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betan Arts

티베트-중국, 최왼(檀越)관계

Jimie 2020. 9. 13. 05:40

티베트-중국의 최왼(檀越)관계,

Cited from :

cafe.daum.net/readandchange/asDC/261 발효 인문학

 

최왼(檀越)관계, 활불전세

■ 檀越 단월(최왼) : 시주(施主). 중에게 또는 절에 물건(物件)을 베풀어주는 사람檀 박달나무 단, 越 넘을 월, 부들자리 활최악으로 달리는 티베트-중국 관계 어떻게 풀까?-전통적 ‘최왼(檀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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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왼(檀越)관계, 활불전세(活佛轉世)

 

■ 檀越 단월(최왼) : 시주(施主). 중에게 또는 절에 물건(物件)을 베풀어주는 사람
    * 檀 박달나무 단, 越 넘을 월, 부들자리 활


최악으로 달리는 티베트-중국 관계 어떻게 풀까?

-전통적 ‘최왼(檀越) 관계’ 복원이 답이다.

 

"樹欲靜而風不止."

사상 최대의 축제인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 사태에 발목이 잡힌 지금 중국의 속내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문구도 없을 듯싶다.

얼마 전 '역사로 본 중국-티베트 관계'라는 주제의 강연을 맡아 찬찬히 중국과 티베트 사이의 역사적 친소관계를 살펴봤다.

그 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던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독특한 관계가 한눈에 쏙 들어왔다.
양자의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상부상조'의 '최왼(檀越)관계'가 대종을 이뤘다. 최왼은 '시주'를 뜻하는 인도 산스크리트어 Danapati의 티베트 음역이다. 티베트에서는 특히 시주와 시주를 받는 스님인 수시자(受施者) 모두를 가리킨다.

 

 돛을 단 배처럼 보이는 포탈라 궁

 

티베트 라싸 포탈라궁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공시(供施)관계 격인 '최왼관계'는 몽골제국 시기에 처음 이뤄졌다.
세계 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고 2대 황제 오고데이(窩闊台)가 대칸에 즉위한 이후 청해(靑海) 및 서하(西夏) 영토를 셋째 아들 고덴(闊端)에게 분봉했다.

고덴은 1244년 티베트 불교 교파 중 사카파(薩迦派)의 고승 사카판디타를 지금의 쓰촨(四川)성 부근인 자신의 근거지로 초청하여 티베트와 몽고의 장래 관계를 상의했다. 논의 결과 티베트의 지도자 사카판디타는 티베트 불교 각 교파 수령들에게 편지를 보내 몽고에 귀부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여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몽고는 반대 급부로 티베트에서 사카파가 통일적 영도 지위에 있고 사카파가 모든 티베트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음을 승인했다.

이때 몽고의 지도자 고덴은 당시의 협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만약 내가 세간의 법으로 지키고, 당신은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지킨다면, 석가모니의 교법이 해내(海內)에 두루 펴지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라고 속세의 일은 몽골이 내세의 일은 티베트가 책임지는 상부상조의 관계가 성립했음을 알렸다.

이런 사카판디타와 고덴 사이의 우호 관계는 그들 사후, 쿠빌라이와 팍빠로 계승됐다. 1271년 쿠빌라이가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한 다음 티베트 지도자 팍빠를 제왕의 스승인 ‘제사(帝師)’이자 ‘대보법왕(大寶法王)’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티베트와 중국 왕조 사이의 ‘최왼(檀越) 관계’가 정식으로 성립한 것이다.

반면 원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한족(漢族)의 명(明)나라는 티베트와 ‘다봉중건(多封衆(众)建) ,상용승도( 尚用僧徒) ,공시기미(貢市羈縻)’로 이뤄진 조공관계를 유지한다. 티베트도 당시 여러 교파로 나뉘어 있었고 명나라도 적극적 지배를 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양자간에는 평화가 지속됐다.

