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 가수 방운아의 활동무대였던 부산
혜성처럼 나타나 전쟁 아픔 달래줬지만 … 축음기 몰락과 함께 잊혀이동순 시인·가요평론가 | 2022.01.16 20:31
- 6·25 전쟁 중 대구서 가수로 첫발 디뎌
- 1954년 부산서 백영호 문하생 돼 빛 봐
- ‘마음의 자유천지’ 국민 위로해 대히트
- ‘부산행진곡’·‘여수야화’ 등도 잇단 인기
- SP 대체한 LP 적응 못 해 설 자리 잃어
6·25전쟁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의 실루엣으로 남아있을까. 노년세대에게는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고통과 상처지만 청년세대에게는 어느 먼 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극이 민족사에 남긴 아픔과 얼룩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앙금이 좀체 씻어지지 않을 것이다.
- 1954년 부산서 백영호 문하생 돼 빛 봐
- ‘마음의 자유천지’ 국민 위로해 대히트
- ‘부산행진곡’·‘여수야화’ 등도 잇단 인기
- SP 대체한 LP 적응 못 해 설 자리 잃어
6·25전쟁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의 실루엣으로 남아있을까. 노년세대에게는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고통과 상처지만 청년세대에게는 어느 먼 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극이 민족사에 남긴 아픔과 얼룩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앙금이 좀체 씻어지지 않을 것이다.
2005년 가수 방운아가 세상을 뜬 뒤 2010년 경북 경산시 보건소 뒷편 남매지둑에 세워진 노래비.
그 불행한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내고 천부적 예인(藝人)의 끼를 꽃피우며 기어이 가수의 길로 접어든 한 사람을 우리는 기억한다. 가수 방운아(方雲兒·본명 방창만·1931~2005)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방창만은 고향에서 16세에 중학교를 마치고 1948년 사촌형이 운영하던 두부공장에서 일하며 노래로 힘든 노동을 견디었다. 동네 선배가 기타를 가르쳐 주면서 가수의 길을 적극 권유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방창만은 나이 스물이 되던 1951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 주최 전속가수선발대회에 출전했다. 상주 출신의 도미(본명 오종수), 방초양, 신행일 등과 함께 우수한 성적으로 뽑혔다. 오리엔트사장이던 작곡가 이병주가 방태원(方太園)이란 예명을 지어주었고, 이 회사의 전속가수로 ‘망향의 곡’ ‘무정항구’ ‘부산항구’ 등을 발표했다.
방운아.
하지만 전쟁 시기, 지방에서 운영되던 레코드사에서의 활동은 더 이상 히트곡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밝은 전망을 갖지 못했다.
1954년 휴전 협정이 조인된 이듬해 방태원은 어느 지인의 소개로 부산의 유능한 작곡가 백영호(1920~2003)를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의 운명적 결속이었다. 백영호는 그 무렵 부산 미도파레코드사의 자회사였던 빅토리레코드사의 운영책임자로 이미 다수의 히트곡을 내고 있었다. 여기서 전속가수가 되고 작사가 손로원(1911~1973)의 가사에 곡을 붙여 취입 발표한 첫 작품이 바로 ‘마음의 자유천지’였다. ‘봄날은 간다’의 작사가 손로원은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고달프고 피로한 심정에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주고 싶었다. 그 때 만든 작품이 바로 ‘마음의 자유천지’다. 이 음반을 발매할 때 백영호는 방태원에게 ‘방운아(方雲兒)’라는 새로운 예명을 붙여줬다.
백금에 보석 놓은 왕관을 준다 해도 / 흙 냄새 땀에 젖은 베적삼만 못 하더라 / 순정에 샘이 솟는 내 젊은 가슴 속엔 / 내 맘대로 버들피리 꺾어도 불고 / 내 노래 곡조 따라 참새도 운다
세상을 살 수 있는 황금을 준다 해도 / 보리밭 갈아주는 얼룩소만 못 하더라 / 희망에 싹이 트는 내 젊은 가슴 속엔 / 내 맘대로 토끼들과 얘기도 하고 / 내 담배 연기 따라 세월도 간다
-‘마음의 자유천지’ 전문
작곡가 백영호는 여러 작품 중 이 노래가 가수 방운아의 음색과 창법에 가장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직관적 판단을 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이라 해도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의 자유와 평화보다 결코 못하다는 삶의 철학적 가치관과 메시지가 담긴 이 노래는 1950년대 후반, 전쟁의 시련과 아픔을 겪은 전체 한국민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다가갔다.
드디어 부산에서 첫 히트곡을 발표한 방운아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수 박경원 남백송 신해성 박애경 정향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57년, 나이 26세가 되면서 가수 방운아는 미도파레코드 전속으로도 동시에 활동했다. 여기서 다수의 히트곡을 연속으로 발표하게 되는데 그 작품들은 ‘부산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재수와 분이의 노래’ ‘두 남매’ ‘한 많은 청춘’ ‘여수야화’ ‘인생은 고해련가’등이다. 이 가운데 영화 ‘나그네 설움’의 한 장면에서 가수 방운아가 직접 출연하여 영화 주제가로 부른 것이 ‘인생은 나그네’이다. 1961년은 방운아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이다.
