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10·26 전야, 호스티스 H양의 고백 “김일성이 서울에 오면 좋겠다!”

Jimie 2022. 11. 18. 03:28

10·26 전야, 호스티스 H양의 고백 “김일성이 서울에 오면 좋겠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김진현 전 장관이 회고록에서 밝힌 秘話들

조선일보
입력 2022.11.1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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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의 북한 김일성.

 

현재 생존해 계신 우리나라 원로들 중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증인이라 할 만한 분 중의 하나로 1936년생인 김진현 전 장관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동아일보 출신의 언론인으로 과기처 장관과 서울시립대 총장을 지냈으며 한국경제연구원 등 10개 연구기관 창설의 책임자였고 문화일보 사장·회장, 세계화추진공동위원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이봉창·안재홍·장준하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회장을 비롯한 숱한 단체의 대표를 맡았죠. 그중 상당수가 사실상 ‘봉사직’이었습니다.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 /장련성 기자

저는 예전 ‘이봉창의 두 얼굴’ 기사(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11/04/PKDQPSLLTJEHVI2IQM4YAWCRZM/)에서 2002년 이 분이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장을 지낼 당시 순국 70주년 기념식 추도사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폭탄은 일본 군국주의의 원천인 ‘천황’ 신화를 깨는 문명의 큰 종소리, 인간의 고함이었다”는 내용이었죠. 최근 식사 자리에서 만난 김진현 전 장관은 ‘유석재의 돌발史전’ 얘기를 꺼내며 “그걸 어떻게 찾아 썼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때 사회부 신참 기자였던 제가 취재를 위해 추도식 현장에 있었고 그 말씀을 무척 감명깊게 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진현 전 장관이 최근 낸 회고록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나남출판)이 회고록으로는 드물게 2쇄를 찍었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기록과 숨겨진 이야기, 거시적 전망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찾는 독자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중 제1장에 실린 비화(秘話) 세 가지를 여기서 소개하려 합니다.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 장르의 원조로 평가되는 '별들의 고향'(1974).

 

①“김일성이 서울 와 봤으면 좋겠다”던 술집 아가씨

 

사실 이건 10여년 전에 김진현 전 회장에게 처음 듣고 무척 가슴이 서늘했던 에피소드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역사’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부장의 총탄에 맞던 날로부터 불과 닷새 전, 그러니까 10월 21일 밤이었다고 합니다. 김진현 전 장관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언론인과 경제관계 국회의원들이 한국개발연구원 측의 초대로 타워호텔 동쪽 골목 안 술집에 모였다고 합니다.

 

<일행이 앉고 아가씨들이 들어오는데 내 파트너는 들어올 때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앉아서도 말 한 마디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섬뜩한 기운마저 들었다. 원래 술이 약한 나로서는 아주 특별한 아이로구나 하는 판단이 바로 섰다. 그래서 나는 시국 얘기에만 열중했다.>

 

술자리가 끝나 자리에서 나오려는데 갑자기 그 아가씨가 팔을 꽉 잡더라는 것입니다. 왜 이러나 했는데 그녀가 말했습니다. “선생님하고 꼭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자정 통금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어, 급하게 강 건너 집 근처인 반포동 태극당 빵집으로 데리고 가 얘기를 들어줬습니다.

 

가냘프고 얼굴색이 파리한 이 아가씨는 지금 성(姓)만 기억나는데 ‘미스 황’이라고 했습니다. 서울 H대학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대학에 들어간 동생 등록금을 대 주기 위해 휴학하고 술집에 나온 지 12일째였다고 합니다.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태극당 본점. 1970년대엔 서울 곳곳에 '태극당'이 있었다. /조선일보 DB

당시 보통 술집은 아니었던 듯, 출근 첫날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장관급 국가 기관장 한 명을 모시게 됐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따라 보는 술이 액운을 맞았습니다. 술을 따르는 순간 그 기관장이 갑자기 앞자리 상대방을 향해 손을 번쩍 드는 바람에 술병이 엎질러져 그의 옷이 젖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짜고짜 옆자리 황양의 따귀를 때리고 욕설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참았으면 그러고 말았을 텐데, 이 순진한 여대생은 그만 순간적으로 대들었습니다.

“실수한 건데 때리긴 왜 때려요?”

“아니 이게 감히 대들어!”

흥분한 그 기관장이 또 그 여성에게 주먹질을 했습니다. 이어 술집 직원들이 들이닥쳐 “여기가 어떤 자린데 소릴 지르냐”며 그녀를 끌어내 또 구타했습니다. 열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정말 죽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생 등록금을 선불로 받았기에 할 수 없이 다시 술자리에 나왔고, 그날 첫 손님이 바로 김진현 위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얘기를 듣고 놀란 김진현 위원이 물었습니다. “아,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런데 내게 꼭 하고 싶었다는 얘기가 뭐죠?”

그녀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

“김일성이 서울에 와 봤으면 좋겠어요.”

