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한국인 DNA에 각인된 ‘옳을 의(義)’
동의한다. 한중일 문명비교사 ‘풍수화’에서 김용운은 “부당한 일에는 평민도 스스로 들고 일어나 의병이 됐지만 일본엔 그런 의병이 없다”고 썼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표를 주었던 국민도 이건 아니다 싶으면, 출범 100일도 못 참고 지지를 철회했다. TV사극을 보시라. 수염 허연 신하들도 목숨을 걸고 임금 앞에 엎드려 외치는 게 일이었다. “아니 되옵니다!”
역사가이자 주일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는 1392년부터(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꼭 200년 되던 해 터졌다) 1910년까지 518년 존속한 조선에 대해 “중국의 어느 왕조와 비교해도 두 배나 긴 시간을 유지한 ‘개량적 중국형’의 모범적 유교사회”라고 ‘동양문화사’에서 분석했다. 나라가 작아 더 철저하고도 균일하게, 심지어 교조적 극단적으로 유교 원리원칙에 따른 것이 ‘의’로 나타났다는 생각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 동아일보DB
● 의견이 다르면 공존 못하는 유교근본주의
유교근본주의에서 정책에 대한 반대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다. 도덕적 사악함이다. 감찰기구를 동원해 죽여 마땅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의 타협이나 공존을 배신이요, 사꾸라로 여기는 것은 지금도…다르지 않다.
이순신 장군은 의와 불의가 싸우면 반드시 의가 이긴다는 신념을 지닌 지장(智將)이자 덕장(德將)이었다. 그래서 23전 23승을 거두었을 것이다(물론 흠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무수한 덕목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정유재란은 우리나라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전쟁이다. 굳이 의를 찾는다면, 조선은 1599년 난리가 끝난 뒤로도 300년 이상 기신기신 유지됐지만 일본과 중국은 정권이 무너졌다는 것이랄까.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 수십 척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포위한 뒤 공격하기 위해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펼치는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망해야 할 때는 망해야 발전할 수도
17세기 초 한국도 새 출발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거꾸로 갔다. 더 경직된 유교에, 지극한 충효사상에 매달리며(중국엔 우리 같은 제사나 차례도 없다) 망해버린 명나라 대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 중국 일본처럼 정권교체 되지 않고 조선왕조가 유지된 것은 지배층인 사림의 권한이 강화됐기 때문이라고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2016년 논문에 썼다.
무능한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호종공신 90명, 전쟁에서 싸운 장수 선무공신 18명만 달랑 책봉했다가 불만이 들끓자 무려 9060명을 추가 책봉했다. 이들이 왕조 유지에 버팀목이 된 건 물론이다. “심하게 타락한 관료제 국가는 한국같이 작은 나라에서 오래 유지될 수 있다”는 라이샤워의 분석이 섬뜩한 이유다. 제 백성 뜯어먹어도 나라는 굴러갔다. 그래서 지금도 대통령실에선 검찰과 관료 출신 늘공(늘 공무원)-어공(어쩌다 공무원) 권력다툼이 가열찬 건가.
미륵산에서 내려다 본 한산도대첩 격전지. 동아일보DB
● 권력자가 의를 반기지 않는다면
의주까지 피신한 임금이 한산대첩(7월 6~13일)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에 대해 하는 말씀치고는 너무나 냉정하지 않은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요즘 정치인으로 치면 딱 밴댕이다. 못난 권력자에겐 잘난 신하가, 자신은 행하지 않는 ‘의’가 반갑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제왕, 다신 모시고 싶지 않다. 1910년 조선이 망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포함한 ‘건국의 아버지(어머니)들’은 이씨 왕조 부활을 말하지 않았다. 혁명하지 않고도 선거로 정권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는 그래서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권력자가 의를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21세기 국제사회에도 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 압도적 영화 ‘한산’…압도적 지정학과 밴댕이 정치Ⅱ가 이어집니다.
김순덕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