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성주읍기(星州邑基) 상

Jimie 2021. 10. 11. 10:20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성주읍기(상)

성주읍기(邑基)는 조선조만 하더라도 영남의 웅진(雄鎭)이었던 곳이다.
그래선지 그 터가 간직하고 있는 풍수 내용 또한 무척 남다르다.

이원정( 李元禎.1622-1680)이 저술한 '경산지(京山志: 경산은 성주의 옛 지명임)' 와 도한기(都漢基.1836-1902)가 펴낸 '읍지잡기(邑誌雜記)'에는 성주읍기 와 관련된 다양한 풍수설들이 기록돼 있다. 그중에는 다소 황당한 내용들 도 있지만, 읍기 경관(景觀)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와 같은 무질서한 읍기 토지 이용에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도 적지 않다.

먼저 진산(鎭山)이나 주산(主山) 설정 등과 같은 보다 근본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지리이론체계와 연관된 풍수설부터 한번 살펴보자.

백두대간의 대덕산 동쪽 수도산(修道山)에서 북쪽으로 치닫는 지맥이 전현(箭峴:살티 재)을 지나 별뫼(혹은 白馬山)에 이른 후, 동쪽 줄기는 두 갈래로 갈라져 각각 금오산과 방울암산(혹은 鈴岩山)으로 연결되지만, 그 남쪽 줄기는 봉양산-성산(城山 혹은 紫山)-인현산(印懸山)으로 내리뻗으면서 성주읍기의 후록(後麓)까지 이어진다.

풍수 개념상 고을의 종산(宗山)은 초전면의 백마산이고, 진산은 인현산이며, 읍기의 주산대금산(大琴山 혹은 聽松臺 )이 되는 셈이다. 혹자는 여기에서 인현산(해발 185m)을 고을의 진산으로 삼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어찌하여 성주초등 뒷봉우리인 속칭 봉두산(鳳頭山)을 주산으로 설정하지 않고 불무골 뒤의 대금산(해발 70m)을 읍기의 주산으로 단정짓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군청 뒷 봉우리와 봉두산은 예전에는 모두 읍성 안에 있었다. 더구나 과거에 봉두산은 관가의 과수원이었는 반면, 성에서 1리 떨어져 있는 대금산은 읍기의 주룡(主龍)이지만 낮고 허해서 위.아래로 소나무를 심어 비보(裨補)했으며 , 관(官)에서 벌채를 금지하여 보호해 왔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성곽이 사라진 지금, 봉두산을 읍기의 주산으로 보는 것도 일견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적어도 문헌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읍기의 주산대금산이 틀림없는 것이다.

주산격인 대금산에 대한 성주읍민들의 돌봄이 그러했을진대 진산격인 인현산의 돌봄은 과연 어떠했겠는가. 지극 정성 바로 그 자체였음에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인현산 바로 북쪽에 확 트인 초전(草田) 들(野)이 놓여 있어, 혹여 세찬 바람이 진산에 위해(危害)를 가할 수도 있는지라 김천시 남면 부상리(扶桑里)로 넘어가는 승거리 고개에 우거진 숲을 만들었음은 물론 천평교(泉坪郊: 지금의 長山 서쪽 어딘가로 추정됨)에 천수(泉藪 )를 만들어 그 바람길을 막으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더구나 그 인공 숲은 저 선석산(혹은 서진산) 아래에 터잡고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의 좌청 룡 지맥 끝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그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게다. 현대과학으로 볼 때 일종의 풍식(風蝕)을 방지하려 한 꽤 합리적인 환경행태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런 해석을 어찌 자연을 위한 자연을 만들면서까지 진산을 마치 인간을 대하듯 보살핀 당시 사람들의 삶 터 자연관과 비교할 수 있을쏜가.

그런 환경행태에 비하면 읍기 내지 읍성의 형태와 연관된 형국론(혹은 물형론)적 풍수설은 그야말로 이기적인 발복 심리에서 비롯된 일종의 관념적 유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밤나무 숲과 같은 바람직한 풍수 경관을 만든 행태는 제외하고서 말이다.

