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iting Articles

이대남에 엉뚱한 좌표 찍은 與···그들의 표계산 완전 잘못됐다

Jimie 2022. 2. 16. 06:15

이대남에 엉뚱한 좌표 찍은 與···그들의 표계산 완전 잘못됐다

중앙일보

입력 2022.02.16 00:01

업데이트 2022.02.16 04:28

박가분연구자이자 작가

지난해 12월 신남성연대는 '페미니즘 규탄'집회를 열었다. 배경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페이스북 포스팅. 그래픽=신재민 기자

더불어민주당은 표 계산을 완전히 잘못했다. 그들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1월 7일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를 올렸을 때 국민의힘을 '극우 반(反) 페미니스트'로 몰고 자기들은 중립 기어만 넣으면 적어도 2030 유권자 표 반은 갈라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듯하다. 민주당을 보면 영화 '남한산성'에서 오지 않는 근왕병을 기다리던 김상헌(병자호란 당시 노대신)이 떠오른다. 일부 민주당 관계자들은 국민의힘이 ‘여가부 폐지’를 공식화한 이후 2030 여성 결집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최근 민주당 서울시당에서 여론 동향을 분석한 보고서도 “이대남 드라이브는 있지만 (기대했던) 이대녀 역풍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율이 40%를 돌파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2030, 특히 2030 남성 지지율 하락을 꼽았다.

외면하고 싶든 아니든 이대남 신드롬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대남은 지난 문재인 정부 5년을 ‘페미 정부 5년’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이들이 전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결집하고 있다. 그들은 완고했던 윤 후보 태도를 바꿀 만큼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는 세력이다. 심지어 그들은 ‘공정 프레임’으로 또래 이대녀를 설득할 힘마저 갖고 있다. 수도권 대학 총여학생회가 학생투표로 폐지된 것은 상당수의 여학우를 설득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의 주장을 성별 갈라치기로 폄하하면 안 되는 이유다. 이대남은 지난해 4월 서울·부산 보궐선거 이후 어떻게 하면 ‘정치적 다수파’를 형성할 수 있는지 그 요령을 터득했다. 난 앞으로 10년 안에 이들의 주장, 가치관이 사회의 주류가 될 거로 본다.

여가부 폐지 이슈 이면에는 그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공정성 이슈가 자리 잡고 있다. 독박 병역,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양성평등채용목표제, "남성은 성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되고 이를 해명하는 건 남성의 시민적 의무"라던 나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의 발언, 로스쿨·의대·한의대에 더해 올해 불거진 여대 약대 문제 등등. 이 정부의 친페미니즘 기조는 교육·부동산·일자리 정책과 더불어 문재인 정부 평가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그 기조가 설령 실질적이든 립서비스에 불과하든 관계없이 말이다.

지난 9일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 회원들이 서울시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청년 남심을 잡겠다며 대선후보가 SNS에 '여성가족부 폐지' 글을 남기는 등 여성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정치 행위를 중단해야한다"고 밝혔다. [뉴스1]

이대남에 대한 악의적 낙인 걷어내야

민주당은 이대남에 대한 정확한 인식부터 가져야 한다. 사실 이대남은 지난 5년간 상식적인 주장을 펼쳐왔다. 그런데도 일베·극우·여성혐오라는 낙인을 찍었다. 국민의 절반 이상, 그리고 여성 40%가 찬성하는 여가부 폐지론을 '극우 선동’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그 연장 선상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핵심을 비껴간 프레임이다. 이대남, 그러니까 1990년대~2000년대생 남성들은 일베에 우호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일베의 패륜에 분노하고 촛불시위 때 누구보다 먼저 대통령 탄핵을 외쳤다.

