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크림 반도의 역사 (1, 2)

Jimie 2022. 2. 14. 06:24

2014 년 초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Viktor Fedorovych Yanukovych )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혁명으로 실각한 이후 크림 반도의 정세는 요동치고 있습니다. 크림 지역에 러시아 군이 증강되고 크림 자치 공화국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우크라이나 과도 정부와 서방측은 이에 반발하면서 신냉전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판입니다. 이글을 쓰는 시점에서 앞으로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 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크림 반도의 역사에 대해서는 간략히 적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간단한 포스트를 준비했습니다. 작성자 고든.

 

간략히 보는 크림 반도의 역사 (1)

1. 고대의 크림 반도

크림 반도에 최초 살았던 민족이 어느 민족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이 지역이 위치상 교통의 요충지라서 여러 민족들이 접근하기 쉬웠다는 점이다. 일단 흑해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 반도는 남쪽에서 보면 바다에서 접근이 용이했다.

 

동쪽과 서쪽의 경우 육지와 완전히 붙어 있지는 않은데 적어도 동쪽은 육지와 매우 가까워 사실상 그 안에 흑해 같은 또 다른 독립된 바다를 만들었으므로 이를 아조프 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돈강의 하구가 있었다. 크림 반도의 동쪽 역시 러시아의 주요 강, 특히 드네프르 강을 통해서 러시아 내륙과 연결되는 통로였다. 북쪽은 아주 좁아지는 육지로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 면적은 26100 ㎢ 로 남한 면적의 대략 1/4 정도 이다.

 

(2014 년 크림 반도의 지정학적 지도. 2 번 이라고 적힌 붉은 색이 크림 반도 Geopolitcs of South Russia, according with the CIA facts books. Spiridon Ion Cepleanu at wikipedia )

 

(크림 반도의 주요 도시들 http://en.wikipedia.org/wiki/File:Crimeamap.png )

 

오늘날 크림 반도를 떠올리면 잘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이 크림 반도에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 주거지를 처음 건설한 것은 바로 그리스인들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게 그리스의 폴리스들 가운데는 아주 적극적으로 해양 무역에 뛰어든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이 반도는 남쪽에서 바다로 접근하기 용이하다. 이들은 지중해 각지역에 자신들의 거점과 도시를 만드는 것은 물론 흑해 주변에서 나는 여러 산물을 교역할 수 있는 거점을 크림 반도에 건설했다.

 

그리스인들은 크림 반도를 타우리나 타우리카 (Taurica 혹은 Tauric Chersonese, Tauris 로도 부름. Chersonese 는 반도라는 뜻. 그리스어 표기인 Ταυρικὴ Χερσόνησος 는 타우리 반도라는 뜻 ) 라고 불렀는데 로마 역시 비슷한 표기를 사용했다. 그리스 인들이 크림 반도에 도시를 건설한 것은 최소한 기원전 5-7 세기 이전으로 지금도 크림 반도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세바스토폴이 있는 자리에 도시를 건설한 것도 사실 그리스인이 최초였다.

 

그리스인들은 항구로써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이곳에 케르소네수스 (Chersonesus Χερσόνησος) 라는 도시를 건설했느데 아마도 고대 그리스인이 흑해 연안에 건설한 고대 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외에도 기원전 5 세기 이후로 크림 반도와 그 인접한 지역에는 하나 둘씩 그리스 식민지들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들 Map showing Ancient Greek colonies on the northern coast of the Black Sea. http://en.wikipedia.org/wiki/File:Ancient_Greek_Colonies_of_N_Black_Sea.png )

 

 

이들은 점점 반독립적인 성향이 강해지더니 마침내 자신들끼리 경쟁을 벌여 독립적인 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아조프해의 입구에 해당되는 케르치 (Kerch) 해엽은 과거에 보스포러스라고 불리웠는데 여기에 건설된 왕국들은 시메리안 보스포러스 (Kingdom of the Cimmerian Bosporus) 왕국이나 혹은 보스포러스/보스포란 왕국 (Bosporan Kingdom) 라고 불리웠다.

