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김병연(김삿갓)무덤

Jimie 2020. 6. 17. 06:13

 김병연 [난고(蘭皐), 김립(金笠)]

 

문학관 앞 널찍한 마당에... 김병연 [난고(蘭皐), 김립(金笠)] 시비와 동상

 

 

김병연 [난고(蘭皐), 김립(金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방랑시인 김삿갓님의 슬픈 가족사에 얽힌 아픔을 아파하면서 눈물 흘려본 적이 있는 소생인지라

언젠가 영월 와석리 묘소를 들러 영전에 술 한잔 올리고자 하는 마음은 늘 간직하고 있음이다.

 

후세백작님의 김삿갓묘(추정) 고증을 위한 논설을 접하면서

무엇보다 시인의 후손들이 찾는다는 '하도마치 묘소'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 테다.

 

이제 고증, 인증을 위한 문제제기 단계이지만 후세백작님의 논증에 일견 동의하면서 의미 있는 수고에 경의를 표하면서

아래에 그의 논설 요지를 발췌하는 것인 바 깊은 해량 있으시길 바라는 바이다.

 

< 영월 와석리의 김삿갓 묘>

 

~ 아래~

천동리 도마치골에 김삿갓의 김병연(추정)과 아들 익균의 묘

후세백작 2017.12.16 23:14

 

노란 두 점, 아래는 익균의 묘이고 위쪽은 김삿갓 묘(추정)이다

-1-

이 지도는 평창읍 남쪽 6km 아래 천동리로 평창과 영월을 가르는 삼방산 남쪽자락 끝에 샘이 솟는 마을로 옛날에는 정동 또는 현 행정명상 천동리 산 23-3번지에 김병연(일명 김삿갓)의 묘와(추정) 그 아래엔 아들 김익균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위의 묘에서 불과 4~5m 아래에 동일한 형태의 묘가 있는데 아랫것은 천동리에서 훈장을 하며 살았다는 익균의 묘로 동네분들에 의해 확인이 된다.

 

증언자의 증조부들이 익균의 친구로서 익균은 천동에 살았으며 정동 샘 옆에 서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서당 훈장도 하였다. 익균은 친구들에게 죽으면 아버지 아래 묻히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막상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천동리 하 도마치 산속의 김삿갓묘(추정분) 아래에 익균의 묘를 써주었다고 한다.

 

익균이 천동리에 살았던 기록과 그의 묘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4~5m 위쯤의 김삿갓 묘에 대하여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증언을 통하여 김삿갓 묘의 진위를 알게 되었으며, 여러 정황으로볼때 사실로 이해되지만 아직 검증과 인증의 절차가 필요하기에 우선 추정이란 단서를 붙이게 됨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천동리 동네 사람들은 천동리 산 23-3번지, 이곳을 下 도마치 라고 부른다.

평창의 진산인 삼방산은 동서로 길게 놓여 있으며 서쪽 끝자락이 천동리인데 이곳 삼방산 서쪽 끝에 하도마치의 약간 굴곡진 계곡을 따라 산을 약 200여m 오르면 김삿갓의 아들 익균 묘에 먼저 다다른다. 경사지라 주변 돌들을 모아 3단쯤의 축대를 쌓았 고 제절은 막힘이 없이 좀 넓게 만든 묘인데 봉분은 50여cm정도로 내려앉고 몇 년전쯤에는 *제절(除節)에 5센티 정도로 굵은 나무들을 수 없이 베어낸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제절 [除節] 무덤 앞에 평평하게 닦아 만든 땅

그리고, 익균의 묘 5m위에는 익균의 묘와 동일한 크기와 똑같이 둥근 제절을 한 묘가 하나 더 있는데, 봉분은 사그라져서 겨우 알아볼 수 있다.

 

-2-

처음 보고 느낌은 익균의 묘와 쌍둥이 묘같은 인상에 두 묘는 어떤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이곳이 김삿갓(추정) 묘이다.