 

이 더러운 세상! 잘난 놈, 권력 가진 사내놈, 이들로 짜인 국가, 세상에 대한 분노가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당황했고 시간에 쫓긴 김진현 위원은 ‘당시 43살 우리 세대의 흔한 상투어’를 쏟으며 그녀를 위로했지만, 그건 지금 생각해도 그녀가 알아들을 리가 없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꼭 가까운 시간에 다시 들러 긴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하곤 자리를 정리한 뒤 귀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닷새 뒤 10·26이 일어나 그날의 참석자들은 모두 흩어졌고 술자리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국보위가 등장하며 김 위원도 신문사에서 쫓겨났습니다.

양산 통도사 극락암 등지를 방황하며 그는 그날의 일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랐던 그녀는 어찌 됐을까? 그 하늘을 찌르는 분노로 인해 민주화 투쟁에 온몸을 던지진 않았을까?”

 

훗날 노태우 정부 시절에 청와대 전 직원에게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 그는 그 에피소드를 꺼내며 이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체제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밤에 스트레스 풀 특권이 있다고 함부로 놀다간, 우리가 바로 이 나라의 반체제, 자생적 반체제를 키우는 체제 가해자,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술을 흘렸다고 술집 아가씨를 구타했던 그 기관장은 어떻게 됐을까요?

국회의원을 거쳐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끝나고도 20년이 더 흐른 지금, 세상은 과연 얼마나 깨끗해진 걸까요? 나중에 김진현씨를 다시 만나면, 오프 더 레코드를 걸더라도 그가 과연 누구였는지 꼭 물어봐야겠습니다.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회의 창덕궁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이승만과 김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②YS가 묵살한 ‘이승만과 김구의 화해’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김진현 전 장관은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국수를 먹으며 독대할 자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는 여기서 YS에게 이런 건의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현대사 논쟁을 바로잡으려면 백범 김구를 확실히 대한민국의 정통성으로 안아야 하고, 우남 이승만과 백범의 후손이 화합하는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김 전 장관은 “그러기 위해서 시간이 갈수록 백범기념사업회가 정부 비판 인사로 기울고, 백범 행적을 반(反)대한민국 좌파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간곡히 진언했습니다.

 

그러자 YS는 아주 즉각적으로 딱 한마디 반응했다고 합니다.

“에이~ 이승만 독재자래이, 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 예산부터 줄이며 재정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대선 후보 다시 연설하는 모습./조선일보 DB

백범에 대해선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 전 장관은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오늘 이 땅 이념갈등의 뿌리엔 단순히 극좌 대 극우, 친북 대 반공이라는 도식을 넘어 이른바 주류 내의 철저하지 못한 자기정체성 상실에도 큰 원류가 있다.” 김구는 항일, 이승만은 친일로 도식화하는 ‘백년전쟁’류의 역사왜곡이 횡행하는 지금에 와서 참으로 안타까워지는 선견지명입니다.

③황석영은 왜 MB 정부에 협력했나

이명박 정부 시절 계획되고 건립된 대표적인 기관이 광화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입니다.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를 기념한다는 취지로 세워졌고, 김진현 전 장관이 그 건립위원장을 맡았었습니다. 그런데 각계 인사로 구성된 건립위원 중에 그때 보나 지금 보나 무척 이질적인 인물이 한 명 있었습니다.

 

소설가 황석영씨였습니다.

진보·좌파 성향의 그가 한때 ‘MB의 조언자’라 불릴 정도로 이명박 정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MB정부로부터 ‘유라시아 특임대사’로까지 임명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황씨는 입장을 바꿔 “나도 MB 정부 블랙리스트의 피해자였다”며 피해를 호소했습니다.

 
2009년 4월 16일 청와대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이 소설가 황석영(왼쪽)씨와 국립대한민국관(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 초청 간담회장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그런데 당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이었던 김진현 전 장관은 ‘건립위원 황석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가장 재미있는 대화는 황석영 씨와의 것이다. 그는 보통 회의에는 거의 안 나왔다. 2010년 2월 16일 따로 점심을 했다. (중략) 대중민중 중심, 발전주역이 민중인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건국을 임시정부로 멀리 올려야 북한과 정통성 비교된다는 그의 발언이 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리고 북방 실크로드 꿈을 펼쳐서 신기했다. 자기 아이디어를 MB가 적극 밀고 있다 했다.

 

(중략) 대화 중에서도 그의 지리적 영역이 중앙아시아로 끝나는 것이 다소 이상해서 반문했더니 북한 껴안기가 주목표였다. 나중에 언론에 후회 섞인 발표를 한 것 보면 방북, 망명, 징역살이 15년의 경험을 살려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MB와 거래했다는 자백이 나온다.>

 

그 다음에 김진현 전 장관은 이렇게 썼습니다.

“북한을 특정 개인 또는 대통령의 사용(私用)으로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대한민국에 독버섯처럼 퍼졌다.”

이 말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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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6
 
찬성순반대순관심순최신순
 
2022.11.18 01:51:35
온고지신...과거를 보면 현재가 보이죠...유 기자, 유익한 기사 잘 읽었고 유용하게 습득했습니다.
답글1
12
0

2022.11.18 02:09:30
그래도 자본주의는 기회가 있다!
10
0

2022.11.18 01:55:32
김일성이 와도 뾰족한수 없읍니다. 그놈이 그놈입니다. 배운놈이 더지져분한 세상입니다.
답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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