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박정희는 정말 일본에 독도를 ‘팔아넘겼나’?
1965년 한일회담 ‘독도 배제’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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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은 제122주년 ‘독도의 날’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 칙령 41호를 통해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사실을 천명한 일을 기념한 날이죠.
그런데, 아직까지도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멈추지 않고, 독도가 한·일 사이의 분쟁지역처럼 된 이유는 광복 이후 독도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박정희가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것이죠. 이건 꽤 오래 전부터 얘기가 나왔던 것인데, 심지어 유신 시절엔 마을 잔치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 실제로 잡혀간 사람도 있었습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3377986?sid=102).
도대체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유래는 무엇이었을까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김종필과 박정희의 ‘독도 폭파론’.
(2)한일회담에서 독도가 끝내 언급되지 않은 것.
(3)한·일 간의 막후에서 이뤄졌다는 ‘독도 밀약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세 가지는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을 저해했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습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따져보도록 하죠.
①JP와 박정희는 독도를 폭파하려고 했나?
‘영토의 실효적 지배’를 놓고 볼 때, 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독도의 영유권을 놓고 벌인 한국과 일본의 경쟁은 사실상 1955년에 종결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97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역에 ‘평화선’을 그었습니다. 독도는 평화선 안에 포함됐습니다. 이것은 선언에 그치는 조치가 아니라, 1957년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 152척과 어민·선원 2025명을 나포했습니다.
이것이 6·25 전쟁의 혼란 중에 일어난 대한민국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전쟁을 틈타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빼앗아갔다’는 게 자연스럽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실제로 그렇게 착각하는 외국인도 있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자국 영토인 독도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확보했다’가 실제 역사였던 것입니다.
이후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일본 측이 독도에 무단 상륙해 자기 영토라는 표지판을 세운 적이 몇 번 있었지만, 1955년 1월부터는 경북 울릉경찰서 산하의 무장 경찰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주둔해 그 이후 지금껏 한국 경력(警力)이 독도를 지키게 됐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1955년부터 현재까지, 독도가 대한민국의 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영토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 그런데 말이죠.
1961년 5·16 이후 일본과 한일회담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JP의 독도 폭파론’이 불거지게 됩니다. 이것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62년 11월 13일 일본 하네다 공항 기자간담회에서 김종필(1926~2018) 중앙정보부장이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JP는 오히라 마사요시(1910~1980) 일본 외상과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참이었습니다.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필요)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
물론 JP가 그렇게 후대 내내 민감하게 여겨질(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탄의 대상이 될) 사안을 공항에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툭 던진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훗날 JP는 그 발언을 ‘폭파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 땅이 되지는 않게 하겠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한 적도 있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은 방송작가 김석야가 쓴 ‘실록 박정희와 김종필’(1997)입니다. 당시 JP의 발언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독도 문제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장애가 된다면 해결 방안이 있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독도를 한국 공군의 연습장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공군기를 동원하여 며칠간만 폭격하면 독도는 영원히 지도상에서 없어지고 말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후세에 대한 변명을 위해서 ‘독도는 일본 측에서 한일회담의 미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의 이름도 한·일 두 나라에 영원히 남게 되겠군요.”
어떤 자료를 봐도 이 발언은 정말 독도를 폭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이 문제를 다시 꺼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였다고 해석해야 할 발언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해 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1962년 11월 12일의 김-오히라 2차 회담에서 JP가 돌연 독도의 ‘제3국 조정안’을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위험천만한 얘기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의사와는 무관한 독단적 행동이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 한국 외무부는 이렇게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김 부장의 의도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위한 일(日)측의 강력한 요구에 대하여 몸을 피하고 사실상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으로 시사한 것이라고 생각됨.”
이후의 상황은 ‘제3국’, 사실상 미국에 조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 당시 미국은 줄곧 일본 편이었고 솔직히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학술적 검토를 바탕으로 한 입장이 아니라 ‘전략상 그곳이 일본 영토였으면 좋겠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JP의 발언 이후 일본은 당황했고, 다양한 대안이 출현하면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당초의 일관된 전략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한국 측 회담 당사자들이 처음부터 면밀하게 계획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손자병법’ 시계(始計)편에 나오는 ‘난이취지(亂而取之)’ 전략을 연상케 합니다.
“적을 혼란시켜서 취한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습니다. 누구도 독도를 폭파하지 않은 채.