 

이곳이 김삿갓 묘라면 150여년 되는 봉분은 사그라져 그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데 봉분엔 지름이 약 20센티 정도의 소나무 두 그루가 자랐으나 그 중 한 그루는 얼마전 쯤 베어지고 한 그루는 아마도 세월을 잘못 만난 김삿갓을 한탄이나 하듯 비슴듬히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동묘지가 아니라면 대게는 산세 초입의 밭 가장자리 쯤에 묘를 쓰거나, 아니면 천동에서 도마치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야산인 매봉산 자락에 지사함 장군묘와 풍산 지씨 묘역처럼 야산의 보기에도 좋은 장소에 묘를 쓸텐데, 익균은 부친 김삿갓 묘를 산방산 자락의 어느 이름없는 골에 쓴 점은 익균이 항간의 세인들의 질타에 부친의 묘를 산속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은둔하여 쓴듯 하다.

 

(영월의 김삿갓 묘는 당시 문화원장 박영국 옹이 학계에 건의하여 학계가 인정해준 묘로 그곳은 영월서 봉화로 넘어가는 길과 김삿갓 생가로 가는 삼거리에 누구도 잘 보란듯한 곳에 묘가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안동 김씨의 명문이지만 대역죄인의 폐족이라는 피해의식인듯 양반들을 피하여 영월 와석리 깊은 산골에 살았던것 처럼 죽어서도 대역죄인의 낙인을 면치 못한 상태라 그의 묘도 산속 깊이 숨어 조심하자는 듯하다.

 

-3-

천동리의 하 도마치의 산세는 완만한 경사면으로 여기나 저기나 어떤 특정한 장소도 아니고, 그러기에 풍수론에 입각한 명당을 찾고자 한 흔적은 없는데 왜 산속으로 숨어들어 갔을까? 그것은 세상의 무서움에 아직도 조심한 것인듯 하지만 그래도 햇볕이 드는 양지 바른 곳으로 김삿갓이 바라보는 앞산은 맑고 정결한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다.

 

묘의 앞산은 솥뚜껑을 엎어놓은 형상의 정제산인데 임진왜란때 권두문 평창군수와 군만들이 응암굴로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었으며 이때 군수의 소실부인 강소사는 천인절벽으로 뛰어내려 절개를 지켰기에 절개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절개산은 해학과 풍류를 즐겼지만 불의를 보면 못참고 쓴소리를 하는 김삿갓에겐 덧없이 좋은 곳으로 태양이 비춰오는 절개산을 바라보며 지조와 절개를 지킨 강절부님의 자태를 바라보면 구린네 나는 인간세계보다 더 맑디맑은 신선한 마음이었으리라.

이렇게 하 도마치 작은 골엔 이렇게 역사적 깊은 서정속에 맑은 향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4-

▲ 김삿갓(추정) 묘역으로 원내는 봉분임

 

약 150여년된 묘로 현재 봉분은 50여cm높이 봉분임. 왼편에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 한 그루가 봉분에서 자라고 있다.

정원대님은 벌초를 하면서 이 소나무를 베어 버릴까 하고 본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벌초는 좋지만 마음대로 하지 마시고 소나무 뿌리는 단단한 물체만 닿아도 뿌리는 두 가닥으로 벌어지는 양반 나무이오니 그냥 두고 봅시다.

마치 김삿갓처럼 세월을 한탄이라도 하는듯 누워있는 인상인데 세월을 비웃기나 하듯 인상적이군요 하고 답을 하였다.

 

-5-

▲ 김삿갓 묘(추정) 5m쯤 아래에 있는 익균의 묘(제절 끝에는 자연석 석축이 3단이며 위의 묘는 1단임)

 

▲ 김삿갓묘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원내는 익균의 묘이다(위와 동일한 묘임)

위, 아래 사진 모두 동일한 사진으로 익균의 묘로 증언자들에 의해 확인됨.

-6-

▲평창의 진산 삼방산이 동서로 가로 놓이는데 서쪽 끝자락 천동리에 지금으로서는 무연고의 묘 두 기가 위, 아래로 나란히 있다.(천동리 산 23-3번지)

 

지난 11월 이곳을 찾았을 때 산 아래 입구에 사는 젊은 분이 마침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이*영 님이 이 산을 가끔 오른다고 증언을 하였다. 증언자들은 부친의 사망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묘소를 돌보고 있는 듯하다.