성주읍기의 지세설은 크게 와우형 (臥牛形) 명당설과 지네형(蜈蚣形) 명당설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읍성의 형태와 관련된 풍수설이요, 후자는 읍기 내맥(來脈)의 생김새와 관련된 풍수설이다. 여느 곳의 형국론적 명당들처럼 그 두 명당설 역시 실제의 지세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우선 와우형 읍기설의 경우, 현재 성주여중.고가 자리잡고 있는 이천(伊川)변쪽 봉우리를 소의 머리, 옛 서문 고개를 소의 목, 군청 뒷산을 소의 어깨, 그리고 천주교회 뒷봉우리(속칭 봉두산)를 소의 엉덩이 부분으로 비정(比定)할 경우, 읍기의 후맥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 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와우형 읍기 명당설이 끼친 영향력이 실로 대단했 다는 것이다. 곳이름짓기는 말할 것도 없고 도로 이설(移設)과, 심지어는 주거지 획정까지도 모두 와우형 지세설의 영향을 받았다. 소가 머리를 돌려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어서 읍기의 남쪽 산을 성산(星山)이 라 하고, 또 그 성산 북동쪽 줄기 끝에 위치한 산을 소의 고삐를 매어두는 집우산(執牛山)으로 이름지었으며, 소는 먹이가 풍부해야 도망가지 않으므 로 남쪽(용암면쪽)에 조곡방(租谷坊)과 초곡방(草谷坊)을 두고, 북쪽(초전면쪽)에 초전방(草田坊)을 두었다고 하는 일종의 지명 유희적인 관념 설정이라든가, 혹은 와우형 지세 좌우의 큰 못(池: 시외버스정류장 자리)과 작 은 못(신성강변타운 자리)을 각각 큰 여물통과 작은 여물통에 비유하면서 그들 경관물들을 와우형 지세가 구비해야 할 발복 요소로 끌어들여 해석한 것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명당수격인 이천 물이 읍기를 빠져나가는 수구(水口) 지점인 갈막에 칼을 든 백정들을 집단 거주케 하여 소가 읍기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든가, 혹은 성현(星峴)으로 나가는 길이 관아와 바로 대하고 있어 소의 품안에 자리잡고 있는 성내에서 부자가 나오지 않고 근심스러운 일만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믿고 고령(高靈)가는 길을 서문고개쪽으로 돌려버렸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풍수동티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반(半)풍수론의 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소 의 엉덩이 부분에 해당하는 봉두산 봉우리를 이른바 인현산의 기맥이 응결 된 두뇌로 보고, 그 산 밑에 관아터를 잡은 적도 있고, 또한 저 교촌산 밑 들판에 서 있는 신라시대의 동방사지 7층석탑을 읍기의 기운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일종의 비보탑으로 제멋대로 끌어들여 해석했다 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건 숫제 일관된 지리 형세설도 아닐뿐 더러 아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것이다.

후대에 와서 견강부회된 그런 얘기들에 비하면 그래도 오공형 명당설은 좀 나은 편이다.
그것은 진산인 인현산에서 읍기 쪽으로 꿈틀대며 내려오는 나지막한 구릉성 지맥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주맥 은 마치 지네가 발을 움직이며 이동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내맥의 생김새 를 오공형으로 보았다면 으레 그런 형국을 비보 내지 압승할만한 지명이나 경관을 만들었을 것인즉,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주맥의 뿌리를 이루는 백마산 아래에 유곡(酉谷: 닭실)이라는 지명을 만들고, 지금의 금수면 어은리 부근 망성촌(望星村) 남쪽 계사(界寺: 아마도 鷄寺를 잘못 표기한 이름인 것 같음)에 돌부처를 세워 지네를 진압하였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 이를테면 지네가 닭을 보고 위축되어 숨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지네의 다리처럼 자손이 번성하고 재화를 많이 모을 수 있다 손치더라도 지네의 극기(極忌)인 밤송이가 없이는 액을 제어할 수 없는즉 , 그래서 만들었던 비보수가 바로 율수(栗藪)였다. 성주읍기에는 서문 밖 이천변과 향교 남쪽 이천변, 두 곳에 대규모 밤나무숲이 있었다고 전해 오는데, 그것이 다같이 이천 물줄기의 침식사면쪽에 위치했다는 사실이 공교로움을 불러일으킨다.