명나라에 뒤이어 만주족의 청(淸)이 등장하면서 티베트 문제가 다시 화두에 올랐다. 이때 만주족 황실이 채택한 것은 원대의 ‘최왼관계’였다.

청조가 들어서기 전에 입적한 달라이 라마 3세는 살아 생전에 “80년 안에 알탄칸의 후계자가 몽고와 중국의 최고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티베트인들은 만주인을 몽고인과 밀접하다 생각하여 그들에게 친근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달라이 라마 4세는 몽고인이었다. 만주 황제는 달라이 라마 5세를 중국 북경에 초청함으로써 그가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몽고인이 중국 영토를 침입하지 않게 해주도록 설득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때 만주인 관료들은 황제가 달라이 라마가 사는 곳에 직접 가서 맞이 할 것을 건의했다. 반면 한인(漢人) 관료들은 달라이 라마에게 선물만 줄 뿐 본토로 부르지는 말 것을 건의했다. 결국 1652년 순치(順治)제는 달라이 라마 5세를 멀리까지 마중 나가 영접하여 함께 베이징으로 와 회동했다. 이 만남에서 순치제는 달라이 라마에게 ‘대해(大海)와 같이 위대한 분, 번개를 잡은 자’라는 의미의 존칭이 만주어·티베트어·중국어로 새겨진 금판을 주었다. 달라이 라마는 보답으로 황제에게 금판과 ‘위대한 스승, 뛰어난 분, 하늘의 신, 보살’이라는 뜻의 존칭을 선사했다.

후에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지배의 근거로 내세우는 강희제의 라싸 파병이 있게 된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복잡하다. 당시 티베트 북부에 몽골족 가운데 준가르 부가 발흥하여 티베트 라싸를 급습(강희 56년·1717)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만청은 강희 57(1718), 59(1720)년 두 차례에 걸쳐 군대를 티베트에 보내 준가르 부를 제압한다. ‘최왼 관계’에 따른 중국측 왕조의 당연한 의무로 볼 수 있다. 증거로 준가르 평정 기념 비석의 비문에는 준가르의 티베트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청군을 파견한 것은 시주가 고승을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조처라 적혀있다. 후에 티베트 내부의 권력투쟁을 기회로 옹정제가 청군을 티베트에 보내(1727년)고 주장대신(駐藏大臣)과 소수 군대를 통해 티베트 내정에 본격 간섭하기 시작한다. 건륭 58년(1793) ‘장내선후장정(藏內善後章程)29조’를 반포하여 달라이 라마가 입적 후 환생한 아이로 여겨지는 전세영동(轉世靈童)을 확인할 때 ‘금병체첨(金甁?簽:라마의 환생인 전생영동 후보 3~4인의 이름을 금으로 된 병에 넣으면 만청의 황제가 이를 뽑아 선정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만청의 티베트 간섭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나 가장 유력한 전생영동을 선택하여 실질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방법을 사용할 것, 고급 관리를 임명할 때 달라이 라마와 주장대신이 함께 의논하여 선임할 것, 3천 규모의 티베트 상비군을 양성할 것, 대외 업무는 주장대신의 비준을 받을 것 등을 규정했다. 중국의 간섭이 있었지만 그 근저에는 상부상조의 ‘최왼관계’가 깔려 있었다.

 

