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가련한 여인들 BEARD REPORT

Jimie 2021. 7. 20.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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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련한 여인들 BEARD REPORT

 

 

1950년 6월 28일 오후 7시 47분, 강한 노을빛이 한 여자의 검은 눈가리개를 뚫고 망막을 자극했다. 여자는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사양(斜陽)을 등에 지고 다섯 명의 사수들이 거총자세로 서 있었다. 먼 산 너머에 포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급한 목소리의 남자가 “쏴” 명령을 내리자 여자의 가슴에 붙인 하얀 표적에 선혈이 배더니 곧 뿜어져 나왔다. 서른 아홉 살의 여자 김수임은 이렇게 사라졌다. 그녀에게 붙여진 죄명은 급조된 국방 경비법 제32조 '간첩이적행위'였다.

 

이른바 “김수임 사건”은 필자가 북한 빨치산 다큐멘터리를 쓰면서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되었는데, 그것은 KLO(Korean Liaison Office)와 관련된 몇 가지 의문 사항들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이 사건을 재조명한 KBS에서는 이념의 해체라는 구실로 국가의 폭력에 원죄를 두고 친북적 지렛대를 들어 올리려는 저의를 보았고, 얼마 전 은둔해 버린 어느 인기 연극배우가 주연한 연극(나, 김수임)에서는 감성과 시장성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스런 Fact를 접할 수가 없었다.

 

한국전 첩보전을 이해하는데 1949년 6월은 매우 중요한 달이다. 그해 6월 26일은 국가통합의 희망이며 상징이신 김구선생이 돌아가셨다. 분단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달을 기준으로 50년 6월과 51년 6월의 약 2 년간에 걸친 사건 Matrix를 분석하면 잃어버린 자료들을 방증 할 수 있는 결론 들을 얻어 낼 수 있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전까지 우리 현대사의 무대에 올려 진 한국인의 고통에 대해 그 연출 지도와 각본이 의도적 조직적으로 폐기 되었으며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김원일 교수(김수임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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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1일 반도호텔 2층 202호실에 설치된 켈로 사무실에는 442 CIC의 위테커 소령과 민간 대북 첩보 조직이라고 불리는 ‘백의사’등 여러 반공 단체의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얽히는 과정에서 한국인 켈로가 탄생하였지만, 최초의 구성요원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들에게 명함을 준 사람은 위테커였으나,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켈로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같은 날 오후 미군 지프에서 짐을 내리고 이층 사무실로 들어간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켈로의 창설에는 실상은 겉으로 보이는 미군들 보다 더 속 깊은 그늘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관여했다. 그들은 바로 일본계 미국인이었는데, 2차 대전시 미국에 충성을 다한 하와이 출신으로 구성된 닛세이(二世) 부대라는 호칭의 제 100 부대 출신 들이었다. “양키 사무라이”라고 불린 이들은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독일이 항복하자 바로 태평양 전선으로 전환된 100부대 예하의 442 전투단(RCT)에서 전속 온 사람 들이었다. 원래 100 부대는 하와이에서 병력을 징발하여 위스콘신의 캠프 맥코이(Camp McCoy)에서 훈련시켜 처음에는 위스콘신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경비와 신문요원으로 사용되었으나 차후 알제리를 거쳐 유럽의 이태리 전선에 투입되었다.

 

독일이 항복 후 전선이 테평양 지역으로 좁혀지자 100 부대 소속의 한국/일본인 2세 중 일본어를 할 줄 아는 80명을 뽑아 미네소타의 켐프 세비지(Camp Savage)의 군사 정보 언어학교(MISLS, 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Language School)로 전출시켜 일본어는 물론 만주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이들은 곧 메릴랜드의 캠프 릿치(Camp Ritchie)에 새롭게 창설된 FEIC(극동정보센터, Far East Intelligence Center)의 주요 기간요원이 된다. 일제의 패망 후 일본에 진주한 이 일본계 미국인들은 441 CIC에 대거 참여하여 맥아더의 군정에 필요한 일본 내의 주요 정보를 장악하게 된다.

