가지 품위를 손상한 행위 등을 이유로 징계를 논의했는데 사실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며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의힘이 집권 여당이 됐기 때문에 논의가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장 최고위원은 “조국 장관님께서 본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의에 대해서 국민들께 여러 가지 평가를 받으실 과정은 결국 정치밖에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저는 (조 전 장관의 총선 출마)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Affaire Dreyfus / Dreyfus Affair



19세기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과의 전후 관계에서 유대인 혈통의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에게 스파이 혐의를 부당하게 씌우면서 이를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극심한 정치/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사자인 드레퓌스가 석방된 후에도 이 사건은 오랫동안 프랑스 내부의 치열한 논쟁 거리로 남았다.

근대 이래 인권과 연대를 표방하던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며 후대의 인권운동과 시오니즘의 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배경

발단이 터져나온 시기는 1894년으로, 당시 프랑스는 이전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의 통일을 이루려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던 나폴레옹 3세 프랑스 제국이 가열차게 충돌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스트라스부르와 메스를 상실하고,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달성,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는 50억 프랑의 보상금을 요구하였기 때문.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불전쟁의 패배는 프랑스가 더이상 서유럽 육군 최강국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보불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의 여론은 들끓어올랐다. 즉 패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는데, 프랑스 패배의 원인이 암묵적인 반역 행위에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에 다시 한번 쇼비니즘의 바람이 불어닥치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독일은 치열한 첩보전을 바탕으로 유럽에서의 실권을 장악하려 애썼기에 프랑스가 이러한 분위기로 흐르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특히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해온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신생 독일 제국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당시 프랑스인들의 인식도 여기에 한몫을 한 듯하다. 이 때문에 드레퓌스 이전에 비유대계 프랑스인들도 여럿 억울한 간첩몰이를 당해서 투옥되기도 했는데, 과학자 튀르팽은 독일에 폭탄 제조법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간첩죄로 투옥되었는데, 사실 진짜 간첩은 튀르팽을 밀고하고 평소에 애국자 코스프레를 엄청 하고 다니던 그의 조수였다.

물론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하였고, 가장 먼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만큼 민족이나 인종을 넘어서는 포용력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3공화정 치하인 1890년대 프랑스 사회 내부에서는 아직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뚜렷했다. 특히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과 같은 반유대주의 신문의 창간은 프랑스 국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인종차별적인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었고, 1892년 프랑스 정국을 발칵 뒤집은 파나마 스캔들에 유대계 자본이 관여한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 사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어 갔다.

더불어 독일이 통일된 후, 유럽 내 국가 간의 세력이 균형을 잡아감에 따라 이전 프랑스의 영광[5]을 그리워하던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군대와 국가를 열망하였고,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 사상 등과 더불어 점점 더 배타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1) 패전으로 인한 혼란, 2) 국가 제일주의, 그리고 3) 반유대주의 정서가 맞물리면서 결국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894년 9월, 프랑스군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익명의 발신인이 보낸 편지 안에는 프랑스 육군의 기밀문서에 해당하는 한 장의 명세서가 들어있었으며,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Maximilian Friedrich Wilhelm August Leopold von Schwartzkoppen) 육군 대령이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년 10월 9일 ~ 1935년 7월 12일)

군 정보국은 조사끝에 알자스 태생 유대인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육군대학(École Supérieure de Guerre)을 졸업하고 수습참모로 근무하던 촉망받는 프랑스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지목하였다. 
 
 
드레퓌스 대위는 전 포병연대원들이 연병장에 도열한 가운데 다른 장교가 드레퓌스의 예복에서 계급장과 훈장, 단추 등을 억지로 떼어내고 예도를 분지르는 굴욕적인 강등식을 공개적으로 당했다.
 
1895년 1월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당한다.

 ~ 증략~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렌 군법회의의 유죄판결을 오판으로 파기,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와 피카르를 복권시켰다.[23]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에게 소령 특진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사죄한다. 드레퓌스는 무죄선고를 받은 뒤 열흘 만에 군대로 돌아왔고,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복권되어 잠시 군에 복무하였지만 유형기간 내내 쇠약해진 몸 때문에 다음 해 전역을 해야 했다. 부당한 판결로 10년간 군문을 떠나 있었던 것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단지 명예전역을 하는 선에서 만족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