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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동요시인…어린이 놀이문화 그린 詩 두각…

Jimie 2022. 10. 17. 07:28

고향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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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6) 윤복진] 북으로 간 동요시인…어린이 놀이문화 그린 詩 두각…방정환 추천으로 등단·작곡가 박태준과 동요집 발표

 

  • 최미애|

입력 2022-08-01 | 발행일 2022-08-01 제20면 | 수정 2022-08-01 07:33

 

6·25전쟁 때 월북…北문단서도 '동요 할아버지'라 불리며 입지 다져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가사만 들어도 저절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동요 '옥수수 하모니카'의 원래 작사자는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시인인 윤복진(1907~1991)이다. 그가 월북하면서 금지곡이 되었는데, 홍난파기념사업회가 아동문학가 윤석중에게 부탁해 개사한 것이다. 윤복진은 일제 강점기 주요 일간지나 아동 잡지에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했던 동요시인이다. 당시 어린이라면 '윤복진'이라는 이름을 모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윤복진은 식민지 시대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대구를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월북 후 윤복진의 이름은 잊혔지만, 그의 창작활동은 북한에서도 이어졌다.
 
 
 
 
1930년 '중중 때때중' 출판을 기념해 무영당에서 무영당 창립자 이근무(왼쪽부터), 작곡가 박태준과 기념촬영을 한 윤복진. <대구문학관 제공>

◆어린이잡지, 일간지에 동요시 발표

윤복진은 1907년 1월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사립희원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 대구사립계성학교(현 계성고)를 졸업했다. 그는 계성학교에 입학하면서 김문집(문학평론가), 이인성(화가) 등과 함께 소년단체인 '대구소년회'의 소년 단원으로 활동한다. 1924년 윤복진은 윤석중이 만든 '기쁨사'에 동인으로 활동하고, 1926년 대구에서 '등대사'를 창립해 '등대'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1925년 '어린이'를 통해 문단으로 나온다. 이 시기 '어린이' 외에도 '신소년' '새벗' '아이생활' 등 많은 어린이 잡지가 발행됐고, 잡지 독자투고란에는 독자의 작품을 모집해 우수작을 발표했다. 윤복진은 '어린이'에 방정환의 추천을 받아 작품 '별따러 가세'가 입선 동요로 뽑히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다음 해인 1926년에도 '종달새' '바닷가에서' '각씨님' 등의 동요가 '어린이'를 통해 발표됐다.
 
 
대구 무영당 앞에서 포즈를 취한 무영당 창립자 이근무(왼쪽)와 윤복진. <대구문학관 제공>

당시 계급주의적인 문학작품이 유행했는데, 윤복진의 작품은 결이 달랐다. 그가 쓴 동요시는 동요작곡가인 박태준·홍난파·정순철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진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서, 윤복진의 작품을 비롯한 우리 노래들이 동요 프로그램을 통해 전해졌다. 그는 '신소년' '별나라'와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도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1929년 발간된 홍난파의 '조선동요 100곡집'에는 '하모니카' '고향하늘' '바닷가에서' 등 윤복진의 작품이 여럿 수록되어 있다. 윤복진은 1949년 동요집 '꽃초롱 별초롱'을 냈다.

그는 194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아동문학의 당면과제-민족문학 재건의 핵심'을 비롯해 아동문학에 대한 평론도 썼다. '음악평론' 1936년 4월호에 낸 '헝가리 음악과 작곡가'와 1937년 1월 '기독교보' 제6권 제1호에 낸 '음악의 기원' 등 음악과 관련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윤복진과 가까웠던 예술인으로는 작곡가 박태준과 화가 이인성이 있다. 그는 박태준과 함께 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이 둘의 사이는 각별했는데, 박태준은 윤복진이 졸업한 대구계성학교의 음악 교사였고 윤복진이 다니던 남성정 교회(옛 제일교회) 성가대 리더이기도 했다. 박태준은 윤복진의 동요를 중심으로 1930년대 초 '중중 때때중' '양양 범버궁'이라는 동요집을 대구 무영당서점을 통해 발간했다. 1939년에도 윤복진의 동요를 중심으로 한 동요집 '물새 발자욱'을 발간했는데, 표지는 이인성의 판화로 장식했다. 이인성이 그린 그림에 윤복진이 동요를 쓴 '동시화전'이 무영당 백화점에서 열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양화가 이인성이 표지를 그린 윤복진과 박태준의 동요곡집 '물새발자욱'. <대구문학관 제공>

 
◆천진한 동심의 세계

윤복진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단어는 '동심'과 '서정'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정형시로, 글자를 맞추기 위해 의성·의태어를 많이 사용했다. 윤복진이 쓴 동요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특별한 장난감이 없어도 주먹으로 나팔을 불고, 텃밭과 꽃밭이 있는 마당에서 숨바꼭질하는, 뛰어노느라 여념이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꼬옥꼬옥 숨어라./ 꼬옥꼬옥 숨어라.// 텃밭에는 안 된다,/ 상추 씨앗 밟는다,// 꽃밭에도 안 된다,/ 꽃모종을 밟는다,// 울타리도 안 된다,/ 호박순을 밟는다."('숨바꼭질')

동심에 천착했던 윤복진도 1930년 전후 유행했던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문학 운동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의 색채는 이전과는 다르다.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스무하루 밤'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스무하루 이 밤은 월급 타는 밤/ 실 뽑는 어머니가 월급 타는 밤// 자장자장 아가도 잠들지 않고/ 논두렁 공장 길에 밤은 깊은데// 이달 품삯 모자라 눈물지우나/ 저 달이 넘어가도 아니 오실까."('스무하루 밤')

해방 이후 윤복진은 서정과 동심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좀 더 발을 들인 듯하다. 그는 좌익 계열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해 아동문학부 사무장을 지내고,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북도지부 부위원장단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이때 영향 때문이었을까. 윤복진은 6·25 전쟁 때 월북했다. 북한에 간 이후 그의 활동이나 삶의 행적은 2002년 발간한 '조선문학'에 김청일이 쓴 '동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에서 엿볼 수 있다. 윤복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다룬 이 글에 따르면, 윤복진은 '동요 할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북한 문단에서도 동요시인으로서 입지를 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52년 새 교과서 편찬사업이 진행되면서 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발돼, 인민학교 1학년용 음악 교재에 실린 동요 '새 조선의 꽃봉오리'를 쓰기도 했다. 1980년 동요동시집 '시냇물'을 출판하는 등 윤복진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창작 활동을 놓지 않았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참고자료=원종찬 평론집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창비), 북으로 간 동요시인, 윤복진(최윤정), 대구 지역 아동문학 연구(류덕제), 대구문학관 근대작가 특별전 '아동문학가 윤복진을 아시나요?'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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