젠더의식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보수화라는 진단과는 거리가 멀다. 통계청 사회조사의 ‘가사 분담 견해’을 보면 2008년 당시엔 20대 남성의 44%만이 ‘부부가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고 답했다. 반면 2020년 현재 20대 남성 83.4%가 '공평한 가사분담'을 지지한다. 지금의 이대남들은 젠더의식 면에서 과거보다 더 진보적이다. 이들이 이대녀 못지않게 가부장적 꼰대를 싫어하고 가정 내 평등한 성 역할을 지지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가 보여주고 있다. 이대남은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서도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누구보다 성적으로 평등한 가정환경과 학교 교육 속에서 자라났기에 오히려 성 평등을 특정 '이즘'이나 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공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규칙 아래 동등한 기회를 갖는 것, 남녀 편들지 않는 공정한 대우,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이대남 시각에서 볼 때 '성 평등이 곧 페미니즘'이라는 식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그렇기에 정부가 앞장서서 페미니즘을 두둔하고 나랏돈으로 이념에 기반한 운동을 재생산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남성 커뮤니티를 범죄온상으로 규정하고 검열·모니터링하겠다는 (리벤지 포르노는 공개 커뮤니티가 아닌 트위터나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되기에 그 자체로 헛발질이다) 레디컬 페미니즘 단체에 여가부 장관이 표창장을 준 건 여가부가 그간 해온 수많은 ‘선 넘는’ 행위 중 하나였다. 이대남이 여가부 폐지에 환호하는 이유다.

조국 사과 이전에 젠더 갈등 책임표명부터

2018년 8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보수단체의 집회에 워마드 회원들이 '신은 여성이다'라는 뜻의 푯말을 들고 있다. 워마드 회원들은 'men'에서 파생한 단어 'women' 대신 'womyn'이라고 표기한다. [중앙포토]

2015~16년 본격화한 극단적 페미니즘인 메갈리아·워마드 유행 당시만 해도 불화의 불씨를 잠재울 방법은 있었다. 갈등에 대해 공정한 태도만 지켰더라도 반은 먹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의 행보는 실기의 연속이었다. 집권 초반 진선미 당시 여가부 장관은 "여성할당제 덕에 장관 됐다"고 자랑하고, 여가부는 누구도 원치 않는 여성 아이돌 복장 가이드라인 따위를 만들었다. 급기야는 ‘여성 몰카 범죄자를 처벌하지 말라’는 2018년 혜화역 워마드 시위 당시 여가부·행안부 장관이 이들의 2차 가해를 공개적으로 두둔하고 나섰다. ‘내가 부당하게 공격당하더라도 이 정부는 내 편을 들지 않을 것’이 명확해진 순간 젊은 남성들은 급격히 지지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여권 인사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청년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서 그런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사안마다 무조건 ‘여자 편드는 게 진보고 정의’라는 안일한 인식이 화를 키웠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불공정과 내로남불, 그리고 자녀의 입시부정에 대한 사과 이전에 이런 행보에 대한 반성이 우선이다.

 

민주당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2018년 초 80%에 육박한 청년 남성 지지율이 혜화역 시위를 계기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신 수도권 대학가에서 총여학생회가 줄줄이 폐지될 때 밑바닥 민심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간파했어야 했다. 현실은 정반대다. 아직도 ‘이대남은 실체가 없다’라느니 ‘젠더 갈등은 부차적 문제’라는 현실 도피적 진단을 내놓고 있다. 여당의 정책자문 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진보진영 전체의 문제에 가깝다.

젠더 공론화위원회 만들어야

선거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승패에서 무슨 교훈을 얻느냐는 것이다. 선거 이후 그간 분출된 젠더 문제에 대한 공론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공론기구를 세울 것을 제안한다.
참고할 모델은 신고리 5·6호기 원전 공론화위이다. 페미니즘·비(非) 페미니즘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사들이 모여 공개 토론하고 첨예한 갈등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에게 배심원 역할을 맡기면 된다. 이 외에도 성범죄, 저출산(생), 청년고용, 군 복무 문제 등 제반 이슈에 대해 정치인, 시민단체, 관련 전문가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접점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구성원의 다양성은 필수다. 이런 논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리버럴’ 정당인 민주당은 페미니즘 편을 들 필요도, 그렇다고 안티 페미 편을 들 필요도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민사회 숙의로 도출한 결론만 따라도 지금처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선점한 이슈에 끌려다니는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젠더 문제는 별것 아닌 이슈가 아니라 청년들에게는 민생문제이고 또 정치세력의 진정성을 보는 척도이다.

