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배성(裵 成 1950~ ) 사나이 부르스

Jimie 2021. 8. 3. 17:50

 

 

사나이 부르스 · 배성

1969

남국인 작사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FCl44W38eJQ

 

망향, 배성

1970

한운사 작사  남국인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u5GjRzpZLJ8 

 

 

 

무정한 여인 · 배성

1970

김학송 작사 .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tJyvO4hLCxc

 

 

배성(裵 成 1950~  )

고등학교 2학년 때  ‘사나이 부르스’로 데뷔해 ‘망향’, ‘향수’, ‘기적소리만’ ‘거리’ 등 히트곡을 남긴 배성은 유독 ‘사나이’를 주제로 한 노래와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들을 많이 발표했던 가수.

 

1970년대 10대 가수상, 서라벌 가요대상, 목포 난영가요제 대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며 당대에 나훈아, 남진, 김상진과 어깨를 견주던 실력파였지만 방송 PD들의 비리상납에 대한 폭로 후 관련 PD 14명을 구속시키는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6년 가수 생활을 접고 돌연 은퇴했다.

 

"고2 때였어요. 친구들과 셋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정진성 작곡사무실’ 간판이 눈에 띄었지요. 그때 친구들이 ‘야, 너 노래 잘하니까 한 번 들어가 보자’, 해서 들어갔죠. 이때 정진성 선생이 노래 한 번 불러보라 해서 얼떨결에 부른 노래가 ‘우수’였습니다. 소풍가서 친구들 앞에서 부른 노래였거든요. 마침 이 노래를 옆에서 듣고 있던 작곡가 남국인 선생이 노래 실력이 괜찮다며 취입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죠.”

 

이렇게 해서 처음 취입한 노래가 ‘사나이 부르스’와 ‘세월은 흘러도’, 두 곡이었다.

예명은 직접 지었다. 가수로써 대성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본명 배태규(裵泰圭).

1950년 11월, 대구에서 부친 배일출, 모친 이경희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이태원초등학교와 선린중학교를 거쳐 서라벌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가수 활동을 해보겠다고 할 때 부친은 절대 불가 입장이었음에도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다만 조건은 딱 한 번만 음반을 내고 이후에는 학업에만 전념하기로 한 것.

 

배성의 데뷔곡은 1969년 발표한 ‘사나이 부르스’다. 원래 제목은 ‘사나이답게’였는데 음반이 나올 때 제목이 ‘사나이 부르스’로 바뀌었다. 작사자 고향은 작곡가 남국인의 또 다른 예명.

 

1969년 6월에 발표한 ‘사나이 부르스’가 부산에서 히트되기 시작하더니 이어 광주MBC인가 KBS에서도 8주 연속 1위를 하면서 북상, 서울서도 크게 히트  8월부터 인기가요 톱10 순위에 진입, 그해 말에는 정상을 차지한다.  서라벌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고3 겨울방학을 틈 타 DBS(동아방송)의 연속극 ‘망향’의 주제가를 취입한다. 이 노래는 이듬해인 1970년에 음반으로 발매되며 더욱 크게 히트했다. 물론 고등학생 신분이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 ‘무정한 여인(김학송 작사, 작곡)’을 타이틀로 한 음반을 취입하는데  19703월에 발표되자마자 인기가요 순위에 진입, 데뷔 6개월 만에 인기가수 스타덤에 오른다.

 

1970년 중앙대학(서라벌 예대) 입학 기념으로 뉴 코티나 자동차 선물 받자 부친 재력에 이목 쏠려

데뷔하자마자 ‘사나이 부르스’, ‘향수’, ‘무정한 여인’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인기 가수 대열에 합류한 배성이 사실은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대학에 진학하면서다.

 

가수활동을 그렇게 반대하던 부친이 대학입학 기념으로 ‘뉴 코티나’ 승용차를 선물한 것, 이런 사실이 기사화되면서(매일경제신문 1970년 3월 27일 자) 부친의 재력에도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그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는데 저에게 차를 사 주셨어요. 결국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라고 밀어주신 거죠. 저는 고2 때부터 운전을 했지만 가수는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기사를 따로 두었지요.”

 

계속해서 "망향" "어머님 생각" "향수" "청포도 고향" "거리" "기적 소리만" "내 사랑 어디로"등의" 연속 히트로 많은 팬들을 확보하였다.

 

1972년, 배성은 불과 스물두살의 나이에 결혼한다. 가수로써는 전성기였지만 아직 대학생 신분이었다. 결혼상대는 모델 곽성자, 당시 CF에 이따금 출연했다. 결혼 후 명동 챔피온 다방 앞에서 지지 의상실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배성의 활동에 제동이 걸린 것은 바로 이 무렵인 1973년도. 모 지방방송국 개국 축하방송 스케줄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방송국 PD와 폭행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방송국 측은 출연정지를 주장했고 배성은 이참에 가수활동을 접겠다고 맞섰다.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 생방송 무대에서 노래 끝날 때마다 악보 찢어...

 

배성이 가요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이 무렵, 그는 기독교방송(KY)의 ‘정오의 휴게실’ 생방송 무대에 오른다.

“그날 생방송으로 진행된 ‘정오의 휴게실’의 공개방송 타이틀이 ‘배성 아워(Hour)’였어요. 그러나 저는 이 무대를 끝으로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맘먹고 반주를 맡고 있는 밴드마스터, 이길봉 악단장님께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악보를 찢어버리자고 제의했지요. 실제로 노래 한곡이 끝날 때마다 악보를 찢는 소리가 그대로 방송에 나갔지요. 방청석에서는 눈물을 보이며 안타까워하는 팬들도 곳곳에 눈에 띄더군요.”

 

결국 이 무대가 그의 은퇴 공연이 되었다. 그리고 이 무대를 끝으로 그는 가수 활동을 접는다. 이로써 불과 4년간의 짧은 활동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얼마 뒤 가요계에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요계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지 불과 6년 간, 그러니까 군 복무기간을 빼면 불과 4년 동안만 활동했던 셈이다. 가수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아서 불과 4년여의 짧은 활동기간이었지만 "배성" 특유의 힘찬 목소리는 이젠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비리가 판을 치는 가요계 풍토가 싫다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돌연 은퇴하였습니다
.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가수의 재능을 접고 1982년 산호세에 네온사인 및 플라스틱 제조회사 액티브 사인(Active)을 설립했다.

1985년 산호세 머큐리 뉴스가 열심히 일하고 성실한 한인이라는 제하의 기사로 배성 씨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