 

김삿갓은 1807년 출생하여 1863년 전라도 화순에서 객사하였고 동리에서 가묘를 하였고 3년후에 아들 익균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오는데... 익균은 화순에서 천리길을 걸어왔을 것이지만 선친의 유해를 모시고 실로 감회가 컸을 것이다.

-7-

영월의 와석리의 김삿갓 묘는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 노루목에 위치하는데. 이는 당시 영월문화원장인 故, 박영규옹이 학계에 수차례 진정하고 건의한 바 인정받은 묘이지 김삿갓 후손들에게 인증을 받았다는 기록은 알지 못한다.

 

물론 김삿갓 집안에서 이 묘의 진위여부는 쉽게 답을 구할수도 있겠지만 항간의 이야기처럼 어디엔가 명당자리에 앉았으니( 천동리 도마치 골을 지칭함) 이렇게 후대인들이 추모해 주지 않는가 하며 구차한 이야기는 필요없을 듯도 하겠지만 와석리의 김삿갓 묘에 대하여서는 논리적으로 두가지 의문의 반증을 제시한다.

 

 

평창읍 천동리 훈장 김익균(김삿갓의 子)의 족보로 보는 이야기

후세백작 2018.04.22 12:45

 

안동김씨 족보

휴암공파 24세손 난고 김병연(별호-김삿갓)과 子 익균의 족보.

 

안동김씨 병연은 순조 丁酉년에(1807년) 출생하여 癸亥년(1863)에 사망하였다.

김병연의 子 익균은 庚寅년(1830년) 생으로 甲申년(1884)년 사망하였다.

익균의 부인 반남 박씨는 丁卯생(1839)이며 癸酉년(1873)에 사망하였다.

 

김병연(김삿갓)은 김안근의 둘째 아들로 위로 병호 형이 있으며 자식으로는 학균, 익균을 두고있다.

김삿갓은 22세에 방랑을 시작하여 형의 사망소식을 접하며 집으로 돌아와 24세떄 익균을 낳았으며 익균의 형인 학균은 병호형에세 양자를 보내 익균이 후일 김삿갓 집안의 가장이 된다.

*(이하, 난고 김병연의 이름은 김삿갓으로 칭한다)

 

어느 글에 의하면 익균이 사망시 첫째 아들 택진은 나이 스물, 둘째 영진은 16세였다 한다.

김삿갓이 형 병호가 죽었다는 소문에 1차 방랑에서 돌아와 24세에 둘째 익균을 낳고 첫째인 학균은 형에게 양자를 보냈다.

 

김삿갓의 사망시(1863) 그의 아들 익균은 32세가 되며 익균은 1884년 사망한다.

그리고, 익균의 부인 반남 박씨는 익균보다 아홉살 연하로 25세때 택진을 낳고 29세에 둘째인 영진을 낳았으며 34세에 일찍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삿갓이 화순에서 사망한 후 3년이 지나 익균이 소식을 알고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이장하였다 하니

이는 익균이 35세때의 일이 되며, 또한 장남 택진의 나이 29세에 부친 익균이 사망하였기에 익균이 첫 아들을 보았슬때의 나이는 34세이므로 익균은 33세 이전에 결혼 하였을 것이다. 즉 익균이 결혼후 아들을 보고나서 화순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정황이다,

 

여기서 익균은 언제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첫째 아들 택진을 보았을때 그의 부인은 25세이니,익균은 늦장가를 간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가 결혼후 언제부터 평창 천동리에서 서당 훈장도 하면서 살았는데 그곳 일대 마지리, 천동리 등은 곡산지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곡산은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처형되었을 때 김삿갓 형제들은 노복 김성수를 따라 피신하여 서당도 다녔던 곳으로 아마, 곡산지씨 집성촌인 이곳과 연이 닿아 중매가 되어 결혼하고 정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와석리 김삿갓 살던 집>

 

와석리 골짜기에 홀로 살면서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은 그래도 연줄이 닿아야 중매도 들고 도움도 받기 쉬운 일일진데 평창 천동리로 오는데는 무엇인가 다른 인연이 있었지 않을까.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김삿갓 묘를 이곳으로 이장할하고 익균은 친구들에게 나는 원을 풀었으니 이제 죽어서도라도 아버님 아래에 묻힐 것이다고 소원같은 말을 하였기에 막상 그가 죽게되자 자식들은 어리고 친구들이 아버님곁으로 가라고 선친의 묘 아래에 장하였고 또한 두 묘의 봉분 등 형태도 비슷한 점으로 보면 같은 사람들의 일처리 같아 보인다.