[신지예의 인정불가]이대남 신드롬은 기획된 것
[홍서윤의 인정불가]이대남 프레임 누가 만들었나
 
박가분 작가 글에 페미니스트 정치인 신지예와 더불어민주당 홍서윤 청년대변인이 보내온 답글 형식의 칼럼을 붙입니다. 글 전문은 중앙일보 사이트(www.joongang.co.kr/series/11534)의 박가분 칼럼 하단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박가분 작가
 
 
 
 
인정불가
신지예페미니스트 정치인

이대남 신드롬은 기획된 것입니다

위기를 언급하지 않고는 내일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때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어느새 2년이 지났지만 그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정치는 지역 갈등, 세대 갈등도 모자라 성별 갈등을 조장하며 분열을 통한 각 진영의 이익 추구에 몰두 중이다.

언어기호학에서 이름은 호명되는 대상의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기능을 한다. 그저 대상을 지명하는 걸 넘어 사고하는 방식, 그리고 외부와 관계 맺는 태도까지 구속할 수 있다. 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름이 갖는 강력한 힘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일 거다. 이대남이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분석하기 전에 누가, 왜, 이들을 이대남이라고 부르는지 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대남은 이십대 남성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30대 남성까지도 아울러 같은 범주에 넣기도 한다. 그 안에는 1인 가구, 대학원생, 알바생, 회사원, 자영업자 등 다양한 배경과 삶을 가진 시민들이 있다.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개인을 이대남이라고 묶어 부르는 셈이다.

이대남이라는 정치 공작
왜일까. 이유는 사실 뻔하다. 시민 간의 화합을 막고 서로 갈등하게 만들어 그 분열로 이득을 취하려는 일부 집단의 정치적 공작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필수불가결하다. 이러한 갈등을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바로 선거다.선거 기간 동안 입장이 서로 다른 집단들은 토론하며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합일점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나 정치가 이를 악용한다면 선거는 오히려 공동체 의식과 상호 신뢰를 파괴하는 최악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이대남이라는 가상 집단을 앞세운 일련의 남성 우월주의 집단들(스스로는 역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은 OECD 국가 가운데 임금 격차가 가장 크고 유리천장 지수가 가장 높으며, 상장사 임원 5% 미만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 여성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지나치게 보호받고 있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공정을 말하지만 정작 이면의 불공정은 언급조차 안 한다. 심지어 일부는 "지난 4년 동안 민주당은 정신병 걸린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조정됐다"고 말한다. 민주당 주요 인사들에 성폭력 피해를 본 사람에게 ‘피해 호소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이 민주당 주요 당직과 이재명 대선 후보 캠프에 있는데 무슨 페미의 지배인가.

이런 갈라치기 정치 공작의 결과로 2030 여성과 페미니즘은 사회의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 낙인찍혔고 사악한 이념으로 조롱받고 있다. 최근의 반(反) 페미니즘 흐름은 페미니스트를 이기적인 남성혐오 집단으로 상정한다. 틀렸다. 페미니즘은 남성을 혐오하지도, 성차별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소수자든 상관없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이대남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여성 불안 남성 불만 모두 해결하는 정치
여성의 고통은 현실이다. N번방 사건, 카톡방 집단 성희롱 사건, 양진호 웹하드 카르텔 사건, 버닝썬 사건, 공군 내 성폭력 사건, 화장실 몰카 사건, 대학교 미투 등 일상적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 10년간 강력범죄 피해자 가운데 86.7%가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강남역 앞, 혜화역 앞으로 뛰쳐나왔고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외쳤다. 거리를 안전하게 걷고 싶고 성 착취 영상물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요구가 그렇게 비상식적인 일인가.