뉴스위크 한국어판 최신호에 실린 미국의 티베트 전문가인 컬럼비아대 투르만 교수가 제시한 해결책도 역사상의 ‘최왼관계’ 복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티베트와 중국 모두 강대강의 충돌 위주의 대책보다 접점을 찾아 대타협을 이루자는 것이 요지다. 서로 주고 받을 것도 푸짐한 '쐉잉(雙?·윈윈)게임'이다. 중국은 티베트에 정치적 자율권을 주고 인위적인 한족 정착촌을 철수한다. 티베트는 국제참관단의 입회 아래 짱(藏)족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중국의 티베트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다. 그러면 더 이상 티베트 문제는 국제적 분쟁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모든 갈등도 해결된다. 무엇보다 전통적 ‘최왼관계’ 복원으로 중국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안분자족, 믿음, 자비, 영적인 목적의식, 윤리적 가치관이라는 고차원의 선물들이다. 이들 티베트 스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는다면 중국은 '조화로운 사회' 건설에 한 걸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달리말해 영적 가르침을 설파하는 스승과 후원자 패트로니지(patronage) 사이의 기브 앤 테이크가 다시 성립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 더 이상 강경책으로는 얻을 것이 없다.

포탈라 궁 옥상



범어가 곧 파스파 문자이고 한글은 티벳어에서 왔다

몽골의 파스파 문자가 바로 티벳 불교 문자이며, 한글은 바로 신미대사에 의해 티벳의 문자인 왔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파스파 국사로부터 티벳불교의 가르침을 받고 최왼관계를 맺습니다.

최왼이란 황제 칸은 불교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재정적 도움을 주고, 티벳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는 황제와 황실의 정신적 권위를 세워주고 인정하므로써 치세에 도움을 주는 공생관계를 뜻합니다.

원과 청의 황제들과 달라이라마들 간에 지속적으로 이뤄졌음이 역사적으로 고증됩니다.
샤먼을 믿던 몽골민들에게도 티벳불교가 스며들어 혼합된 독특한 라마불교로서 티벳불교는 유목민들 사이에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 전통은 중원을 차지한 여진족 청나라의 황제들에게도 이어집니다.
자금성에서 만난 순치제나 건륭제나, 양심전에서 만난 옹정제나 치세의 정신적 맥락을 티벳불교에 두었습니다.

티벳불교는 서하라고도 불리는 티벳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졌고 독특한 사상체계를 가집니다.
바라봄 관의 시작을 삶이 아닌 죽음에 둡니다. 죽는 순간 만나는 광명의 빛을 사람은 누구나 만나게 되는데, 수행해서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고 윤회의 굴레 속에 빠져든다 합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 깨닫기 위하여 삶을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으로 받아들이고 수행처로 삼는다 합니다.

그 방법으로 멘탈이미징을 극대화하여 보신불을 화현해 내고 다시 만다라 속에 입히기까지 끝없이 멘탈 이미징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성적에너지를 사용하는 탄트라요가가 일반 민중 사이에서 부작용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를 무상요가로 잘 승화시키고 교화시킨 사람이 바로 쫑카파입니다.

쫑카파 대사는 죽는 순간 깨달음을 득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는데 죽는 순간 얼굴이 16세 소년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쫑카파는 보리도차제론, 비밀도차제론이란 론을 써서 깨달음(보리)을 얻기 위한 방법을 밀교(비밀불교)적 방법으로 제시하여 티벳불교내 혼돈을 평정합니다.

우리나라의 원효나 의상대사에 해당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이런 배경지식도 탐사대장 박문호 박사님으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입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원(元)대 이래로 티베트는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원대에 중국과 티베트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티베트에는 몽골 세력의 지원을 받아 티베트 불교의 유력한 종파인 싸카파 종파에 의한 정교합일 정권이 형성됐고 몽골족은 중원을 통일해 원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원나라와 티베트 사이에 기존의 책봉조공 관계 외에 ‘최왼’ 관계가 나타난다.

티베트 고승과 원나라 황제 사이에 정신적·종교적 지지와 세속적·군사적 원조를 교환하는 ‘최왼(법주-시주, 즉 종교적 지도자-세속적 군주)’ 관계가 맺어진 것.