1962년과 1963년에는 방운아의 대표곡집으로 제작된 10인치 LP음반이 미도파레코드사에서 잇따라 제작 발매됐다.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도 방운아의 대표곡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이 음반들은 지금 1960년대 초반 가요사를 알게 해주는 희귀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음반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동과 전환기였다. 말하자면 SP에서 LP로 옮겨가는 이동과 변화의 시기였던 것이다. 대다수 축음기와 유성기 음반은 낡은 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새로운 음향기기라 할 수 있는 산뜻한 전축과 LP음반이 대세를 이루는 시기로 변모했다. 뿐만 아니라 SP시대의 가수들은 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LP시대에 맞는 신진가수가 대거 출현해서 선배 가수들은 활동무대의 기회와 터전을 일시에 상실하게 됐다.
가수 방운아도 이러한 변화의 대세와 흐름에 떠밀려 ‘추억의 가수’란 이미지로 바뀌고 말았다. 이후 그는 평생 발표한 노래의 악보를 정리하며 조용한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고향인 경산 남매지 부근에 방운아 노래비가 건립됐다.
하지만 전쟁 시기, 지방에서 운영되던 레코드사에서의 활동은 더 이상 히트곡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밝은 전망을 갖지 못했다.
1954년 휴전 협정이 조인된 이듬해 방태원은 어느 지인의 소개로 부산의 유능한 작곡가 백영호(1920~2003)를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의 운명적 결속이었다. 백영호는 그 무렵 부산 미도파레코드사의 자회사였던 빅토리레코드사의 운영책임자로 이미 다수의 히트곡을 내고 있었다. 여기서 전속가수가 되고 작사가 손로원(1911~1973)의 가사에 곡을 붙여 취입 발표한 첫 작품이 바로 ‘마음의 자유천지’였다. ‘봄날은 간다’의 작사가 손로원은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고달프고 피로한 심정에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주고 싶었다. 그 때 만든 작품이 바로 ‘마음의 자유천지’다. 이 음반을 발매할 때 백영호는 방태원에게 ‘방운아(方雲兒)’라는 새로운 예명을 붙여줬다.
백금에 보석 놓은 왕관을 준다 해도 / 흙 냄새 땀에 젖은 베적삼만 못 하더라 / 순정에 샘이 솟는 내 젊은 가슴 속엔 / 내 맘대로 버들피리 꺾어도 불고 / 내 노래 곡조 따라 참새도 운다
세상을 살 수 있는 황금을 준다 해도 / 보리밭 갈아주는 얼룩소만 못 하더라 / 희망에 싹이 트는 내 젊은 가슴 속엔 / 내 맘대로 토끼들과 얘기도 하고 / 내 담배 연기 따라 세월도 간다
-‘마음의 자유천지’ 전문
작곡가 백영호는 여러 작품 중 이 노래가 가수 방운아의 음색과 창법에 가장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직관적 판단을 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이라 해도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의 자유와 평화보다 결코 못하다는 삶의 철학적 가치관과 메시지가 담긴 이 노래는 1950년대 후반, 전쟁의 시련과 아픔을 겪은 전체 한국민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다가갔다.
드디어 부산에서 첫 히트곡을 발표한 방운아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수 박경원 남백송 신해성 박애경 정향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57년, 나이 26세가 되면서 가수 방운아는 미도파레코드 전속으로도 동시에 활동했다. 여기서 다수의 히트곡을 연속으로 발표하게 되는데 그 작품들은 ‘부산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재수와 분이의 노래’ ‘두 남매’ ‘한 많은 청춘’ ‘여수야화’ ‘인생은 고해련가’등이다. 이 가운데 영화 ‘나그네 설움’의 한 장면에서 가수 방운아가 직접 출연하여 영화 주제가로 부른 것이 ‘인생은 나그네’이다. 1961년은 방운아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이다.
1962년과 1963년에는 방운아의 대표곡집으로 제작된 10인치 LP음반이 미도파레코드사에서 잇따라 제작 발매됐다.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도 방운아의 대표곡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이 음반들은 지금 1960년대 초반 가요사를 알게 해주는 희귀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음반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동과 전환기였다. 말하자면 SP에서 LP로 옮겨가는 이동과 변화의 시기였던 것이다. 대다수 축음기와 유성기 음반은 낡은 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새로운 음향기기라 할 수 있는 산뜻한 전축과 LP음반이 대세를 이루는 시기로 변모했다. 뿐만 아니라 SP시대의 가수들은 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LP시대에 맞는 신진가수가 대거 출현해서 선배 가수들은 활동무대의 기회와 터전을 일시에 상실하게 됐다.
가수 방운아도 이러한 변화의 대세와 흐름에 떠밀려 ‘추억의 가수’란 이미지로 바뀌고 말았다. 이후 그는 평생 발표한 노래의 악보를 정리하며 조용한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고향인 경산 남매지 부근에 방운아 노래비가 건립됐다.
국제신문(www.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