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RK's

DPRK CG 2 04 그리운 강남

Jimie 2022. 4. 23. 20:59

 

DPRK CG 2 04 그리운 강남 Longing for KangNam

 

https://www.youtube.com/watch?v=Obir_2fr0PA 

 

그리운 강남 -

작곡: 안기영   작사: 김석송(김형원)  노래: 장란희

 

왕수복. 김용환. 윤건영 (1934년)|

金龍煥ㆍ尹鍵榮ㆍ王壽福 (1934년 5월)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 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 가는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 발목 상한지 오래이라네



그리운 저 강남 건너가려면
제비떼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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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일제강점기 김형원의 시 '그리운 강남'에 이화여전 성악가 안기영이 작곡한 강남 아리랑'으로...

1.2월 추운 겨울(일제폭압)이 지나고 3월 봄날(해방)을 그리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다가 일제가  금지곡으로 지정.

해방 후 남북의 교과서에 수록된 음악.. 작곡가의 월북으로 다시 금지곡이 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에 풀려서 널리 불려지는 그리운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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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원(金炯元) 1900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사회부장,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일제강점기 「이향」, 「아 지금은 새벽 네시」, 「불순의 피」 등을 저술한 시인. 언론인. 호는 석송(石松)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 계열에서 우익 운동에 참가하였고, 대동신문 부사장과 대공신문 사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 고향 논산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제1공화국 초대 공보처 차장에 발탁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조선에서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출판사 교정원으로 일하다가 1956년함경남도 안주탄광에 노동자로 배치받은 뒤 소식이 끊겼다는 설이 있다.

 

작품으로 〈무산자의 절규〉, 〈생장(生長)의 균등〉, 〈생명의 썩은 내〉 등이 있으며, 월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아 지금은 새벽 네시〉(1924)도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작곡가 안기영이 곡을 붙인 민요풍의 시 〈그리운 강남〉은 가곡으로 애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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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 (安基永 1900~1980) 성악가, 작곡가. 충남 청양읍에서 태어나 공주에서 자랐다. 공주 영명학교와 배재학당을 다녔고, 배재학당에서 악보 읽는 법과 풍금과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하였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선교사로부터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미국유학의 행운을 얻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를 잠시 지냈으며,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레곤주에 있는 엘리슨-화이트 음악학교(Ellison-White Conservatory)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였고, 1928년 귀국하여 1932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성악과 교수로 있으면서 성악과 작곡 그리고 민요 연구에 주력하였다. 이 때 이화여자전문학교 합창단 지도를 맡아 교내 발표와 전국 순회 연주활동을 하였다. 작품집으로는 1929년에 <안기영 작곡집 1>을, 1931년에 <안기영 작곡집 2>를, 1936년에는 <안기영 작곡집 3>을 내놓았다. 한편 민요연구의 일환으로 1931년 전통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조선민요합창곡집>을 발간하였으며, 같은 해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민요합창곡을 취입했다. 그리고 민요를 바탕으로 <견우직녀>, <콩쥐팥쥐>, <은하수> 등과 같은 ‘향토가극’이란 새로운 장르의 음악극을 만들었다. 해방 후에는 음악건설본부 성악분과위원장과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을 지냈으며, 6ㆍ25전쟁 중에 월북을 하였다. 월북 후 잠시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로 있다가 1980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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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복(王壽福, 1917년 3월 5일 ~ 2003년 6월)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수이다.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으로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명륜여자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생학교에서 다양한 기예를 배워 기생이 되었다 노래에 재능을 보인 왕수복은 10대 중반이던 1933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울지 말아요〉와 〈한탄〉을 취입하여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가 되었다. 이듬해 데뷔한 선우일선과 함께 기생 출신 신민요 가수로 쌍벽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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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일제강점기 김형원의 시 '그리운 강남'에 이화여전 성악가 안기영이 작곡한 '강남 아리랑'으로...

1.2월 추운 겨울(일제폭압)이 지나고 3월 봄날(해방)을 그리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다가 일제가 금지곡으로 지정.

 

해방 후 남북의 교과서에 수록된 음악으로...

 

발목 높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츰 높이를 더해 가다 허리까지 올리면

두 다리를 번쩍 들어 고무줄을 감아내리던 여자아이들의 고무줄 놀이에 단골 노래로 불렸던 그리운 그 노래 가 '그리운 강남" 이었다. 참으로 아련한 추억속에 가물거리는 영상이다.

 

작사가.작곡가의 월북으로 다시 금지곡이 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에 해금되어 다시 불려지는 그리운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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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공부>

로스케(일본어: 露助, ろすけ, ← 러시아어: Русский 루스끼, 로마자: Russkiy)

한국어일본어러시아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러시아인 스스로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인 '루스키(Русский : 이 말에는 본디 비하의 의미는 없다.)'를

러일 전쟁 당시 일본 군인들이 일본어식으로 음역하여 '로스케(露助)'라 부르며 러시아 군인들을 조롱하여 일컫던 말이 러시아인 전체를 비하하는 의미로 확대되었고, 이 말이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도 전파되어 러시아인 비하 표현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