최왼 관계는 당시 싸카파 종파의 고위 승려인 싸카파디따(薩迦班智達)와 칭기즈 칸의 손자인 고댄 사이에 처음 맺어졌다.
최왼 관계를 통해 몽골은 전쟁 없이 티베트를 몽골 제국에 편입시키고 싸카파 종파는 티베트에서 정교합일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싸꺄빤디따를 이어 싸카파 종파를 관장하던 팍빠(八思巴)와 몽골의 쿠빌라이 칸 사이에도 맺어졌다.

상부상조 ‘최왼’ 관계

이러한 최왼 관계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한 것이었다.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고승들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족들이 원나라에 순순히 귀순하도록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했고, 원나라는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정교합일정권을 현실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당시 원나라 경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즉 단순히 원나라의 통치 대상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원나라는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원나라 붕괴 후 명(明)나라가 들어섰지만,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은 원나라에 비해 훨씬 못미쳤다.

명 초기인 1409년 티베트 내부에서 총카파(1357∼1419)가 창립한 겔룩파 종파(黃敎)가 교단의 정화와 계율을 강조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겔룩파 종파는 총카파가 사망한 후 활불전세(活佛轉世)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고승이 사망하면 교단에서 어린 전생자(前生者)를 찾아 계보를 잇는 독특한 승직 계승 방식이다. 이는 후에 달라이 라마 제도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는 3대 달라이 라마 쐬남갸초(1543∼88)에서 시작됐다. 정교일치 사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통치력은 중부 티베트에만 미쳤을 뿐 티베트 전역을 포괄하진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는 티베트를 넘어 몽골과 만주 일원에까지 미쳤다.

겔룩파 종파는 만주에서 청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도 몽골 세력과 최왼 관계를 맺으면서 몽골 부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교합일정권을 지켜왔다. 명대에 이르러 몽골은 동몽골과 서몽골 연맹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1510년 이후 동몽골 부족들이 부족간 갈등을 겪으면서 칭하이(靑海) 쪽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인과 티베트인의 접촉 과정은 몽골군의 일방적인 티베트 점령이 아니라 원대 이래의 최왼 관계를 회복하는 형식을 취했다. 동몽골의 지도자 알탄 칸(1543∼82)은 1578년 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 최왼 관계를 맺었다.

이 만남은 몽골인들 사이에 티베트 불교 신앙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1637년 서몽골 준가르 부족의 일원인 구시칸(?~1656)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에 들어와 5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6년 후 구시칸은 티베트의 내분을 틈타 티베트 전역을 통일하고 티베트 통치권을 5대 달라이 라마에게 보시했다. 이렇게 하여 티베트인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5대 달라이 라마 시대가 열렸다.

1653년 5대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을 방문해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이 만남은 티베트에게는 최왼 관계의 수립을 의미했으나 청조의 입장은 몽골인에 대한 통제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측면이 강했다.

거대한 배처럼 보이는 포탈라 궁. 

범어로 '포타'는 '배'를 뜻하며, '라'는 '항구'를 뜻한다.

 

■ 짱주(藏族)전통불교의 4대 교파와 활불전세(活佛轉世)

 

6자 진경, “옴-마-니-반-메-훔

짱주 전통 불교, 즉 티베트 불교1)의 유력 교파는 현재 닝마(寧瑪)파, 싸지아(薩迦)파, 그어루(格魯)파, 까쥐(噶擧)파의 4대 교파다. 먼저, 닝마(寧瑪)파는 8세기에 리앤화(蓮花)에서 발생했는데, 대략 11세기말에 시짱에서 띠칭 짱주 지역으로 전해졌다. 이 파는 사원이 적고 분산되어 있는데, 그것은 포교 초창기에 당시 유행하던 신법(新法)을 따르지 않고 다른 교파와 대립하느라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승려들이 홍색 가사를 입고 홍색 모자를 쓰고 있기에 홍교(紅敎)라 불린다.