한국 젊은 여성 대부분은 여성 불안이 해소되어야 하듯, 청년 남성이 떠안고 있는 사회적 고통도 해결돼야 한다고 본다. 남성의 절반만 군대 가던 586세대와 달리 현재 20대 남성 징집률은 90%에 달한다. 가뜩이나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극심한 상황에서 18개월을 군대에서 보내는 건 과도한 부담이 맞다. 어렵사리 일을 얻어도 또래 여성보다 늦게 취업하기 때문에 뒤처진다는 불안 역시 근거 없는 피해의식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국방의 의무를 다한 청년들에게 그만한 보상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수고를 '국방의 의무'라며 가볍게 넘겼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 이미 병역 의무를 마친 일정 연령에게도 보상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합의 가능하다
이대남이든 이대녀든 앞선 세대보다 가난할 게 확실한 세대, 평생 일해도 아파트 하나 마련할 수 없는 세대, 기성세대가 경험해 보지 못한 취업난을 겪는 세대라는 점에서 똑같다. 20대의 고난은 다른 성을 가진 이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가린 채 서로를 적대시하게 하는 정치적 갈라치기는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남에 대한 악의적 낙인부터 걷어내야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증오를 넘어서야 한다. 박가분 작가가 제안한 공론화 위원회 같은 숙의민주주의의 토대는 공감과 합의에서 나온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대한민국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모두 두려움과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공동의 번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 마음을 잊지 말아야 진짜 숙의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닫아보기
 
인정불가
홍서윤더불어민주당 청년대변인

청년·여성·장애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지니며 산다.

 

이대남 프레임은 누가 만들었나요

박가분 작가 제언은 깊이 되새겨 볼한만 이야기다. 특히 두 가지는 동의한다.

첫째, 남성을 성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다루는 건 분명 잘못이고 수정되어야 한다. 2020년 법무부 성범죄 백서를 보면 2011~2019년 남성 성범죄자 비율이 매년 98% 이상으로 높지만, 그렇다고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서 구조적 맥락을 놓치지는 않는지 짚어볼 필요는 있다. 왜 성범죄 가해자 중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지 구조적 측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고, 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적 논의와 개선 이전에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표현 탓에 논의 자체가 불발된 것은 매우 안타깝다.

둘째, 이대남에 대한 악의적 프레임을 걷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1980년대생과 90년대생, 2000년대생 남성들이 대체로 일베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실 너무 당연하다. 한 세대를 동일한 집단으로 규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대남에 대한 악의적 프레임은 누가 하고 있는가. 박가분 작가의 글을 읽으며,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가 떠올랐다. 미국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거짓말쟁이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이대남에 대한 악의적 프레임이 있다고 발언하는 순간 악의적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그 프레임은 누가 만들고 있는 것인가.

이쯤에서 좀 다른 시각으로 짚어볼 부분도 있다. 특히 젠더 문제와 젠더‘화’된 문제를 구분해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먼저 말하고 싶다. 현재 이대남·이대녀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논의되는 젠더 문제 안에는 진짜 젠더 문제도 있지만, 젠더 문제가 아닌 젠더‘화’된 구조적 불평등 문제도 섞여 있다. 너무 많은 민생 관련 문제가 젠더 프레임에 가려져 있다. 젠더 담론이 아닌 불평등 담론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 정치와 언론의 책임이 막중하다.

일례로 젠더‘화’된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고용 측에서의 성차별 문제는 사실 기업의 경직된 노동문화에서 기인하는 게 크다. 이것을 남녀 취업준비생의 밥그릇(파이) 싸움으로 치부하는 게 누구에게 이로운가. 승자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구시대적 조직문화 뒤에 숨은 기업일 것이다.

군인 복무 문제도 마찬가지다. ‘군필’ 남성의 명예를 왜 꼭 여성과 대비해야 하나. 자꾸 이런 프레임으로 보니 본질적 문제는 개선하지 못한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군대에 가서 자유를 침해당하고 비인간적 대우를 받는 건 시대에 뒤처진 군 인권 의식의 개선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군 인권과 처우의 문제이며, 징병에 따른 보상은 국가의 몫이다.

이 외에도 2030 삶과 연계되어 구조를 바꿔야 하는 문제가 즐비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구조적 불평등의 프레임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박가분 작가 글을 보며 젠더 문제와 젠더‘화’된 문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더욱 절실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갈등을 촉매제로 사용할 게 아니라 불평등을 해소하고 화합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다시금 확인했다.

결국, 정치는 양분화된 갈등이 아닌 균형에서 존재 가치를 발한다. 그래서 박가분 작가 제언처럼 젠더 문제와 젠더‘화’된 문제를 두고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충분히 듣고 충분히 숙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동의한다. 이러한 민주적 과정을 통해 현재 2030이 직면한 불평등 문제 해결과 제도적 보완을 시급히 진행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닫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