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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언론 못견뎌하는 北,류근일(기자)

Jimie 2023. 4. 9. 00:09

  비판언론 못견뎌하는 北

18.01.24

   

   류근일 

 

“우리의 성의와 아량을 모독하다 못해 

상대방의 존엄 높은 체제까지 걸고 들며 대결을

 고취하는 괴뢰보수언론들의 무례 무도한 여론 

오도 행위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괴뢰보수언론들은 민족 내부에 불신과 대결을 

고취하는데 앞장선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지 

똑똑히 알게 될 것” 이건 북한 관영 매체가

 우리 쪽 비판 언론을 향해 쏟아 부은 욕설이다.  

 

‘아량과 성의’란 자기들이 ‘평창’ 참가와

 관련해 무슨 큰 은혜라도 베풀었다는 뜻이다. 

 

정말 그런 거였다면 정부는

 이에 대해 반박 성명이라도 내야 옳다. 

“아량과 성의라니 그 무슨 실례의...”라고.

 그러나 정부는 아무 말이 없다.

 

시인한다는 뜻인가? 

 

‘괴뢰’라, 이 단어에 대해서도 정부는 말이 없다. 

"우리보고 괴뢰라니, 그 무슨 결례의...”라고 

딱 부러지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는 길 가다가 똥 벼락 맞고서도 

말 한 마디 못하는 쪽만 바보가 된다

 

쓸개 없는 게 ‘진화된 상태’라고 할 수도 없고. 

 

 

보수언론의 무례 무도한 여론 오도행위라... 

그럼 6. 25는 북침이었다고 하는 그 쪽의 잡소리는

 여론 오도 행위가 아니라 여론 반려견(伴侶犬) 짓이었나? 

 

그리고 뭐, 보수언론이 민족 내부의 불신과 

대결을 고취해? 상대방을 ‘괴뢰’라고 부르는

 노동신문은 그럼 민족 내부의 불신과 대결을

 고취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자기~” 하는

 애무의 비음(鼻音)이라도 되는가?  

 

 

그래 맞다.

 비판적 자유언론은 전체주의

 1당 독재와 세습 절대왕정을 싫어한다. 

온 몸을 흔들어 “노(no)"다, 어쩔래? 

 

뭐, 불신과 대결 고취의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지 똑똑히 알라고? 분명히 되돌려준다.

 고모부와 이복형을 고사총으로 가루를 내고 

독약 뿌려 죽인 짓은 불신과 대결 

고취가 아니라 신뢰와 화합의 포옹이었냐? 

 

 

아 왜 대답이 없어? 

그 행위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는 

살아생전뿐만 아니라 저승에 가서도 아마 뼈가

 시리도록 절감하게 될 거다, 기다려라 그 때까지. 

 

 

류근일(柳根一, 기자)

1.

대한민국 언론인. 본관은 진주(晉州).  이류계 북부령공파 33세 근(根) 항렬.

조선일보의 전 주필이다. 보수성향의 인물. 정년퇴직하고 주필 자리를 내려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요새도 간간히 칼럼을 쓴다.

 

2.1. 언론인 경력 초기의 진보 성향

1938년 1월 30일 (음력 1937년 12월 29일) 경기도 경성부에서 아버지 류응호(柳應浩, 1911. 6. 24 ~ 1994. 1. 30)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수현(尹水賢, 1913. 4. 14 ~ 2005. 5. 3)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류응호는 야마가타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음운학자로, 경성제국대학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어학연구회라는 이름의 한글학회에 참여하여 학술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를 하다가 제2대 총선에 좌파계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정치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남로당 소속이라고 하여 체포되었고,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서울대학교 자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가 이후 전선이 밀리는 와중에 월북했다.
 
