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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종전선언, 정치선언일 뿐"이라는데…北 "유엔사 해체하라"

Jimie 2021. 11. 4. 18:56

文 "종전선언, 정치선언일 뿐"이라는데…北 "유엔사 해체하라"

  • 중앙일보
  • 정진우
  • 입력2021.11.04 17:50최종수정2021.11.04 18:15

‘종전선언→유엔군 사령부 해체→주한미군 철수→한·미 동맹 약화’.

한반도 종전선언을 놓고 국내 및 미 워싱턴 조야에서 신중론이 제기되는 것은 이같은 '부정적 나비효과'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선언’이라 유엔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강조하지만, 북한은 오히려 이런 우려에 기름을 붓는 입장을 밝혔다.



"유엔사는 불법. 미국 주도의 연합사일 뿐"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제4위원회 회의에서 유엔군 사령부를 '불법'으로 규정하며 즉시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 제공]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제4위원회에서 “유엔사는 미국에 의해 불법적으로 만들어졌으며, 행정과 예산 모든 면에서 유엔과는 무관하다”며 “즉각적인 유엔사 해체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사는 또 유엔사를 “유엔과는 무관하게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사령부”로 규정하고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치·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엔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유엔사 해체를 주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당시 김인철 유엔주재 북한대사관 서기관은 유엔총회 제6위원회 회의에서 “유엔사는 유엔의 이름을 남용한 것일 뿐 유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령기관”이라며 “유엔사가 한국에 남아 있을 어떤 법적 근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김 서기관은 또 2018년에도 “유엔사는 괴물 같은 형태로 한국에 남아 있다”며 유엔사 해체를 주장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 드라이브를 걸며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가운데 이런 발언이 나온 건 의미심장하다. 북한 역시 한국과 미국에서 제기되는 종전선언의 파급효과에 대한 우려를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유엔사 해체" 요구에 깊어지는 美 고심

김성 대사는 197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는 점을 근거로 유엔사의 법적 지위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당시 유엔총회에선 남북 대화 및 한반도 평화 보장을 요구하는 한국 측 결의안 역시 채택되며 상반된 두 개의 결의가 동시에 채택됐다. 사진은 지난 7월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 유엔군 참전용사 훈장 수여식'에 참석한 폴 라케머라 유엔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 [연합뉴스]

 

우려의 핵심은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종전선언이 자칫 북한의 유엔사 해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6·25 전쟁의 당사자인 남·북·미·중이 전쟁 종료를 선언할 경우 북한이 ‘전쟁이 끝났으니 정전협정 체제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유엔사는 해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칠 때 방어할 명분이 훼손될 소지가 있다.

이런 와중에 김 대사는 대놓고 유엔사 해체를 주장한 것이다. 종전선언의 ‘몸값’을 높이고 한국을 향해 자신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국과의 종전선언 협의를 유도하라는 압박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김 대사의 이런 발언으로 가뜩이나 종전선언의 법적 구속력과 파급 효과를 놓고 고심중인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입장에선 종전선언 이후 벌어질 상황에 대한 우려가 커질 가능성이 크다. 또 결국 북한이 한국 정부의 종전선언 제안에 관심을 보인 배경에 유엔사 해체 요구가 자리하고 있다는 의구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종전선언의 불씨를 살리려는 한국의 처지만 더 난감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김성 대사의 발언은 결국 종전선언을 전쟁 종료 이후의 질서, 즉 유엔사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로 연결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명확히 드러낸 것”이라며 “종전선언의 당사자인 북한이 유엔사 해체를 노골적으로 요구한 만큼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이라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 힘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절반의 진실' 근거한 "유엔사 불법" 주장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의 법적 구속력을 부정하며 '정치적 선언'일 뿐이란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종전선언을 유엔사 해체의 징검다리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뉴스1]

 

사실 북한의 유엔사 해체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북한의 주장과 달리 유엔사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창설됐으며, 명확한 법적 근거를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엔사 해체 역시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채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김 대사가 이번 회의에서 유엔사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근거는 앞서 1975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다. 유엔사 해체 및 주한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역시 '절반의 진실'이다. 당시 북한 측에서 제출한 해당 결의에 맞서 한국 측에선 남북 대화 및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보장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협상을 촉구하는 결의를 제출해 두 결의안이 동시에 채택됐기 때문이다.



"상반된 결의안 통과, 우스꽝스러운 일"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 이후 한미 양국은 종전선언을 둘러싼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측은 종전선언의 법적 구속력과 파급 효과 등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0월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에 참석한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모습. [뉴스1]

 

당시 상반되는 내용의 결의안이 함께 처리된 건 남북 대치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유엔의 중재자 역할이 사실상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됐다. 이 때문에 그 이후로 유엔 총회에선 남북 체제 대결로 인식되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결의안 자체를 상정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박수길 전 주유엔 대사는 국립외교원 오럴 히스토리 총서 ‘한국 외교와 외교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당시) 북한은 유엔사 해체, 우리는 유엔사 존속 등의 이야기들이 (결의를 통해) 자꾸 나왔는데 해마다 그걸 통과시키려고 숫자놀음을 갖고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며 “그런데 1975년에 (남북) 양쪽 결의안이 유엔총회에서 다 통과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 상반되는 결의안이 통과되니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어리석은 짓은 더 하지 말자고 양쪽에서 의견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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