 

다소 기록이 확실치 않은 기원전 5 세기 경의 아르카에낙티데 왕조 (Archaeanactidae dynasty) 가 참주 스파르토쿠스 (Spartocus) 에 의해 기원전 438 년 쯤 붕괴된 후 이 지역에는 스파르토쿠스 왕조 (Spartocid dynasty) 가 약 기원전 110 년까지 존재했다. 이들은 물고기, 곡물, 노예 등의 산물을 그리스의 도시들과 교역하면서 번성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들은 스키타이인들과도 밀접한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왕국은 폰투스 왕국의 야심가 미트리다테스 6 세 (Mithridates VI) 에 합병되어 한동안 폰투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결국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폰투스 왕국의 과거 부분은 대부분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로마 제국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군단을 보내기 애매했던 구 보스포러스 왕국 지대는 기원전 63 년부터 서기 341 년까지 로마의 위성 왕국이 된다. 이 왕국의 마지막 왕 티베리우스 줄리우스 레스쿠포리스 6세 (Tiberius Julius Rhescuporis VI) 은 고트족의 왕 에르마나릭 (Ermanaric) 에 의해 살해당하고 왕국도 정복되었다.

 

 

2. 중세의 크림 반도

 

로마 제국이 붕괴 된 중세 시대의 크림 반도는 한마디로 힘있는 부족들은 한번씩 다 쓸고 지나가던 지역이 된다. 그 최초는 고트 족이었으며 이후에는 훈족 (376 년) 이 이 지역을 점유했다가 이후 4 세기에서 8 세기 사이에는 불가르 족이 이 지역을 차지했었다. 8 세기에는 다시 카자르 족 (Khazars) 10 세기에는 키에프 러시아 (루시), 그리고 9-13 세기에는 비잔틴 제국과 쿠만족 (킵차크 족 Kipchaks/ Kuman) 차례로 크림 반도의 일부나 혹은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중에서 비잔틴 제국은 이곳에 군관구제라고 번역되는 테마 (Thema/Theme) 를 건설했다. 이 지역에 건설된 테마는 케르손 (Cherson) 이라고 불렸는데 크림 반도의 전체를 다 장악한 건 아니라도 교역의 거점인 케르소네수스 등의 주요 도시는 장악하고 있었다. 케르손 테마는 대략 830 년대에 건설되어 흑해의 주요 무역 창구 역할을 했다. 비록 980 년대에 크게 케르손이 크게 파괴되긴 하지만 사실 이 테마는 놀랍게도 1204 년 4 차 십자군에 의해 비잔틴 제국이 와해되었을 때까지 존재하다 그 파편인 트레비존드 제국에 일부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테마. 다만 제국의 영토는 수시로 약탈을 당했다가 수복하는 식으로 변경이 심했기 때문에 이 지도는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음. The Byzantine Empire and its provinces (themes) at the death of Basil II in 1025 AD http://en.wikipedia.org/wiki/File:Byzantine_Empire_Themes_1025-en.svg )

 

 

사실 고대의 크림반도는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9 세기 이후에는 비잔티움 제국이 여기에 테마를 건설했다. 그러나 10 세기 중반에는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기원이 되는 키에프 루시 (Kiev Rus : 영어식으로는 키에프 러시아라고 부름) 의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키에프의 스비아토슬라프 1 세 (Sviatoslav I Igorevich) 는 크림 반도의 동쪽을 점령하기에 이르고 그 이후 러시아의 시조로 여겨지는 블리디미르 대공 (Vladimir Sviatoslavich the Great) 은 비잔티움 제국이 차지했던 케르소네수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지금의 세바스토풀) 을 점령한 후 이곳에서 988 년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이는 러시아 역사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사건으로 지금 이곳에는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이 건설되어 있다.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 (사진에서 오른쪽) 과 그 주변에 발굴 중에 잇는 케르소네수스 유적 Dmitry A. Mottl at wikipedia )

 

 

13 세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이 해체 상태에 이르자 과거 비잔티움 제국의 거점지역에는 베네치아와 제네바의 상인들이 대신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지중해에 자신들의 거대 무역 네트워크를 건설했는데 심지어 크림 반도에도 그 거점이 건설되게 된다. 물론 비잔티움 제국이 몰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크림 반도의 양옆에 있는 드네프르 강과 돈강은 편리한 수로를 제공했으므로 무역선이 오고 가기에 편리했는데 이탈리아 상인들은 일단 그 입구인 크림 반도까지만 진출했다.

 

중세시대에 이 지역은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여러 특산물이 거래되던 지역이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노예의 주요 공급지이기도 했다. 여기서 팔려나간 노예들은 저 멀리 이집트에 용병으로 팔리기도 했는데 이들은 이집트에서 맘루크라는 노예 용병으로 성장해 아예 이집트 자체를 지배했다.

