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문소 설치, 언론사 수색, 밤9시 통금… 곳곳서 탈레반 공포정치
- 조선일보
- 정지섭 기자
- 입력2021.08.18 03:00
[아프간 후폭풍] 일상생활 하라더니… 탈레반 본색 나오나
탈레반은 15일 아프간을 재장악하면서 여성의 사회 활동을 보장하고 공항과 병원 등의 정상 운영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곳곳에서 20년 전의 집권을 떠올리게 하는 공포 정치를 일삼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6일 “카불을 장악한 첫날부터 탈레반 대원들은 상점과 주택가, 정부 사무실, 언론사 등을 마구 뒤지기 시작하면서 공포감이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탈레반은 카불 진입과 함께 경찰서와 우체국 등 모든 관공서를 접수하고, 시내 곳곳에 검문소를 세우고 밤 9시로 통금 시간을 정했다.
16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인근에서 탈레반 전투원(오른쪽)이 미 수송기에 미처 탑승하지 못하고 공항을 빠져나오는 시민의 가방을 수색하고 있다./AFP연합뉴스
미국 비영리 온라인 매체 더인터셉트는 “곳곳에 세워진 검문소들은 카불 시민이 공항이나 미국 대사관으로 향할 수 없도록 동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자신들의 통치를 두려워한 피란 행렬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는 얘기다. 시내로 몰려나온 탈레반 대원들이 주민들을 무차별 검문하는 장면도 곳곳에서 보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행인들에게서 강압적으로 휴대전화를 제출받은 뒤 열어서 정부와 관계되는 일을 하는지, 혹은 반이슬람적인 행동을 했는지 등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정부·미군 협력자 등에 대한 보복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일부 대원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리는 등의 사례도 목격되고 있다.
WSJ는 카불의 호텔에 묵고 있던 아프간계 캐나다인 여성이 16일에 탈레반에게 당한 일을 소개했다. 로지나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남편과 함께 투숙 중인 호텔의 정원에 있었는데 탈레반 대원들이 몰려와 위협해서 부부가 함께 호텔 방으로 피신해 화장실에 숨었다. 탈레반 대원들은 몇 분 뒤 호텔 매니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와서 나오라고 강요했고, 지갑과 여행 가방을 뒤지고 여권을 보면서 남편과 실제 부부 사이인지 혼인 증서까지 요구했다. 참다못한 남편이 “독실한 무슬림은 남의 아내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따지자 대원들이 남편의 뺨을 후려치고 무기로 마구 때렸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부부는 호텔을 탈출했다.
카불이 함락되기 전에도 탈레반 점령 지역에서 투항한 군인들을 살해하는 일이 잇따랐다. 여성들에게 탈레반 대원과의 결혼을 강제하거나, 주민들을 폭행하는 등 행패를 일삼았다는 목격담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목줄 매서 끌고다니는 탈레반 - 지난 13일(현지 시각)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제3의 도시 헤라트에서 두 남성이 목줄에 감긴 채 끌려다니고 있다. 두 남성의 얼굴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탈레반은 이들이 물건을 훔치는 죄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트위터
지난달 하순에는 한때 미군 통역사로 일했던 주민이 명절을 쇠러 차량을 운전해 여동생을 데리러 가는 길에 탈레반 대원에게 붙잡혀 참수 살해됐다는 소식이 CNN 등 외신들을 통해 전해졌다. 탈레반은 폭력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모양새를 보이지만, 잔혹한 인권 탄압과 폭정이 재개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정부·미군·외국 협력자에 대한 보복이 없을 것이라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가혹하게 통치했던 과거 탈레반과는 다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국제 칼럼니스트는 “돌아온 탈레반은 정권 안정을 위해 해외 원조와 투자가 필요할 것이고, 파키스탄·인도·중국·러시아·이란 등 주변 열강들 사이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며 “어쩌면 그들은 백악관 직통 단축 전화키를 갖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며 온건하게 변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탈레반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파키스탄의 저널리스트 아메드 라시드는 미 NPR 방송에 “교육을 받고 온건했던 1990년대 탈레반 지도자들과 달리 현재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의 젊은 지도자들은 더욱 극단주의 성향이고, 여성들을 (함부로) 다루는 자신들의 통치 방식을 자랑스러워한다”며 탈레반 체제 아프간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AP통신에 따르면 탈레반은 이날 “모두에 대한 일반 사면령이 선포됐다”면서 “확실한 신뢰를 가지고 일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관리들이 탈레반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업무에 복귀하지 않아 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 사면을 선포한 것이다.
한편 17일 아프가니스탄 TV 채널 ‘톨로뉴스’에서는 탈레반 관계자가 출연해 여성 앵커와 수m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며 앉아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전파를 타 눈길을 끌었다. 이날 탈레반 공보팀 소속 몰라위 압둘하크 헤마드는 여성 진행자인 베헤슈타 아르간드의 카불 상황과 탈레반이 진행 중인 가택 수색에 관한 질문에 답하면서 “전 세계가 탈레반이 이 나라의 진정한 통치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며 “사람들이 탈레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놀랍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탈레반 지도부가 조심스럽게 이미지 관리에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아프간 전체가 탈레반 통제로 들어가면서 보복을 두려워한 아프간군 병력의 탈주 소식도 잇따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따르면 지난 주말에만 우즈베키스탄으로 아프간 병력 585명과 전투기 22대, 군용 헬기 24대가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수송하던 아프간 군용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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