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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 하나 들고… 사랑 찾아 사선 넘었다

Jimie 2022. 10. 1. 12:33

[단독] 약도 하나 들고… 사랑 찾아 사선 넘었다

우즈베키스탄 北식당 여직원 5명 연쇄 탈북
지난 5월 탈북 물꼬 튼 여직원은 현지 한국교민 사귀며 귀순 결심
애인이 한국대사관 약도 그려줘… 남은 여직원 4명도 줄지어 귀순
北보위부 조사나오자, 여직원들 “극형 받을라” 연쇄탈북

입력 2022.10.01 05:00
 
 

한국대사관 가는 길은… -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겐트의 북한 식당 ‘내고향’ 종업원 A씨가 현지 한국 교민 B씨로부터 전달받은 약도(왼쪽 작은 사진)를 바탕으로 만든 일러스트. 약도에 표시된 ‘옛날내고향’은 2021년 식당을 옮기기 전 식당 위치를 의미한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 여종업원 5명 전원이 지난 5월부터 4개월간 3차례에 걸쳐 식당을 탈출해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30일 알려졌다.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 MZ 세대(1980~2000년대 출생)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연쇄 탈북의 물꼬를 튼 여종업원 A씨는 현지 한국인과 이성 교제를 하다 탈북 결심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먼저 탈북하자 나머지 4명도 뒤따라 귀순길에 올랐다고 한다. 해외 북한 식당 직원들의 집단 탈북은 2016년 4월 중국 닝보의 ‘류경식당’ 탈출 이후 6년여 만이다. 지난 5년간 코로나 확산과 문재인 정부의 북한 심기 살피기,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 등으로 탈북민이 급감하는 가운데 집단 탈북 사건이 다시 발생한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현지 소식통과 정보 당국 등에 따르면, 타슈켄트 시내에 있는 북한 식당 ‘내고향’ 종업원 5명은 올해 5월 1명, 6월 1명, 8월 3명 등 3차례에 걸쳐 모두 탈북했다. 이들은 현지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 귀순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식당 ‘내고향’은 지난 2019년 9월쯤 문을 열었다. 현지인뿐 아니라 한국 교민과 여행객도 자주 찾아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국내 유명 유튜버들도 이 식당을 찾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종업원 모두가 탈북해 한국에 온 것이다. 현재 이 식당은 폐업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즈베크 北식당서 일하던 여직원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 ‘내고향’ 한 여종업원이 과거 식당에서 일하던 모습. /현지 소식통 제공 

 

이번 탈북 행렬은 종업원 A씨가 지난 5월 처음으로 귀순하며 연쇄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20대 초반인 A씨는 현지 한국 교민 B씨와 상당 기간 이성 교제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늦깎이 대학생으로 타슈켄트에 오래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소식통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두 사람이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등 진지하게 교제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A씨가 탈북을 결심하자 B씨가 A씨가 일하는 식당에서 한국 대사관으로 가는 약도를 그린 편지를 전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이들의 탈북 소식은 손님이 많던 북한 식당 ‘내고향’이 돌연 폐업하면서 현지 교민 사회에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가 입수한 편지를 보면, 한국 교민 B씨는 A씨에게 “오빠는 우리 OO가 자유로운 곳에서 예쁘게 최고의 여자로 생활했으면 좋겠다” “떳떳한 대한민국의 한 여자로 만들어서 남의 시선·눈총 받지 않고 너와 손잡고 걸으며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썼다. 그는 또 “고향에 가서 평생 어려움과 감시·통제 속에서 사는 것보단 한국 생활은 기본만 살아도 자유와 인권, 사람의 권리, 모든 것이 보장되는 사회야. 네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단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B씨는 한국 정착이 쉽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 생활이 파라다이스처럼 쉽진 않겠지만, 조금 힘든 시기만 지나면 적응되고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고 했다. 또 “소량의 돈을 보낼 테니 자주 신는 신발 깔창 아래 양쪽에 분산해서 넣어 놓아라” “대사관에 도착하면 텔레그램 깔아서 나에게 연락해라” 같은 설명도 했다. 그는 컴퓨터로 작성해 출력한 A4 용지 2장 분량의 편지에 이 같은 내용을 담고 편지 하단 공백에는 볼펜으로 대사관 약도를 직접 그렸다. 편지 글에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탈북 여직원들이 일했던 식당 '내고향'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 '내고향'의 모습. 이 식당의 20대 초반 여종업원 5명은 지난 5월부터 3차례에 걸쳐 탈출해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30일 알려졌다. 해외 북한 식당 직원들의 집단 탈북은 2016년 4월 중국 '류경 식당' 사건 이후 6년여 만이다. /유튜브 우즈베키스탄 TV 

 

이후 A씨는 지난 5월 몰래 식당을 빠져나와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귀순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 한 달 뒤인 6월 다른 종업원 1명도 같은 방법으로 탈북한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나머지 직원 3명이 같이 귀순길에 올랐다. 현지 교민에 따르면, A씨에 이어 다른 종업원 1명이 ‘실종’됐을 때 북한 보위부가 급파돼 조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남은 여종업원 3명은 강제 귀국 조치를 당한 뒤 극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이들 5명 모두 무사히 입국해 합동 조사를 받고 안전하게 체류 중이라고 한다.

 

 

이번 집단 탈북 사건은 지난 5년간 탈북자 수가 급감하는 가운데 발생해 주목된다. 통일부에 따르면, 입국 탈북민 수는 2012년 1502명을 시작으로 2013년부터 2019년까지 1000∼1500명 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김정은 대변인’이란 얘기가 돌고 코로나 사태로 북중 국경이 봉쇄되면서 탈북자 수는 급감했다. 특히 2019년 북한 어민 2명이 탈북해 한국으로 왔지만 강제 북송된 사건이 북한 내부에 알려지면서 귀순 발길은 더 줄었다. 2020년 229명이었던 입국 탈북자 수는 지난해 63명으로 떨어졌다.

 

대북 소식통은 “코로나 위기가 끝나면 북한 MZ 세대의 탈북 행렬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10년간 탈북한 1만701명 중 20대가 3194명(30%)으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30대도 24%에 달했다. 이른바 MZ 세대가 전체 탈북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지난 2019년 강제 북송된 탈북 어민 2명도 90년대생 MZ 세대였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북한 MZ 세대는 김씨 정권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기성세대와 달리 충성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심리가 강하다”면서 “북한이 MZ 세대 챙기기를 위해 정책 변화를 주고 있지만, 식량 부족 등 경제 악화로 MZ 민심 잡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