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위기' 중국을 변화시킨 남자…장쩌민 前국가주석 사망
업데이트 2022.11.30 21:59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공식 영정. 신화통신
중국 3세대 지도자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30일 12시 13분 상하이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96세.
관영 신화사는 장쩌민 전 주석이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위원장으로 하는 688명 장례위원회는 중국의 국장(國葬)인 추도대회 거행 전 천안문·신화문·인민대회당과 각 외교 공관에 조기를 게양한다고 밝혔다. 또 중국의 관례에 따라 외국 정부와 정당 대표를 국장에 초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쩌민 중국 전 국가주석, 백혈병 치료 중 96세로 사망
당 중앙위 등은 이날 "장쩌민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군, 각 민족 인민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며 "당 중앙은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힘으로 바꾸고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며 실제 행동으로 애도를 표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장 전 주석은 중공 3세대 지도부의 핵심 지도자였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무력 진압을 반대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를 낙마시킨 덩샤오핑(鄧小平)이 천윈(陳雲)과 합의해 상하이 서기였던 장쩌민을 당 총서기로 임명하면서 최고 권좌에 올랐다. 1997년 덩샤오핑 사후 2002년 당권, 2004년 군권을 후진타오에게 넘길 때까지 중국 최고 실권자로 군림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이양하면서 5년 임기 연임을 공식화한 첫 번째 지도자다.
1989년 11월 덩샤오핑은 장쩌민, 리펑(왼쪽에서 두 번째), 차오시(왼쪽에서 세 번째)와 회담했다. 신화통신
중국에서 장 전 주석은 붕괴 직전의 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변모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공산당이 자본가의 선진 생산력, 지식인의 선진 문화발전, 광대한 인민(노동자·농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3개 대표론’을 주장했다. 급변하는 세계 조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당도 서방의 학문과 경험을 다양하게 배우고 익혀야 한다며 변화를 주장했다.
1990년대 위안화 환율을 고수하고 기반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해 아시아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후계자인 후진타오 시대 경제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대외 관계에서는 미국 등 주요국과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한·중 수교도 그의 총서기 재임 기간에 이뤄졌다. 1995년 11월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서양 및 홍콩 언론인과 인터뷰도 즐겼다. 2000년 8월 15일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미국 CBS 기자 마이크 월리스와의 인터뷰로 유명하다. 2000년 10월 베이징 중난하이 집무실에서 홍콩 기자의 질문에 불끈하며 영어로 “너무 어리고(too young), 지나치게 단순하고(too simple), 때로 유치하다(sometimes naive)”고 비판했던 영상은 지금도 널리 회자한다.
공과 함께 과(過)도 적지 않다. 장 전 주석은 티베트와 기공 수련 단체인 파룬궁 탄압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경제적으로는 양적 성장에 집착해 구조 조정을 지연하면서 경제 불균형 및 시장 왜곡을 심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21번째 생일 몇 달 전인 1947년 중반에 찍은 장쩌민의 졸업 사진. 사진 상하이자오퉁 대학교
장쩌민은 호랑이해인 1926년 8월 17일 운하의 도시 양저우(揚州)에서 부유한 집안 자제로 태어났다. 마오쩌둥의 이름과 비슷한 ‘인민에게 혜택을 준다’는 이름의 장쩌민은 “중국을 변화시킨 남자”로 평가받는다. 1939년 공산당의 군대인 신사군에 투신해 항일 전쟁 중 숨진 삼촌 장상칭(江上靑)의 양자로 입양됐다.
명문 양저우 중학을 나온 장쩌민은 실용적인 학문을 찾아 난징 중앙대학에서 전기기계를 배우다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옮겨 졸업했다. 1946년 공산당에 입학한 장쩌민은 1950년대 모스크바로 파견돼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서 전력공급장치를 익히고 돌아왔다. 상당한 수준의 영어와 러시아어는 이때 익혔다.
2011년 7월 6일 홍콩 아시아TV뉴스가 사망 오보를 낸 적이 있는 장 전 주석은 2019년 7월 리펑(李鵬) 전 총리 영결식, 10월 건국 70주년 천안문 열병식을 끝으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난 1991년 10월 12일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과 김일성 주석은 장쩌민의 고향인 장쑤성 양저우의 스커파 기념관을 방문했다. 신화통신
20차 당 대회를 앞둔 지난달 4일 부인 왕예핑(王冶坪·94)과 등나무 의자에 앉은 채 찍은 사진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갈색 선글라스를 쓰고 녹색 셔츠에 검은 조끼를 걸친 장 전 주석은 얼굴색과 정신 모두 건강한 듯해 당 대회 출석이 예상됐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상하이를 기반으로 둔 정치세력인 상하이방의 대부였다. 지난 2012년 최고지도자가 차차기 지도자를 지정하는 격세지정 관례에 따라 후진타오가 지지한 리커창(李克强)에 맞서 시진핑을 지지했다. 이후 시진핑이 1인권력을 강화하며 갈등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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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h5****26분 전
장쩌민이 태어난 곳은 양주(楊州)가 아니라 양주(揚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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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52분 전
중공인들은 현재 지도자와 과거 지도자가 합석을 해야 안심한다고 한다. 장짜장이 갔으니 후짜장이 시황제와 동석을 해야 할텐데 면박을 당한 후짜장이 동석을 허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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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57분 전
김일성 혹뿌리 영감을 우대한 것도 장짜장 작품이다. 김일성이가 만주 육문 중학교에 유학을 가서 중국어가 능통한 탓에 일성이놈은 모택동과 무리들의 환심을 사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일성이 놈이 아들도 러시아어 공부를 강요하여 정일이가 푸틴과 통역 없이 얘기하는 것도 봤다. 이렇듯 친중파라 일성이가 중공을 방문하여 기록 영화를 볼때도 귀가 먹어가는 일성이를 위해 자막을 넣는등 온갖 배려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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