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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 & 나이팅 게일

Jimie 2022. 2. 14. 09:04

크림전쟁 발발…나이팅 게일 활약

 

전투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 더 많아…간호의 중요성 일깨운 전쟁

김인영 기자

16세기 크리미아 칸국

 

흑해의 크림 반도는 언제나 화약고였다. 1853년부터 3년간 지속되었던 크림 전쟁의 전쟁터가 되었고, 2014년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이었던 크림 반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점령했다.

 

170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원하는 것은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원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북쪽 발트해와 동쪽 블라디보스톡에 항구를 두고 있지만, 겨울에는 얼어버린다. 러시아로선 겨울에도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흑해 연안에 영토를 확보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크림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가 먼저 걸었다.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러시아 니콜라스 1세에 선전포고를 했다. 중동과 동유럽, 아프리카 북부를 장악한 오스만 투르크의 힘이 쇠하고,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던 때였다.

 

전쟁은 종교 분쟁에서 시작된다. 종교적 광기가 개입되면 전쟁은 피도 눈물도 없어진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국내 카톨릭의 인기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지에서 카톨릭의 특권을 달라고 투르크 술탄에게 요구했다. 당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었다. 술탄은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성지 관리는 그동안 그리스 정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차르가 담당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774년에 체결한 조약을 거론하며 예루살렘 성지의 관리권을 주장했다. 이에 투르크 술탄이 프랑스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러시아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프랑스가 무력시위를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전함을 흑해에 파견해 러시아 차르에 압력을 넣었다. 이에 1853년 7월 러시아군은 지금 루마니아 영토인 몰다비아·왈라키아를 침공해 오스만 투르크를 북쪽에서 위협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누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지의 형식만 남았을 뿐이다.

 

전쟁은 처음에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 두나라 사이에 전개되었지만, 곧이어 프랑스와 영국에 투르크 편에 서고, 사르데냐 왕국이 가담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전투는 흑해 일대와 동유럽의 다뉴브강 일대, 카프카즈 산맥에서 벌어졌다. 개별적 전투에 관해서는 수많은 저작물들이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크림전쟁 당시 Shadforth 대령과 그가 이끄는 57연대

 

 

영국군인들

 

이 전쟁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현대 기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포탄과 철도, 전보가 오갔다. 또 종군기자가 전쟁에 참여해 전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첫 전쟁이었으며, 카메라로 담은 전투 장면이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크림 전쟁이 역사적으로 조명받는 이유는 엄청난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참전 인원만 150만명에 이른다. 투르크등 연합군이 60만, 러시아군이 90만명 참전했다. 사망도 많았다. 사망자가 오스만 투르크 4만5,000명, 프랑스 10만명, 영국군 2만명이었고, 러시아 사망자는 무려 45만명에 이르렀다.

 

물론 최신 무기가 등장했기 때문에 사망자가 큰 탓도 있지만,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러시아의 경우 전투를 벌이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무려 37만명이나 되었다. 전염병이 그 원인이다.

 

크림 전쟁은 전쟁의 비참함과 잔혹함보다 전쟁에서 병참, 의료, 지휘관의 실패 등에 대한 이슈가 더 큰 문제로 부상했다.

특히 플로렌스 나이팅 게일(Florence Nightingale)의 의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영국군 사망자가 러시아나 프랑스에 비해 적었던 점은 전쟁 의료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청소년시절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읽은뒤 간호학을 공부하고 전쟁터로 갔다. 나이팅게일은 전쟁 발발 이듬해 38명의 잉글랜드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나이팅게일은 유능한 행정가요 협상가였다. 그녀는 관료주의에 물든 군 간부들을 설득했고, 병원에서 쓰는 물건들을 세심하게 조사했으며,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웠다.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는 사실은 나이팅게일이 뛰어난 병원 행정가임을 말해준다.

 

그 뒤 앙리 뒤낭이 전쟁 부상자 구호를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을 주장하였고, 유럽의 각국이 적극 협조하여 1863년 국제 적십자가 창설되었다. 1864년에는 국적이나 정치, 종교, 사상에 구애 받지 않는 구호 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적십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는 패전국 러시아였다. 니콜라이 1세는 전쟁 중인 1855년 2월에 사망하고, 알렉산드르 2세는 그 뒤를 이어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후 러시아에서는 패전을 계기로 근대화 운동이 일어나, 1861년의 농노해방을 비롯하여 일련의 개혁사업이 추진되었다.

 

 

간호사를 白衣의 天使로 만든 나이팅 게일

 

‘간호란 질병을 간호하는 것이 아니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그리고 감정이 일체를 이루는 간호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1820.5.12~1910.8.13)의 정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된 지금까지도 깊은 감명으로 다가 온다.