*류응호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있다가 숙청되었으나 김형직사범대학 교수로 복귀하여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남한에 남겨진 류근일은 1956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신진회라는 이름의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교내 동인지에 "전체 무산대중은 단결하자"든가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만들자"를 운운하였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필화를 입는다. 무죄판결이 나면서 처벌은 면했으나, 이 일로 이름을 크게 떨친 (?) 류근일은 이후 공군에 입대하였다가 4.19 혁명과 함께 민통학련 대의원총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였는데, 5.16 군사정변과 함께 혁명재판소에 넘겨져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1968년에 출소했다.

이후 아버지의 친구였던 홍진기가 그를 중앙일보 기자로 채용하여 언론계에 발을 내딛었고, 곧 논설위원이 되었다. 이 시기 류근일은 정권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과거의 급진적인 모습을 많이 버렸는데, 감옥 생활 도중에 딱히 회심이나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은 없고, 류근일 본인은 오히려 "나는 원래 극좌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 것" 정도로 얘기하고 있다. 이후 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로는 더이상 필화에 엮이는 일은 없었다. 1981년에는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선우휘의 제안을 받고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겨갔다.

 

2.2. 보수 언론인으로의 전향 및 조선일보 우경화의 주역

198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민주화 이후로도 노태우 정부때까지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는 일이 폭로되기도 했지만, 노태우 정부 시기 이후로는 이전의 진보적이었던 시절과는 다르게 논조가 확연히 우경화되어갔다.

조선일보에서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논설위원실장을 맡았고, 1994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승진해서 1996년부터 2002년까지는 논설주간을 맡았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주필을 맡고 정년퇴직했다. 후임 주필인 강천석이 논설주간에서 승진하기 전까지 주필은 공석이었다. 이후 2008년까지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칼럼을 연재했으나 본인의 의지로 고문직 퇴임과 함께 연재를 마쳤다.

이후 뉴라이트 운동에 몸을 담으면서 뉴데일리의 고문을 하였다. 이후로도 조선일보에 사설을 연재하면서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등 논조면에서도 보수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그나마 경향신문에서 논조의 다양화를 꾀한다고 류근일을 섭외했던 일은 아이러니할까나.

2.3. 이후

2009년 3월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 대우교수로 부임해 '정치커뮤니케이션' 강의를 담당했다.

3. 여담

  • 동시대에 조선일보의 우경화를 이끈 김대중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고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정도로 좋았다. 류근일은 김대중을 "그 놈은 못 된 놈이다."라고 혹평했지만 반어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 전임 주필인 김대중은 본래 조선일보 출신이었다가 주필을 맡았지만 류근일은 외부인사 출신으로 주필을 맡은 케이스이다.
  • 탈모인인데, 엄청나게 어색하고 티가 많이 나는 가발을 쓰고 다닌다.
  • 1992년 대통령선거때 국민당의 정주영후보를 당선가능성이 부족한 변수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정주영 변수>라는 칼럼을 써서 현대그룹과 조선일보가 대판 싸우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머리끝까지 열이 받은 현대그룹은 조선일보에 대한 광고를 중단했었다.
  •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류응호는 김일성대학 교무처장까지 올랐으나, 김대를 방문한 외국인들과 통역없이 대화했다는 혐의로 평양사범대학 평교원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8월 종파사건 이후 1959년 말에 반당종파분자들을 쓸어버린다는 이유로 온 식구들과 함께 평양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60년대에 류근일이 남한에서 학생운동 거물이 되자 허겁지겁 부교수 직함을 주고 평양사범대학 교수로 다시 데려와서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를 받고 복권되었다. 하지만 이미 시골에서 하도 고생을 하고 와서 노망기까지 와서 제대로 강습은 하지 못하는 판이었고 1994년에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류근일은 자기 아버지의 효용가치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적절한 시기에 돌아가신 것 같다고 씁쓸하게 말한 바가 있다. 북한에 있는 이복 여동생은 평양의대 교수로 배치되었으나 아버지 사망 이후 이혼당하고 하방되었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수상

2012. 제2회 서재필 언론문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