 

441 CIC는 더 나아가 일본 뿐만 아니라 대만과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지역 정보망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은 일본 흑룡회黑龍會의 협조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흑룡회가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의 기존 정보망은 방대한 것이었다. 흑룡회는 패망후 헤체된 듯 보였으나 1948년 12월 24일 A급 전범의 처형으로 동경재판이 얼렁뚱땅 마무리되자 면죄부를 받고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이 미 군정하에 살아 갈 길은 철저한 반공단체의 간판을 달고 미군의 정보 요구에 협조하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 코다마 요시오가 있었다. 코다마는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고급 정보를 극동사 정보처장인 윌러비 장군에게 넘겨 주고, 그 스스로 역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켈로의 실무진은 이런 경험에 의해 탄생하였다. 켈로의 핵심 업무를 담당한 사람들은 바로 이 닛세이 부대원 중에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이름에 긴 꼬리가 붙은 한국계-일본계-미국인 들이 있었다. 이들의 해방공간의 무대 위에서 한국의 정보를 장악하고 일을 꾸민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부대 직능은 확연히 다르지만 일본계 미군인 닛세이 442부대와 미 군정 시 한국 군사정보를 관할하는 442 CIC의 부대명의 일치는 흥미롭다.

 

1948년 8월 24일-「한·미 임시군사협정」을 체결한 주한 미군은 일본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 공백 기간을 이용하여 서울의 조지 오우렐은 새로 창설된 CIA의 지역조직망을 구축하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주요 인력은 OSS가 기안하여 메릴랜드의 극동정보센터(FEIC)에서 파견된 일본계 미국인 2세들로 구성되었으며, 한국 내 현지 행동대원들은 백의사(白衣社, WSS-White Shirt Society)에서 과거 친일 행적이 강했던 자 들로 가려내었다. 그것은 장개석 군에서 OSS가 남의사(藍衣社, BSS-Blue Shirt Society)를 성립시키는 과정과 유사하다. 어째든 오우렐은 이듬해에 맥아더의 한반도 정보 조직망인 켈로(KLO)의 창설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이무렵 남과 북의 이념의 철새들은 떼를 지어 짝짓기를 하는데 매우 부산했었다.

 

맥아더의 극동사령부(FEC-SCAP)는 진공상태인 남한에 예민한 신경의 정보조직을 심어두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실성은 한반도내의 토착 정보조직을 무력화 시키고 기획공작을 통하여 여건을 조성하는 일로 노력이 모아지고 있었다. 한반도에 자생, 타생으로 만들어진 정보조직들은 서로 반목하고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것은 맥아더와 투르만의 대립과 관련하여 공공연하게 나타났고 이들의 대립과 혼란은 맥아더가 해임 때 까지 계속되었다.

 

백의사의 주축은 해방 전 평양에서 결성된 대동단이었다. 그 당시 이들은 일본 관헌의 주목을 받지 않는 친목단체처럼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일제가 조선인의 각종 반일 단체에 심어 놓은 이른바 「민생단」의 친일 프락치들이 스며들어 이미 이런 단체들은 오염되어 있었다. 이런 흐릿한 모습의 인간들은 혁명난류(革命亂類)로 모여져서 피아식별을 불분명하게 하고 끊임없이 목적과 노력을 분열시켰다. 민생단은 분단의 축복을 받았다. 해방이 되어 친일을 용납하지 않았던 북한에 비해 남한은 이들이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분단은 이들에게 진정한 해방이었다. 이들은 “조선민족전선” “항일 의연군” “8로군”의 인적사항을 면죄부처럼 품에 안고 남으로 내려 왔다.

 

맨 우측 뒷줄, 베어드 대령과 김수임(낙랑클럽으로 추측되는 장소)

 

이런 부류의 중심 인물이 계인주였다. 그가 만주에서 부터 흑룡회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해방 후 코다마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계인주의 대북공작 기구인 38무역 역시 이런 정보들로 풍요했다. 이들의 구성요원들은 대부분 일제의 고등계 형사나 일군 헌병 출신들이었다. 그러므로 해방공간의 초기에는 미군들 보다 더 역량 있는 지하망을 북한에 두고 있어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그 자신이 만군 헌병 출신이었으므로 누구보다도 북한의 지도세력으로 등장한 조선민족전선의 인적사항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육본의 정보국 차장 겸 HID 부대장을 할 무렵에는 북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대통령의 책상에 올랐고, 남한 대통령은 부인인 프란체스카가 배후에 있는 또 다른 첩보계선인 낙랑클럽을 통해 국내 미군동향과 함께 최고의 북한정보를 접하고 있었다. 이것은 1949년 1월 미 군사고문단장이 해주공작 실패를 기화로 한국군의 정보조직을 통폐합하고 약화시킬 때 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워싱턴에 닿은 한반도 정보는 CIC와 CIA가 조종하는 백의사에 의한 공작첩보가 주류를 이루었고, 49년 후반기부터 보고되는 북한에 대한 KLO의 정보는 동경의 극동사에 머물렀다.