벽진면의 비지산(斐旨山 혹은 乞水山)에서 발원한 이천은 읍기 가까이 와서는 와우형 지세의 소 머리 오른쪽 부위에 맨 먼저 부딪힌 후, 남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굽이치면서 향교가 터잡고 있는 교촌산(校村山) 아래쪽으로 또다시 부딪혀가게 돼 있다. 요컨대 읍기 내에서도 가장 기이한 지세를 갖춘 두 봉우리 지맥이 모두 하천 물줄기의 공격사면쪽에 놓여 있어 침식이 불가피한 지경이었는데, 그 범람을 막기 위해 이천변을 따라 길고 울창한 숲을 조성하기는 하되, 같은 값이면 지네 형 길지의 액운을 떨쳐버릴 수 있는 밤나무를 선택해서 심은,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기지(機智)를 발휘했던 것이 바로 그 율수였던 것이다.

현 재 향교 남쪽의 밤나무숲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성주읍
경산리 이천변 성밖숲 터에는 서나무들만이 일부 남아 옛 율수의 전통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다. 물론 지세 형국론과 비보책(策)들이 삶터 풍수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주 조상들은 솔을 심어야 하는 데는 솔을 심고, 밤나무를 심어야 하는 데는 밤나무를 심었으며, 그런 의미있는 풍수 자연에 그들의 지리적인 영혼까지 심었다. 그런 영혼이 깃들인 탓인지 밤나무숲이 아닌 서나무숲에 들어섰는데도 그 어떤 서기로움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숲을 만든 조상에게 그 어떤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은 또 어찌된 까닭일까. 아마도 작금의 우리네 토지관으로 비춰보아 우리 손으로 그런 숲을 직접 만들어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때를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풍수학자.지리학박사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87] 성주읍기(하)

물론 진산인현산 자체가 조.안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또한 거 기에서 읍기쪽 봉두산과 교촌산으로 뻗어내린 좌우의 지맥이 좀 더 높고 힘차게 내려왔으면...

cafe.daum.net/wcht/H3Ib/193 문화와 역사, 그리고 여행

 

신증동국여지승람-星州牧2013.10.01.

1.인현산(印懸山) : 주 북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2.조곡산(祖谷山) : 주 남쪽 35리에 있다. 태종(太宗)의 태를 봉안하였다. 3.선석산(禪石山) : 주 북쪽 28리...

 

 

의마총(義馬塚) =

대티고개를 내려서면 초전면 소재지인 대장리 대매(대마를 이곳에서 그리 부름)마을에 든다. 이곳은 옛 대마점(大馬店) 혹은 대마 객점이 있던 곳으로 주인을 살린 의로운 말의 무덤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여지도서> 성주 고적 신증에 "의마총은 관아의 북쪽 15리에 있다. 답계역졸 김계백이 말을 기르던 역에서 털빛이 붉은 말을 탄지 5~6년이 되었다. 영조 무진년(1748) 8월 어느 날 김계백이 부상(扶桑)에 끌고 갔다가 술에 취해 말을 타고 밤중에 돌아오는데, 큰 호랑이와 마주쳐 말 아래로 떨어졌다. 호랑이가 곧장 뛰어들어서 물려고 했다. 이에 김계백이 타던 말이 갈기를 흔들며 길게 소리 내어 울고, 발굽으로 밟거나 입으로 깨물며 호랑이가 주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물러나며 10여 리를 가서 대마 객점에 이르렀다가 쓰러져 일어나지를 못했다. 역리와 역졸들이 객점 앞에 말을 묻고 비석을 세웠다"고.

대티고개에서 본 초전면 대마평 일대. 참외 비닐하우스가~

 

이 일대를 <대동여지도> 16-3에는 대마평(大馬坪)이라 적었는데 대마점 혹은 대마 객점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은 객점도 의마총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마을 이름에서 옛 자취를 더듬어 볼 뿐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남원 오수역과 밀양 개고개의 의견(義犬) 설화에도 전해져 오는데, 짐승들이 불을 막고 호랑이에 맞서게 된 빌미는 모두 주인의 지나친 음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