 

익균이 부친 묘를 이장할 때엔 이미 천동리에는 막역한 친구들이 있었고 첫째 아들의 나이 세살이었기에 최소한 4년전엔 결혼하였을 것이다.

아마 익균이 와석리 골짜기에서 결혼을 위해 이사 나왔다면,,,그 시기는 이러한 추정 이전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근자에 이르러 안동김씨 문중에서 평창읍 천동리의 하 도마치 산속에 위치한 익균의 묘와 5m위에 똑같은 형태의 김삿갓묘(추정)를 여섯번이나 제를 지내며 다녀갔다고 한다.

 

인터넷상 어느 글에 의하면 직계 종손들은 평창을 다녀간 후 영월은 안 가겠다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김삿갓은 죽어서도 깊은 산속에 숨어 운둔하고 있음이려니와 얼마나 조심하였으면 후손들도 선조의 묘를 몰랐다가 근자에 들어 평창 천동리를 다녀가면서 선대의 묘를 다시 찾은듯 하다.

 

후손분들은 (김삿갓의 묘를 추정하는 이 글) 이전에 이미 천동리를 찾아 동네분들과도 교유하며 래왕하고 2015년 경에는 도미중인 직계 종손들도 참석하였다 한다.

 

천동리 주민들은 지금도 익균의 훈장터와 그가 살았던 생가의 위치들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으며, 누구라도 하 도마치 산속에 익균의 묘를 찾아보고 그 바로 위에 묘를 보면 150년과 130년이 지난 두 묘를 알아볼 수 있으며 또 두기의 묘는 동일한 형태로 곡장이 없이 제절은 너른 동일한 형태의 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마을 주민 지*한씨나 이*영씨가 선친들이 벌초하시던 그대로 대를 물려서 근근히 벌초를 하고 있음을 전해 들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익균은 화순에서 아버지 시신을 모시고 오기전에 이미 택진을 낳았고, 물론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다.

장지가 평창 천동리인가 영월 와석리인가는 불명확하지만,,,아마도 익균이 결혼 전후로 와석리를 떠난 듯하다.

 

김삿갓의 어느 기록서에서 보면 익균은 동네 친구들과 도돈(진바리쯤)의 선술집에서 술을 거나히 마시고 응(鷹)고개를 넘어 천동리로 오면서 섶다리를 건너는데 술이 과하게 취한 익균이 섶다리에서 미끄러저 물에 빠졌는데 친구들도 술에 취해 건지기 힘들자 동네 장정들을 부르러 갔다오니 익균은 얼어 죽었다 한다.

 

당시 익균의 친구 지*조 옹은 지금 천동리에 거주하는 지*한씨의 조부님 또는 그 친구분들의 이야기일지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 의리와 인연으로 지금까지 천동리 거주 지*한씨나 이*영씨는 하도마치의 산속에 있는 익균의 묘와 5m위에 위치한 김삿갓묘(추정)를 오늘날 까지도 벌초를 하고 있다.

 

 

*김익균은 천동리에 살았으며 이 동네 사람들에 의하면 하도마치의 산속의 묘가 익균의 묘라고 한다..

그리고, 익균은 아버지 김삿갓의 시신을 모시고 와서 이곳에 묘를 쓰면서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할일을 다 했으니 내가 죽으면 아버지 밑에 묻히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한다.

그래서 막상 익균이 사망하자 그의 동네 친구들은 '그래, 아버님 밑으로 가라' 그 아래에 장하였다 한다.

