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정원·이슬람 정원서도 찬사 받은… ‘덧없는 사랑의 표상’ 바람꽃
문화 일보
게재 일자 : 2022년 04월 18일(月)
독일 뉘른베르크의 약제사이자 식물학자 바실리우스 베슬러(1561∼1629)가 그린 플로리스트의 아네모네.
■ 박원순의 지식카페 - 아네모네
그리스 신화 ‘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 등장… 우아한 자태로 인기
꽃 좋아했던 오스만 제국 사람들, 페르시아서 들여와 유럽에 전파… 1936년 주요섭은 ‘아네모네의 마담’ 집필
아네모네는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지녔다.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려 애쓰지 않고 다른 화려한 꽃들과 잘 어우러지며 정원에 섬세함을 더해주니 더 매력적이다. 가만히 봄바람에 흔들리는 아네모네 꽃을 보면 첫사랑, 짝사랑 혹은 이뤄지지 못한 슬픈 사랑처럼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운 느낌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아네모네는 사랑과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그녀의 연인이었던 아름다운 청년 아도니스에 얽힌 이야기에 등장한다. 멧돼지에게 물려 죽은 아도니스가 흘린 피에 아프로디테의 눈물이 떨어져 섞인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아네모네다. 아도니스의 허무한 죽음을 상징하듯 이 꽃은 쉽게 바람에 꽃잎이 날릴 수 있는 연약한 꽃으로 묘사된다. 아네모네는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아네모스(anemos)와 딸을 뜻하는 오네(-one)가 합쳐져 ‘바람의 딸’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네모네는 사랑의 괴로움, 덧없는 사랑의 표상으로 기억된다. 1936년 주요섭의 단편소설 ‘아네모네의 마담’에서 이 꽃의 이미지는 같은 이름의 다방에서 일하는 마담 영숙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단골손님이었던 대학생이 자신을 좋아한 줄로 착각했던 영숙의 서글픈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이미자 씨가 노래한 ‘아네모네’에서도 마음 전할 길이 없는 허무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아네모네 꽃에 대한 기록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는 6000종이 넘는 꽃식물, 양치식물, 약초가 풍부하게 자라는 식물의 보고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대부분 식물의 효용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네모네는 아름다운 꽃으로 찬사를 받았다. 아테네는 보랏빛 아네모네로 덮인 도시로 묘사되고는 했다. 그 아네모네 종류는 기다란 수술들이 가운데 암술 부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왕관처럼 생긴 아네모네 코로나리아(Anemone coronaria)다. 이 꽃은 특히 그리스의 가장 큰 섬인 크레타의 들판에 널리 퍼져 자연스럽게 자라며 장관을 이룬다. 꽃 색깔은 보라색뿐 아니라 빨간색·파란색·흰색으로 다양하며, 두 가지 색깔이 혼합된 종류도 있다. 각기 다른 색깔의 꽃은 동시에 피지 않고 한 번에 한 종류가 지배적으로 피어나며 카펫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크레타섬의 아네모네는 12월부터 5월까지 계속해서 꽃을 피운다. 아네모네는 기원전 3세기 테오프라스토스의 ‘식물 연구’, 기원후 1세기 디오스코리데스 ‘약물지’에도 등장한다. 기원후 1세기쯤 대플리니우스는 야생종 아네모네와 재배종 아네모네를 구별하기도 했다. 재배종에는 꽃 색깔이 다양한 아네모네 테누이폴리아(A. tenuifolia) 종류도 포함됐다.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아네모네가 사랑받았던 곳은 이슬람 정원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주위에 식재된 아몬드, 자두, 사과 같은 과일나무 아래로 아네모네 꽃들이 피어났다. 15세기 이슬람 정원을 그린 그림 속에서는 어김없이 아네모네가 등장하고, 16세기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샤 압바스의 눈부신 돔과 꽃무늬 아라베스크로 장식된 광대한 정원에서도 아네모네가 자랐다.