 

이렇게 KLO 성립과정과 배경을 토대도 생각할 때, 김수임(1911-1950)이 KLO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려운 자료가 있다. 그녀가 49년 6월 1일 KLO가 설치되는 날 반도호텔에 통역 사무실을 옮긴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그 정황이 너무 선명하다. 계인주의 미발간 회고록 "역류"에는 38 무역을 통해 공작원을 월북시킨 인물들이 가명으로 기재 되어 있다. 김수임이 북파 이중간첩들의 연락책이며 CIA의 공작 조종관들을 도왔을 정황과 함의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그녀가 간첩으로 몰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NARA)에 보관 되어 있는 200여 쪽의 베어드 보고서에는 김수임이 북의 간첩이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수임 간첩사건에 대한 미군 측의 총괄 보고서인 베어드 보고서는 200여 쪽에서 1000여 쪽 까지 보는 사람마다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의도적으로 작성된 부분과 왜곡 사항이 많다. 그리고 요즈음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부분을 NARA에서 열람하는데 미국인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

 

아무튼 김수임이 KLO가 설치된 1949년 6월 1일 같은 날 그녀가 반도호텔로 사무실을 옮긴 것은 이강국(1906-1955)과의 관계를 고려한 대북 공작용이었다는 추론을 방증하고 있다. 낙랑클럽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모윤숙에 의해 유인되어 1950년 4월 체포될 무렵, 당시 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이 된 이강국의 신변 안전을 고려한 공작보안과 사전 공작여건 조성의 한 방법으로 김수임을 희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강국은 정말 미국의 간첩이었던가? 2001년 공개된 실리 보고서(George E. Cilley)에는 놀랍게도 이강국이 임화와 더불어 CIC요원이었다고 나와 있다. 필자는 아직 확실한 교차 증거를 가진 북한 측 자료를 접할 수 없다.

 

CIC가 이강국에 연정을 가지고 있던 모윤숙을 이용 김수임을 제거했다는 말은 최근 까지 생존한 LA의 이화여전 후배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필자 역시 인터뷰 중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90을 넘긴 죽음을 앞둔 할머니들이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낙랑클럽의 매니저였던 모윤숙은 그렇다면 군사법정에서 펼친 김수임에 대한 변론에서 “종달새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명랑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던 수임이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은 아니다. 간첩 행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지른 것은 이강국에 대한 첫사랑 때문에 피동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라고 말한 것은 더욱 교활하고 가증스럽다.

 

KLO설립 기안에 참여한 극동사 정보처의 아보트 소령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낭낭클럽(Nang Nang)에서 그 여자를 보았는데, 소문처럼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다. 30대 후반에의 나이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하는지. 저런데 써먹기에는 너무 아까워> <서울에 CIC 책임을 지고 있는 위테커 소령은 좀 너무 위세를 부려서 탈이지만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헌병감 베어드 대령이 데리고 있는 여자를 이달 초에 반도호텔 KLO 사무실로 옮겨 놓았다. 베어드 대령과 위테커는 그 여자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 일본군 헌병사령부가 있던 동경부근 구단(九段) 시(市)의 CIC 본부가 있는 노튼 홀(Norton Hall) 건물은 당시 이 문제의 핵심이 논의 되었던 곳이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미군 정보요원들은 언제나 낙랑 클럽의 이야기가 화제였다. 한국 최고의 지성을 가진 여인들이 몸으로 막아내던 허약한 나라에 꼬리 잘린 도마뱀들의 이야기였다.

 

 

1. 1946에 창설된-제24군단 정보처 산하「442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방첩부대. 동경의 441 CIC와 유사하게 운영하였다.

 

2. Joseph D, Harrington의 책

 

3. 닛세이 100 부대 50주년 기념책자 “Remembrances" 100th Infantry Battalion 50th Anniversary Celebration 1942-1992, 1997발간 p 171 Of Special Missions and POWs

 

4. HID(Higher Intelligence Department, 고급정보부서)는 정부 수립 후 한국전 발발까지 이용문, 백선엽, 장도영으로 이어지는 육본 정보국 산하 대북 군사첩보부대의 명칭이었다. 이것은 미군 CIC 부대의 구성인 방첩위주의 CID(Counter Intelligence Department, 방첩부서)와 공작위주의 HID(Human Intelligence Department, 인간정보부서)중 HID에서 따온 명칭으로 추정되지만 의미는 다르게 사용되었다.

 

5. 낙랑클럽, 해방공간에서 미군과 주한 외교사절의 접대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던 한국정부가 후원한 사교모임

 

6. 김수임의 처형일이 6월 15일로 알려져 있으나, 전쟁발발 직후(6월 28일)인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