그런데 1965년 한일회담이 이뤄지기 직전, 이번엔 박정희 대통령이 ‘독도를 폭파하고 싶다’는 발언을 합니다. 이건 또 무엇이었을까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다가 2004년 밝혀진 국무부의 비망 대화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1965년 5월 27일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박 대통령은 “(일본과) 수교 협장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 문제”라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JP와 마찬가지로 정말 독도를 폭파하겠다는 발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러스크와 박정희의 다음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러스크가 박정희 입장에서 스스럼없이 자기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박정희의 말은 본심이 아니라 철저히 외교적 목적을 지닌, ‘독도가 한일협상의 의제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더구나 러스크는 한국의 독도사(史)에 있어서 대표적인 빌런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1951년 차관보 시절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일본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소위 ‘러스크 서한’을 쓴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자가 독도 문제를 한국에 유리하게 구상할 리 없었고, 실제로 러스크는 박정희의 그 발언 다음에 진짜 의도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골치아파하는 독도에 대해 내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죠.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등대를 세우고 그 섬이 누구에게 속하느냐는 문제를 결정하지 말고 그대로 남겨둬서 자연히 문제가 사라지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요즘 일부 국내 논자에게서도 유사한 발언을 볼 수 있는 ‘독도 한일 공동소유론’이었습니다.
박정희의 대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한·일 공동 등대 설치 방안은 실행되지 않을 것입니다(A joint light house with Korea and Japan just would not work).”
미국의 ‘독도 공동 소유’ 제안을 명백히 거부했던 것입니다.
박정희의 ‘폭파 발언’이 가져온 효과는, 은근슬쩍 ‘공동 소유 카드’를 들이밀었던 미국이 다시는 독도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독도에 관한 중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러스크가 박정희와 만난 것은 1965년 5월 27일, 한일협정 기본 조약의 가조인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6월 22일에 이뤄졌습니다. ‘독도’가 과연 어떻게 됐는지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좀더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의 전후 상황과 박정희의 ‘공동 소유 거부’ 발언, 이후 실제로 전개된 한일회담의 독도 관련 사항들을 모두 빼놓은 채 ‘폭파하고 싶다’는 말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해서 “박정희가 독도를 폭파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며 정치적 공격을 했던 사람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2012년 8월 2일 경북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야당의 대선 예비후보가 여당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러스크에게 한 말 중에서 ‘폭파’ 부분만 빼서 언급했던 것이죠.
바로 이 인물입니다.
②박정희는 협상에서 ‘독도’를 일부러 뺐나? 도대체 왜?
그렇다면 JP가 협상 과정에서 잠시 무시했다는 ‘박정희의 의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1962년 11월 8일, 박정희가 JP에게 내린 훈령의 제3항에 드러납니다. “일본 측에서 독도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경우에는, 같은 문제가 한일회담의 현안 문제가 아님을 지적하는 동시에, 일본 측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한국민에게 일본의 대한(對韓) 침략의 결과를 상기시킴으로써 회담의 분위기를 경화(硬化)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할 것.”
독도 문제는 협상의 카드가 될 수 없음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1961년 이케다 총리와 회담을 했던 박정희가 평화선 문제가 카드가 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가 국내에서 큰 저항에 부딪쳤던 데서 온 학습효과일 수도 있지만, 이후 한일협상에서 한국은 독도를 실질적인 카드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폭파’ 같은 것을 실제로 계획하거나 실행한 일도 없습니다.
일본은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합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그 대신 택한 것이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이었습니다. 한일협정 기본 조약이 가조인된 1965년 6월 22일 당일에 나온 이 공문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달리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며,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조정 절차 또는 중재 절차에 의하여 그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
이 문장에서 ‘독도’라는 지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훈령을 받은 이동원 외무장관이 끝까지 일본 측을 압박한 결과였습니다. 이 장관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서명을 연기해도 좋다”는 입장이었고, 언론 발표 시점 직전에서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정치적 결단으로 ‘독도’를 뺐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6월 22일 당일 주일 한국대사는 본국으로 이런 긴급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상과 같이 양해 사항을 한 것은 일본이 종래에 주장한 독도라는 문구 삭제를 통해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한 것으로, 당초 일본이 요구하였던 절치상 합의에 대한 시간적 구속, 법적 구속, (상대국 제소) 결정에 대한 (아측의) 복종 의무 등을 완전히 해소시킨 것임.
따라서 아국(我國)의 합의가 없는 한 중재 수속은 물론 조정 수속도 밟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독도 문제의 해결은 실질적으로 아측의 합의 없이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임.”