 

지금도 영국성공회의 성인이기도하며 매년 8월13일은 나이팅게일 축일로 지키고 있다.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간호사이자 作家이며 통계학자였다.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북부도시에 있는 영어 지명 도시 ‘피란체’를 여행하던 중 태어나 붙여졌다고 한다.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력한 주장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에게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지리학 등을 배웠다.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방문했을 때 낡은 시설에 원시적인 간호체계의 실상을 목격한 뒤 간호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특히 그녀는 인도주의자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을 관심과 사랑으로 대했다.

언제인가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 군 의료 체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간호사가 여성 직업으로 선망의 대상이지만 당시 간호사들은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집안의 명예가 떨어진다며 딸이 간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나이팅게일은 독일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1853년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854~1856) 크림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으로 1856년 러시아가 연합군에 패해 퇴각할 때까지 계속됐는데 이 전쟁기간 동안 나이팅게일은 성공회 수녀38명과 함께 스쿠타리

야전병원에서 초인적인 간호활동을 펼쳤다.

 

그뿐 아니라 무질서한 간호체계를 바로잡아 환자 사망률 42%에서 2%로 줄였다는 사실로도 아주 탁월한 간호사였음을 증명했다.

1860년 나이팅게일간호학교(現 킹스칼리지런던의 일부)를 세웠고 병원과 간호시설을 설립하고 간호체계를 개선하였으며 간호전문서적도 집필했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07년 영국國王 에드워드7세로부터 여성최초로 공로훈장을 받았다.

국제적십자사에서는 “나이팅게일 상”을 제정했고 매년 世界各國의 우수한 간호사를 선발, 표창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봉사와 희생, 겸손으로 살아 온 그녀는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래서 묘비에도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이라는 간단한 글귀만 적혀있다고 한다.

 

나이팅 게일: 영국의 부유한 가정의 딸로, 부모가 이탈리아 여행 중 이탈리아 피렌체 출생(1820.5.12).

영국과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1844년 이후 의료시설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유럽 ·이집트 등지를 견학, 귀국 후 정규 간호교육을 받고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에 관한 보도에 자극되어 34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이스탄불위스퀴다르로 가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 보급의 집중 관리, 오수 처리 등으로 의료 효율을 일신하여 ‘광명의 천사(The Lady with the Lamp)’ 로 불렸다.

 

귀국 후 1856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병원개혁안을 건의한 바 있고, 1860년에는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Nightingale Home)를 창설하여 각국의 모범이 되었다. 그후 의료구호제도에 관해 영국 육군을 비롯하여 국내의 각 조직 및 외국 정부로부터의 자문에 응하였다.

 

저서로 《병원에 관한 노트》 《간호노트》가 있는데,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의 기초가 되고 있다. 국제적십자에서는 ‘나이팅게일상()’을 마련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선발, 표창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의 좌우명으로 유명하다.

 

 

나이팅 게일 장: F.나이팅게일이 상병자의 간호개선을 위하여 이룩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7년 영국 런던의 제8차 적십자국제회의에서 헝가리 적십자사가 간호활동에 현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에게 국제적인 기념 메달을 수여할 수 있도록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금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각국 대표들의 지지를 받게 되어 1912년 제9차 적십자국제회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으며, 각국 적십자사의 기부에 의하여 기금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수상이 지연되어 오다가 종전과 더불어 세계정세가 안정되면서 1920년 나이팅게일 탄생일인 5월 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나이팅게일기장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이 해는 나이팅게일 탄생 100주년이 되어 의의가 있었다. 이 기장은 전시 또는 평시에 상병자나 환자를 간호하는 데 공로가 있거나, 전시근무 중 사망한 정규간호원 또는 적십자에 등록한 간호보조봉사원을 대상으로 수여한다.

 

적십자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the Red Cross:ICRC)는 각국 적십자사로부터 추천을 받은 후보자 중에서 수상자를 결정하며, 수상자 결정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입장을 유지하고 선발하며, 나이팅게일 탄생일인 5월 12일 회람을 각국 적십자사에 발송하고 기장수상 결정자의 명단과 기장 및 훈기를 송부한다.

 

이 기장은 은도금된 메달로서, 그 표면에는 나이팅게일 초상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념’이라는 문구가, 그리고 이면 주변에는 ‘박애의 공덕을 찬양하고 이를 영원히 전한다’ 라고 새겨지고, 그 중앙에는 수상자의 성명과 수여일자가 새겨진다. 1995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1,105명의 수상자가 배출되었으며, 한국은 1957년 제16차 나이팅게일 기장 수여시에 이효정 여사가 최초로 영예를 얻은 이후 1995년까지 36명의 수상자가 배출되었다.

 

출처: (글)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