 

그런 사연을 지닌 두 기의 묘는 이제 한줌의 봉분으로 그냥 지나치기 쉬울 묘처럼 보이지만,

이 두 기의 묘는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조산 줄기의 혈 등 풍수사상은 무시되어 있으며 곡장은 없고 제절은 둥그렇게 좀 넓은듯 하며 비석도 없다.

제절의 축대는 김삿갓의 묘는 1단의 잡석으로 올렸으며 익균의 묘는 조금 경사가 더한듯 3단의 잡석 단을 올려 쌓았다. 그래서 이 두기의 묘를 보는순간 쌍둥이처럼 한 사람이 만든 것같은 느낌이 바로 든다.

 

이러한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이곳이 김삿갓 묘임에 확신은 가지만, 또한 종손분들도 선친의 묘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가 이곳을 와 보고서 알게 되었는 듯 이제 종손들이 영월은 가지 않겠다는 인테넷 제 3자의 글(방계 종친회장)도 있었지만 본 묘의 인증이 요하는 점을 고려하여 굳이 "추정"의 단서를 더하였다.

 

익균은 원래 김병연(김삿갓)의 둘째 아들인데 첫째 학균은 병연의 형 병호에게 양자들고 익균이 김병연의 대를 잇게된다. 또한 다음 항렬에서도 익균의 첫째 아들 택진은 학균에게 양자 들었으며 둘째 아들 영진이 학균의 대를 잇는다.

 

김삿갓은 대역죄인의 후손으로 노비로 끌려가는 것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익균의 둘째 아들 영진은 16세에 아버지가 타계하자 고성 건봉사에 입적하여 4년 수도후 서울 근교 절로 옮겨갔는데 그곳에서 궁중 나인이 김삿갓의 후손이란 것을 알고 고종황제에게 알현시킨다.

 

김삿갓 이야기를 좋아하던 고종은 그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대역죄인이란 족쇄를 풀어 해금시켜주고 곧바로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

 

이로서 김삿갓 가문은 이제 영어의 몸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 약 65년만에 대역죄인의 족쇄로부터 풀려난 김삿갓은 죽어서라도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은둔의 세상만이 그가 아는 세상 모습일까?.

세상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몰라보고 있는 것일까?

 

5분 드라마 "북한방랑기"로 세상사람들과 친숙해진 김삿갓.

그는 대역죄인의 후손이란 족쇄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에게 짜릿하고 통쾌하고 속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는 방랑시인으로서 지금도 세상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그는 살아 있고 그의 풍자는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방랑시인 김삿갓,

이젠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는 아들 익균의 손을 잡고 평창의 남쪽 삼방산 자락 천동리 하 도마치의 이름도 없는 산속에 깊이 은둔하여 적막강산 고요히 잠들고 있다.

 

민초를 괴롭히는 양반들을 멀리하려고 숨어 살았지만 너무 오로지 운둔한 탓이려니 아직도 그는 손자의 손에

의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나, 아니하였나.

 

 그를 노래한 민초들이나 그를 사랑한 만 백성들은 막걸리 한 병 들고 이름도 없는 그의 산을 찾아가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할까.

 

하도마치 산속에 잠들어 있는 김삿갓 부자는 흙과 풀과 나무, 그리고 돌 이외엔 아무것도 치장한게 없다.

언젠가 보니 이곳을 찾아오는 시인들이 많아진다기에 길도 없는 산 자락에 "길 안내" 표시로 어느 시인이 검정 리본 여남은 개 메달아 둔 것뿐, 그의 묘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방랑시인도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세상 사람들이 알아줄 때까지는 추정(서리)이라는 이름의 무덤으로

잠들어 있어야만 하는가, 죽어서도 끝이 없는 한, 방랑의 시인인가!

恨이 많은 김삿갓.

그는 양반을 질타하고 만 백성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지만 정작 스스로는 아직도 긴 겨울-- 冬眠中.

 

 김삿갓 계곡

 

 

'History & Human Geogra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維新回天の 風雲兒  (0) 2020.06.30
坂本 龍馬  (0) 2020.06.30
烏江과 項羽  (0) 2020.06.17
정선(旌善)아리랑  (0) 2020.06.09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0) 2020.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