 

고대와 중세의 크림 반도는 현재의 크림 반도와는 별로 연관이 크지 않아 보이지만 근세 크림 반도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부족이 15 세기 크림 반도에 진출하게 된다. 그들은 크림 타타르 족으로 크림 한국 (Crimean Khanate) 라고 흔히 불리고 있다. 현재 크림 반도에 있는 인종 가운데 러시아, 우크라이나계 다음으로 많은 인종이기도 하다.

[출처] 간략히 보는 크림 반도의 역사 (1) |작성자 고든

 

 

 

간략히 보는 크림 반도의 역사 (2)

3. 크림 한국의 등장

크림 한국 (Crimean Khanate) 의 시조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토카 티무르 (Toqa Temur) 이다. 그는 주치 (Jochi - 징기스칸의 맏아들로 킵차크 한국의 시조로 불린다) 의 13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가 이끈 황금 군단 (Golden Horde 혹은 킵차크 한국 Kipchak Khanate) 의 부족이 대략 13 세기에는 크림 반도에 정착했던 것 같다. 이들은 지금의 스타리 크림 (Staryi Krym) 을 수도로 삼았는데 당시 명칭은 키림 (Qirim) 이었다. 이들은 한동안 비잔티움 제국 이후 이 지역에 무역 거점을 세운 제노바 상인 같은 이질적인 세력들과 공존했다.

 

킵차크 한국의 세력이 몰락하던 15 세기 이 지역을 장악한 하시 기라이 (Hacı Giray) 1441 년 마침내 크림 반도 및 그 주변 지역의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크림 한국의 설립은 1441 년을 보통 시작으로 본다. 다만 크림 한국이라고 해서 크림 반도만 장악한 국가가 아니라 그 주변 영토까지 같이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서 눈엣 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1600 년 경 크림 한국과 주변 국가들 Oleksa Haiworonski at wikipedia)

 

크림 한국의 수도는 현재 세바스토폴 바로 옆이라고 할 수 있는 바크치사라이 (Bakhchysarai) 였다. 여기서 다시 지도를 보면 이들 도시들이 모두 크림 반도 아래쪽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교역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크림 반도는 항구이거나 항구에 접해 있는 남쪽의 도시들이 특히 중요했다.

 

 

(크림 반도의 주요 도시들. 현재 수도인 심페로폴 (현재 크림 자치공 수도), 러시아의 주요 군항인 세바스토폴, 러시아와의 다리가 건설되는 케르치,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크림 한국의 수도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음 http://en.wikipedia.org/wiki/File:Karte_der_Krim.png )

 

 

크림 한국은 사실 설립 초창기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다. 본래 왕조 국가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 유목민 왕국들은 형제간, 부자간의 권력 다툼이 더 심했기 때문이다. 이 혼란을 극복하고 크림 한국의 실질적인 기반을 다진 칸은 하시 기라이의 6 번째 아들인 멩글리 1세 기라이 (Mengli I Giray) 였다.

 

그는 1466 년 왕좌에 올랐다가 다른 형제와 귀족들의 반란으로 그해 쫓겨난 후 다시 1469 년에 왕좌에 복귀한 인물이다. 그러나 1475 년 다시 권좌에서 쫓겨나 이스탄불까지 흘러간 후 여기서 다시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어 1478 년에 권좌에 복위 1515 년까지 크림 한국을 다스린다. (그래서 재위 기간이 1466, 1469–1475, 1478–1515 년)

 

1475 년은 오스만 제국이 크림 반도에 발을 디딘 해이기도 하다. 오스만 제국은 제노바의 식민 도시들과 비잔티움 제국의 잔존 세력을 모두 정복했는데 이는 크림 반도 남쪽을 정복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1478 년 오스만 술탄의 종주권을 받드는 멩글리 기라이가 크림 한국의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일단 칸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진 후 멩글리 기라이는 주변의 라이벌들을 잠재워 자신이 킵차크 한국의 실질적인 후계자라고 자청하기에 이른다. 이후 크림 한국은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을 맹주로 받들면서 오스만 제국에 기병대와 군사력을 제공했다. 이들은 흔히 크림 타타르라고 불렸다.

 

 

(크림 타타르 기병 궁수 Public domain image )

 

이들 크림 타타르들은 흑해 무역에도 뛰어들었는데 하필이면 그 상품이 주변 다른 국가에서 기겁을 할 만한 품목이었다. 왜냐하면 주변 국가들에서 민간인을 납치해 노예로 수출하는 것이 유목민족인 이들이 주로 하는 '무역' 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로 약탈의 대상으로 삼은 지역은 바로 맨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왈라키아 같은 지금의 발칸 반도 지역 (물론 오스만 제국의 지배령이 아닌 지역) 이나 폴란드 - 리투아니아,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 이었다.