싸지아(薩迦)파는 현재 윈난의 융닝(永寧)향 모어쑤오어 사람들과 푸미(普米)족 사이에서만 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 파의 사원 담장에 문수보살, 관음보살, 금강보살을 상징하는 홍, 백, 흑의 3색 꽃무늬가 그려져 있어 속칭 화교(花敎), 혹은 흑교(黑敎)라 부른다.

그어루(格魯)파는 15세기초 쫑카바(宗喀巴)가 창립한 교파로2), 그의 후세 제자들이 달라이3)와 판첸 양대 활불(活佛)로 계통을 세워 세상에 전교한 이래, 대략 명나라 때 윈난의 중디앤(中甸)과 드어친(德欽)의 짱주 지역에 퍼졌고, 청나라 초기에 융띵 모어쑤오어인과, 푸미족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이 파의 승려들이 황색 복숭아 모양의 모자를 쓰기에 사람들이 황교(黃敎)라 일컫는다.

까쥐(噶擧)파는 속칭 백교(白敎)인데, 이 파의 창시자 마얼바(瑪爾巴) 등이 설법을 할 때 흰 색 승복을 입었다. 이는 인도에서 공부한 데 연유한 습관이었는데, 이후 그어쥐파의 가르침을 익히는 자는 모두 백색 승복을 입어야 했다. 이 파는 11세기말에 시짱과 쓰추완의 짱주 지역을 통해 띠칭에 전파되었고, 특히 리지앙 나시주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어루(格魯)파는 1409년에 라싸에 간단사를 건립하여,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며, 1415년 이후 중앙의 왕조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면서, 교세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정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면서4) 다른 교파를 압도하게 된다. 이후 그어루(格魯)파는 1546년에 활불 사상5)을 도입하여,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전세제(轉世制)를 통해 신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활불전세(活佛轉世)는 짱주전통불교의 계승방식이자 그 특징이 되었다. 가장 먼저 활불전세 제도를 시작한 쪽은 흑모(黑帽)계의 지도자 까마바시(噶瑪拔希)였다. 1252년에 까마바시가 빠스바(八思巴)와 함께 원(元) 세조 쿠빌라이를 예방했을 때, 그 자리에서 까마바시는 몽골의 대칸 몽케에게 국사(國師) 책봉을 받았다. 아울러 몽케는 까마바시에게 흑모(黑帽)와 금인(金印)을 하사했다. 자기 교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까마바시는 임종 전에 자신이 세상을 달리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이 어린 아이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나 그 지위를 계승할 것이니 그 아이를 찾도록 명했다. 이렇게 해서 흑모계의 활불전세 제도가 성립되고 계승되었다.

이 후, 활불전세 제도는 부단히 확대되어 건륭 말기가 되면 활불로 등록된 고승이 160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그어루파의 달라이와 판첸이라는 양대 전세 계통이 가장 방대하고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달라이와 판첸은 비록 서로 다른 전승계통이지만, 둘다 쫑카바 대사의 제자에 속한다. 1653년, 청 순치제는 제5대 달라이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로 책봉했으며, 1713년에는 강희제가 제5대 판첸을 “판첸 으얼드어니(額爾德尼)”로 책봉했다. 이러한 책봉 명칭은 모두 정치적 의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1751년부터 정교합일을 실행하였고, 판첸 으얼드어니는 판첸을 그어루파의 중요지위로 확립시켰다. 또한 달라이와 판첸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하였으며 둘은 모두 각자 사도관계를 갖는다. 양자 간의 차이점을 꼽는다면, 달라이 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라사 지방을 관장한 법왕이었다면, 판첸은 시가체 지방을 다스렸다. 또 달라이는 “지혜의 바다”라는 의미이고, 판첸은 “대학자”라는 뜻이므로 양자간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단, 현재 달라이 라마는 제14대로 이어지고, 판첸 라마는 제11대에 이르고 있다. 이는 제5대 달라이 라마가 자신의 스승이 판첸으로 환생되었다고 인정하면서, 그때부터 판첸 계열의 활불전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활불전세의 이론은 사실 불교 교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순환 반복된다고 여긴다. 고승이 입적하면 누군가의 태반을 빌려 새로 태어날 수 있으니, 부처가 세상을 바꿔 태어나도 역시 부처라는 얘기다. 그래서 활불이 입적하고 나면 그의 임종 전 계시에 따라, 혹은 징조나 유언에 따라, 세상을 바꿔 영혼이 들어간 아이를 찾아내 그 지위를 계승시킨다. 그러나 어떤 때는 “징조”와 “계시”에 부합하는 아이가 많을 수도 있어, 이럴 때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뽑는 아이를 선택하는 방식이 동원된다.