이슬람 정원의 아네모네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린 공신은 터키인들이었다. 온갖 종류의 꽃을 좋아했던 오스만 튀르크의 훌륭한 꽃 감정가들과 상인들은 에이전트가 돼 고대 페르시아 정원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의 옛 이름)로 아네모네를 들여와 유럽에 전해줬다. 물론 튤립·붓꽃·히아신스·수선화·백합 같은 꽃들도 함께였지만, 아네모네는 정원에서 높은 수준의 세련미를 더해주는 꽃으로 돋보였다. 16세기 후반 유럽의 식물 애호가들과 정원사들은 앞다퉈 열심히 아네모네 품종들을 수집했다. 이 시대에 새롭게 도입된 꽃들은 새로운 상징을 부여받고 즉각적인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에서도 은매화, 회양목, 라벤더, 로즈메리 관목이 심긴 화단에 화려하고 풍성하게 꽃을 피우는 아네모네가 인기였다.
세르모네타의 공작(Duke of Sermoneta)이었던 프란체스코 카에타니(Francesco Caetani·1613∼1683)가 시스터나(Cisterna)에 만든 정원은 특히 아네모네로 유명했다. 그는 무려 230품종 2만9000본에 달하는 아네모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정원에는 커다란 화분과 문양 화단마다 색깔별로 아네모네가 자랐고, 각각의 품종에는 기념하고자 하는 가문 혹은 기부자의 이름이 붙었다. 가령 ‘카에타노 공작부인(Duchessa Caetano)’ ‘루크레티아(Lucretia)’ ‘자코모 첼리니(Jacomo Cellini)’ 따위다.
많은 이탈리아 품종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에 선물, 교류, 매매를 통해 전해졌다. 프랑스에서는 플랑드르 약초학자 렘베르토 도도엔스(Rembert Dodoens)가 1583년 출판한 책에 아네모네가 처음 등장한다. 세 가지 색상의 홑꽃 아네모네 코로나리아 종류였다. 앙리 4세의 두 번째 부인으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는 꽃 재배와 함께 정원과 예술 분야를 크게 부흥시켰다. 1608년 궁정 화가 피에르 발레(Pierre Vallet)의 그림 속에서는 12종의 서로 다른 아네모네가 왕실 정원에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프랑스에 붉은색의 겹꽃 아네모네 테누이폴리아가 들어온 건 1598년이었는데, 나름 고급 아네모네 종류로 여겨졌다. 당시 유명한 플랑드르 식물 세밀화가였던 얀 브뤼헐(Jan Brueghel·1568∼1625)이 특히 그 종류의 아네모네를 많이 그렸다. 유럽에서 아네모네의 가장 훌륭한 공급원으로 유명했던 사람은 파리의 르네 모린(M. Rene Morin)이었다. 재배자라기보다는 유통가이자 사업가였던 그는 1623년 아네모네 카탈로그를 발행했는데, 재배 지침서와 함께 여러 쇄에 걸쳐 인쇄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1630년대에는 영국의 식물학자이자 정원사인 존 트러데스캔트도 그로부터 아네모네를 구입할 정도였다. 르네 모린의 동생 피에르 모린의 꽃의 정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종류’의 아네모네가 피어 있었다. .
17세기 영국의 식물 애호가 토머스 핸머(1612∼1678)는 새로운 알뿌리에 대한 열렬한 수집가였는데, 자신의 책을 통해 아네모네가 ‘너무 아름다워 어떤 꽃에게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고 기록하며 극찬했다. 당시 아네모네 같은 꽃들은 플로리스트를 통해 구입할 수 있었다. 사실 ‘플로리스트’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영국의 일기작가이자 가드너였던 존 에벌린(John Evelyn·1620∼1706)은 플로리스트를 ‘꽃을 재배하는 가드너 또는 같은 방식으로 꽃을 이해하고 기쁨을 주는 모든 사람’으로 정의했다.