 

크림 타타르들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러시아는 극도로 사이가 나빠서 서로 협력해 크림 한국을 응징하는 일 따위는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노예 비지니스를 수세기간 계속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500 년에서 1506 년 사이에 러시아 - 리투아니아 전쟁에서는 크림 한국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리투아니아를 약탈했고 1507 년 부터는 다시 러시아를 약탈했다. 물론 크림 한국이 망하면 다소 곤란해질 오스만 제국의 지원 역시 이들이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3 세기 이상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크림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게 되면 아무래도 포스트 제목과 내용이 크게 달라지게 될 것 같지만 이 노예 무역에 대해서는 내친김에 조금더 기술해 보겠다. 이전 이반 뇌제 포스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1571 년 크림 한국의 칸 데블렛 기라이는 모스크바 까지 침공해 들어와 막대한 수의 사람을 노예로 (대략 10 - 15 만명 정도) 잡아갔다. ( http://jjy0501.blogspot.kr/2013/05/16.html 참조)

 

이는 한번에 잡아간 노예의 숫자로 따지면 당시 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진 노예 사냥을 훨신 뛰어넘는 규모였다. 이렇게 노예로 붙잡힌 사람의 운명은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매우 비참했다. 그들의 참상은 아프리카에서 잡히는 노예들과 비교해서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일단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내륙 깊숙이에서 노예를 잡은 만큼 이들을 크림 반도까지 이동하는 일부터가 참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우선 크림 타타르들은 그들의 전리품에서 60 세 이상 노인 처럼 상품 가치가 없는 포로들은 그 자리에서 학살했다. 이후 남은 사람들은 도망가지 못하게 묶여서 최대 수천 km 의 광활한 러시아 영토를 통과했다. 타타르족들은 러시아 포로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방안을 고려했는데 예를 들어 목주위에 밧줄을 감고 다시 이 밧줄을 나무 막대에 연결한 긴 행렬을 만들어 쉽게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이 밧줄은 타타르 기병의 말에 묶여 있었다. 그렇게 수백에서 수천 km 를 쉬지 않고 걷는 것이었다.

 

당연히 가는 도중 죽는 자가 속출했겠지만 포로들이 모두 도망가는 것 보다는 그 편이 타타르 족들에게 이익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동정도 없었다. 특히 러시아 군이 타타르 기병대를 추적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한순간도 쉴틈이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약탈은 심지어 1700 년대까지도 계속되었으므로 타타르 족과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사이의 갈등과 반감은 매우 클 수 밖에 없었다.

 

타타르 족은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지금의 우크라이나) 의 변란이나 전쟁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끼어들어 막대한 인명을 노예로 잡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잡아온 노예를 판매하면 약 10 - 20 % 의 판매세가 칸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노예를 통해서 막대한 국가 수입원이 생겼으므로 노예 비지니스는 크림 한국을 지탱하는 주력 산업이었다.

 

 

(자포로지 코자크족과 싸우는 타타르 족. 창을 든 쪽이 코자크족이고 활을 든 쪽이 타타르 Brandt, Jozef Cossacks fighting Tatars from the Crimean Khanate. Public domain image )

 

 

메사추세츠 대학의 역사학자인 브라이언 윌리엄스 (Brian Glyn Williams, professor of Islamic History at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Dartmouth) 는 크림 타타르의 약탈로 16 세기 폴란드가 많게는 연간 2 만명의 인명을 잃었으며 1474 년에서 1694 년 사이 폴란드 (+ 지금의 우크라이나인 리투아니아) 인 약 100 만명이 크림 반도에서 노예로 팔려나간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심지어 거의 망해가던 1769 년 조차도 무려 크림 타타르는 무려 2 만명의 노예를 잡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림 한국은 결국 러시아에 병합될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힘이 점점 강해질 뿐 아니라 부동항을 찾아서 남진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오스만 제국의 안보에는 매우 큰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크림 반도 주변의 흑해 연안에서 수백년에 걸처 러시아와 그 반대 세력간의 지루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출처] 간략히 보는 크림 반도의 역사 (2) |작성자 고든

'History & Human Geogra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림 반도의 역사 (4)  (0) 2022.02.14
크림 반도의 역사 (3)  (0) 2022.02.14
크림반도의 역사 개관  (0) 2022.02.14
크림반도  (0) 2022.02.14
러시아 vs 미국, 누가 더 음흉한가?  (0) 202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