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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夜宿誰家 / 梅竹軒 成三問 (매죽헌 성삼문)

Jimie 2022. 7. 20. 10:52

成三問의 絶命詩 (절명시) : 今夜宿誰家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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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아버지는 도총관 성승(成勝), 어머니는 현감 박첨의 딸로, 삼문은 홍주(洪州)- 홍성의 외가 노은골 에서 태어났다.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매죽헌(梅竹軒) 의 묘(墓)는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 있다.

성삼문묘소 재실 입구

 

성삼문은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세종 20년(1438)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예기대문언독"을 펴내기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중국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13번이나다녀오기도 해

한글 반포에 공로가 많았다.

 

재실인 성인각(成仁閣)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으면서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의 3등 칭호를 사양하였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과 예조참의, 1455년 예방승지 등의 직책에 올랐다.

 

성삼문은 아버지인 성승, 박중림· 박팽년· 유응부· 권자신· 이개· 유성원·윤영손· 김질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는데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후에 성승, 하위지 등과 함께 한강가(지금의 서울 노량진)에서 능지처형을 당했다.

 

재실앞 신도비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처형·유배 등을 당했는데,

그중에서도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 맹년(孟年)· 맹종(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그후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종직· 홍섬· 이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육신전"에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후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사면,복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여,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성삼문 묘소 오르는길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 하는데, 현재 노량진 사육신 묘역이 그곳이다.

 

성삼문 묘소 입구

 

이곳 논산의 묘소는 처형 직후 전국을 돌면서 사육신의 시신을 전시할 때,

그의 일지(一肢, 팔다리)를 묻었다는 묘가 바로 이곳 논산 기야곡면 양촌리이다.

 

그는 거열형(車裂刑) 을 당했다고 하는데 거열형이란 죄인의 목, 팔, 다리를

각각 다른 말에 묶어 다른 방향으로 당기게 하여 사지를 찢어 죽인 형을 말 한다.

그래서 다리 하나가 이 곳에 묻혀 일지총이라 부르기도 한다.

 

매년 음력 10월 그믐에 선생의 위덕을 기리는 묘제 행사가 거행되며,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성삼문 묘역

 

성삼문이 죽기 전에 쓴 절명시(絶命詩)

 

수형시(受刑詩)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북소리가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 머리 들어 뒤돌아보니 해가 서산을 넘네

황천무일점(黃泉無一店)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터인데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 갈거나

 

성삼문의 묘

 

선생(先生)이 1456년(병자, 丙子)년 6월 8일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끌려 갈 때

수레가 잠시 멈추자, 그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충절(忠節)을 다음과 같이 시(詩)로 읊었다.

식인지식의인의(食人之食衣人衣) 임금이 주신 녹을 먹고 임금이 주신 옷을 입었으니

소지평생막유위(素志平生莫有違) 본래의 지조 평생 동안 어기고 싶지 않다오.

일사고지충의재(一死固知忠義在) 한 목숨 바치는데 충의가 있음을 알겠거니

현릉송백몽의의(顯陵松栢夢依依) 현능(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련하네.

매죽당 성선생지묘(梅竹堂 成先生之墓) 묘지석

 

다음의 시는 세조가 태종의 '하여가'로

성삼문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자 응대한 시조이다.

 

성삼문의 시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중국에 갔던 성삼문은 수양산에 들어가 숨어살면서 고사리만 캐먹고 살다가

영양실조로 죽어, 만고의 충신이 된 백이ㆍ숙제를 위해 수양산 아래 세워진

이제를 찬양하는 이른바 ‘이제비(夷齊碑)가 서있는 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지었다.

 

제이제묘(題夷齊廟)

 

당년고마감언비(當年叩馬敢言非) 그때 말고삐 당기며 그르다고 감히 말했으니

대의당당일월휘(大義堂堂日月輝) 대의가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빛나더라

초목역점주우로(草木亦霑周雨露) 풀과 나무 또한 주나라 이슬과 비로 자라는데

괴군유식수양미(愧君猶食首陽薇) 그대여 수양산 고사리 먹은 것 부끄러워 하소

 

문인석

 

명나라 황제를 감탄시킨 성삼문의 시

 

설작의상옥작지(雪作衣裳玉作趾)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굽을 지어

노저규어기다시(蘆渚窺魚幾多時) 갈대 숲 물가에서 얼마나 물고기를 엿보았던가?

우연비과산음현(偶然飛過山陰縣) 우연히 날라 산음현을 지나다가

오락희지세연지(誤落羲之洗涓池) 잘못으로 왕희지의 벼루 씻는 물에 떨어졌구나.

 

이 시는 성삼문이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명(明)나라 황제가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볼 양으로

어전에 중국의 신비들을 불러 모으고 두루마리 하나를 내 보이며,

"지금, 짐이 가진 두루마리에는 백로(白鷺)의 그림이 그려져 있소,

이 백로(白鷺)를 두고 시(詩)를 지어 보시오." 라고 하였다.

문인석의 귀에다 터전을 마련한 거미

 

성삼문(成三問)선생은 즉시

설작의상옥작지(雪作衣裳玉作趾)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굽을 지어

노저규어기다시(蘆渚窺魚幾多時) 갈대 숲 물가에서 얼마나 물고기를 엿보았던가?

하고 두 구절을 지으니, 황제는 벽에 그림 두루마리를 펴서 거는데,

그것은 먹으로만 그린 묵화(墨畵)였다.

황제는 "그대의 시에는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굽을 만들어....”라고 하였는데,

이 그림은 흰 눈과 같이 백색의 의상도 아니며 붉은 옥으로 된 백로의 발굽도 아니니,

시와 그림이 맞지 않구나." 하며, 성삼문선생을 트집잡아 당황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성삼문은 "외신(外臣)의 시가 다 만들어지려면 아직도 두 구절이 있는데

나머지 까지 체워 보겠습니다." 하고 다음과 같이 이었다.

우연비과산음현(偶然飛過山陰縣) 우연히 날라 산음현을 지나다가

오락희지세연지(誤落羲之洗涓池) 잘못으로 왕희지의 벼루 씻는 물에 떨어졌구나.

 

산음현(山陰縣)은 왕희지(王羲之)가 살던 고장이다.

백로(白鷺)는 처음에 흰색 이였는데 왕희지 벼루 씻는 못에 빠져 먹물이 배어

검어졌다고 하는 재치에 황제이하 모든 선비들이 놀라 마지않았다고 한다.

 

묘역 양옆에는 잣나무가 빼곡히 서있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충절시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