18세기에는 영국에서 일어난 풍경식 정원 운동, 그리고 아메리카와 중국으로부터 대거 유입된 흥미로운 식물들에 밀려 아네모네는 점점 인기가 떨어졌다. 그러다가 19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인공적이면서도 요란한 정원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자연주의적인 섬세한 정원을 필요로 함에 따라 아네모네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하지만 이때의 아네모네는 숲 하부에 어울리는 아주 소박한 종류였다. 가령 1860년대 클리브던 정원에서 존 플레밍은 숲지대의 개방된 경관에 아네모네 네모로사(A. nemorosa)를 식재했다. 여기에 블루벨, 프림로즈도 함께 혼합해 더욱 자연스러운 느낌을 줬다. 1870년 출간된 윌리엄 로빈슨의 ‘야생의 정원’(The Wild Garden·1870)을 미리 선보인 셈이었다.
17세기 초 ‘꽃의 정원’(Hortus floridus·1614)에 아네모네 그림을 소개한 크리스핀 데 파스(Crispin de Passe)부터 20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까지 아네모네를 그린 화가들의 작품과 책도 많았다.
아네모네 코로나리아
전 세계 150종에 이르는 아네모네는 주로 온대와 아열대 지방에 분포하지만 호주와 뉴질랜드, 남극에는 없다. 흰색 아네모네는 주로 동양에 자생하는 반면, 빨간색·파란색·노란색 아네모네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자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네모네를 바람꽃이라 부른다. 한국 특산 식물인 홀아비바람꽃(A. koraienesis)을 비롯해 숲속에 자라는 꿩의바람꽃(A. raddeana) 등 15종 정도가 자생한다. 특히 해마다 4월이 되면 비무장지대 숲에서 순차적으로 피어나는 여러 종류의 바람꽃이 이 땅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나도바람꽃(Enemion raddeanum)이나 너도바람꽃(Eranthis stellata)처럼 이름에 바람꽃이 들어있지만 아네모네가 아닌 종도 있다. 서양의 정원에서 인기 있었던 크고 화려한 아네모네 종류와 달리 우리나라 바람꽃 종류는 작고 수수한 매력이 있어 숲 지대나 암석원에 적합하다.
아네모네는 일단 정원에 자리를 잡으면 안정적으로 잘 자란다. 양지와 반음지 모두 괜찮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이 좋다. 바람꽃이라는 이름답게 통풍이 잘되는 곳을 선호하며 대부분 더위에는 취약하다.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들이 대개 그렇듯 아네모네 역시 독성을 지니고 있다. 아네모닌이라는 물질이 들어있어 반려동물과 사람의 피부와 점막을 자극하고 물집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바람꽃 종류는 혈액 순환을 촉진하는 등 여러 효능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아네모네의 약효에 관한 기록이 드문 편이며, 중세 시대 약초원에서도 잘 사용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아네모네가 가드너에게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사슴이 아네모네를 기피한다는 사실이다. 애써 가꿔놓은 정원의 많은 식물이 사슴과 고라니의 먹이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꽃들이 지켜질 수 있다면 가드너에게는 작지만 소중한 기쁨이 된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 아네모네 코로나리아
이스라엘, 요르단 등 지중해 지역 원산이다. 길가, 초원, 숲 가장자리 등 양지 혹은 반양지 건조한 곳에서 잘 자라며 1∼4월에 개화한다. 덩이줄기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인데 겨울이 추운 지방에서는 매년 가을에 심어 봄에 꽃을 보는 한해살이풀로 즐긴다. 꽃이 더 큰 품종들로 개발된 ‘데칸(De Caen)’ 그룹은 파란색, 보라색, 진분홍색, 흰색 그리고 빨간색과 흰색이 섞인 홑꽃 종류며, ‘세인트 브리지드(St. Brigid)’ 그룹은 반겹꽃과 겹꽃 종류로 나와 있다. 아네모네 코로나리아는 2013년에는 이스라엘 국화로 지정돼 매년 한 달 동안 붉은색 아네모네 꽃 축제가 열린다.
이미자 - 아네모네
1968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RJ9GaKVgkC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