1) 흔히 라마교(Lamaism)라고 한다. 티베트불교의 역사는 7세기 때, 손첸캄포((松贊干布)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네팔 출신의 제1왕비 칩주엔프(Chif-Zuenf)와 제2왕비가 된 당나라 출신의 문성(文成)공주가 처음 들여온 인도계와 중국계 불교를 수용해 주술(呪術)을 중시하는 티베트 고유의 신앙인 뵌(Boen)교와 혼합한 형태의 불교를 주창해, 티베트 불교를 창시했다. 이는 왕권의 강화 의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인도의 샨티락시타 (Santi-raksita)와 파드마 삼바바를 통해 밀교(密敎)가 전파되면서 티베트불교의 근본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842년, 란마르다 왕이 밀교성향의 티베트불교를 폐교시키고 민족의 종교인 본교를 부흥시키는 시도도 하지만, 티베트불교는 1042년 인도에서 초빙된 아티샤(Atisa)에 의해 다시 밀교의 성격이 강화된다. 그 후 원(元)나라에 전파돼 국교가 됐고, 이후 명(明)과 청(淸)나라에서도 융성했는데, 그 영향으로 티베트불교는 몽고와 중국 및 만주를 거쳐 러시아와 북인도로 전파되었고, 우리나라 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2) 14세기 말 까지 티베트불교는 권력과 결탁해 극도로 퇴폐해져 타락한 밀교행위와 주술에만 치중하게 되는데, 쫑카바(Tsong-ka-pa, 宗喀巴)가 엄격한 계율을 도입하고 대승교학을 기초로 하는 일대 개혁을 벌였다. 이때 쫑카바는 노란모자(黃帽)파를 만들어 이전의 붉은 모자(赤帽)파와 구분했는데, 쫑카바의 제자 가운데 겐둔그룹(Ge'dun-grub; 1391-1495)이 초대 딜라이 라마 (Dalai Lama)가 돼 현재 14대에 이르고 있다.

3) 짱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관음(觀音) 정토(淨土)라고 생각하는데, 그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를 관음의 화신(化身)으로 믿고 있다.

4) 티베트불교는 탄탄한 라마승 조직과 독립된 사원 경제에 힘입어 권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앙과 남부 티베트에 있는 땅의 43%가 사원의 소유였다. 중앙정부는 35%만을 소유했고 이를 소작농들에게 빌려주었다. 한편 귀족은 22%의 토지를 소유했다. 이와 같은 토지 분점이 티베트의 봉건체제를 유지시켰다.

5) 활불사상은 달라이 라마가 비밀 탄트라의 관법에 따라 자기의 영혼을 육체에서 쉽게 떠나 다른 육체로 자유로이 옮겨갈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생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전세(轉世)가 활불사상을 낳은 사상적 배경이다. 짱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덕이 높은 라마가 죽은 뒤 그 영혼이 유아(幼兒)의 육체에 전생(轉生)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그 육체를 제공하느냐가 중요해지는데, 활불 라마로 지정된 유아 및 그 친족이 받는 과보는 매우 크다. 전생 (轉生)능력은 많은 수행을 쌓은 라마, 즉 성직자에게만 인정되는 것으로, 속세에 사는 사람이 쉽사리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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