이제 아무리 일본이 독도 도발을 하더라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이고, 일본이 이 현상을 타개할 모든 방법이 (무력 침략 말고는) 봉쇄돼 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이런 논평을 했습니다. “한국이 ‘다케시마는 한국 영토’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한 실제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은 극히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62년 6월 22일 일본 정부는 사실상 독도 영유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일본과 협상해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것을 분명히 인정 받고 다시는 도발을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잠깐만요, 잠깐만 생각해 보시죠.
1965년 한일회담 당시 우리가 독도를 협상 테이블에 의제로 올려놓아야 할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요? 역사적으로 분명한 우리 영토이고, 1955년 이래 우리 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실질적인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왜 협상 테이블에 올려놔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 ‘대한민국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좀 우스운 얘깁니다. 다음 문장을 보시죠. “대한민국은 제주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다음 문장을 또 보죠. “대한민국은 여의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독도, 제주도, 여의도 모두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라는 데는 단 0.01%도 차이가 없습니다.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한다고 해서 왜 한국이 독도를 회담의 의제로 올려야 하는 것일까요? 왜 ‘이 섬은 우리 영토가 아니라 일본과의 분쟁 지역이다’라고 시인해야 하는 걸까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극우 세력이 아니라 사회당 등 혁신 세력이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으로 대(對) 공산권 봉쇄 정책을 하려는 게 아니냐’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고 있었고, 독도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목소리를 크게 내던 주체가 일본 우익이 아니라 좌익이었다는 건 지금 보면 이채롭습니다. 당시만 해도 독도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일본 정부가 독도 문제를 물고 늘어졌던 것은 좌파의 눈치를 보기 위한 ‘국내용’ 정책의 성격이 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도를 포함한 양국 분쟁 문제는 따로 처리하자’며 여지를 두는 듯하다가 아예 협상 테이블에서 독도를 내려 놓는 고도의 외교적 기술을 한국이 구사했던 것입니다.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도록 해 줄 테니 청구권 자금을 올리라’는 식의 질 낮은 협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1965년 당시 박정희는 불과 48세, 김종필과 이동원은 39세였습니다.
홍일송 전 미국 버지니아주 한인회장을 2019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과 버지니아주의 동해 병기 법안 채택을 성사시킨 인물이죠. 그는 “동해 문제와 독도 문제에 대한 대응 방법은 같을 수가 없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100불짜리 지폐가 한 장 있다고 합시다. 그 100불이 내게 있지 않고 남의 손에 있다면 나는 그 돈을 얻기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여야겠죠. 그런데 100불이 이미 내 손에 있다면 어떨까요? 나는 그 100불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지켜야 할 겁니다. 동해 표기가 ‘남의 손에 있는 100불’이라면 독도는 ‘내 손에 있는 100불’입니다. 독도를 여기저기에 떠들면서 지킬 필요는 없죠. 이미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영토니까요.”
③'독도 밀약’은 허깨비다
2007년 나온 한 보도에 따르면 1965년 1월 1일 한국의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의 고노 이치로 건설대신 사이에 막후 협상이 이뤄졌고, 핵심 내용은 ‘독도 문제는 해결하지 않는 것을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소위 ‘독도 밀약’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증언만 있을 뿐 이 문서의 존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별로 그럴 전망이 없습니다. 정일권과 고노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은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뒤 전두환이 두려워서 밀약을 쓴 종이를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을뿐더러, 일본 정부는 이 밀약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비밀문서의 법적 구속력은 없고,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는 한국의 의지대로 실효적 지배에 의한 영토 주권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밀약의 3조는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건축하거나 증축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였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 독도에 접안 시설을 설치한 일은 이것을 정면으로 ‘위반’한 게 아닙니까? 일본이 당시 항의하긴 했지만 ‘한국 너희 왜 밀약대로 하지 않느냐, 약속 위반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만약 밀약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해도 이후의 한·일 관계사에서 효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밀약의 1조라고 알려진 부분, ‘독도는 앞으로 한·일 양국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곰곰이 뜯어 보면, 현재의 상태에서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위조된 독도 밀약의 쪽지라도 내보이지 않고 ‘그런 거 없다’고 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만한 대목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승만을, 박정희를, 김종필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독도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독도를 지켜냈다”고 말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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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을 애독해 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조선일보에서는 현재 좋은 기사를 공유하면서 ‘조선일보 앱’도 확장하는 대회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 링크(https://chosun.app.link/karma)를 스마트폰에서 클릭하시면 조선일보 앱이 설치돼 기사를 쉽게 보실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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