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당(四溟堂)

Jimie 2020. 6. 8. 07:24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당(四溟堂)

묘향산(妙香山)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일명 휴정(休靜)이라고도 하는데, ()는 현응(玄應)이요,()는 청허자(晴虛子)로 속세에서의 속성은 최()씨였다.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 사명당(四溟堂)은 일명 송운유정(松雲惟政)이며 자는 이환(離幻)이요, 속세의 성은 임()씨로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子)였다.

두 사람은 고승으로 유명하지만 사제지간으로도 더욱 유명하여 많은 일화가 남아있다.

 

어느 날. 사명당이 스승인 서산대사와 도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묘향산(妙香山) 을 려오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축지법(縮地法)을 써서 평안도를 거쳐 황해도 경기도를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강원도에 이르렀다.

 

전번에는 자신의 수도장인 묘향산에 서산대사가 왔을 때 선녀들이 날라다 준 밥을 먹는다고 자랑하며 자신의 도술을 은근히 발휘해 보려고 했는데,그날 따라 선녀가 밥을 가져오지 않아서 하루종일 기다리다가 망신만 샀는데 서산대사가 떠나면서, "내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밥을 먹게 될 것이다." 하고 해서 헛일 삼아 기다렸더니 아닌 게 아니라 선녀들이 밥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서 사명당에게 이르기를, "제 시간에 가져오려고 했지만 천상식관(天上食管)에게 늦어도 괜찮다는 서산대사의 말씀에 따라 이제 왔소이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자신의 도술이 서산대사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그 후부터 더욱 분발하여 도술을 연마해 이제는 서산대사와 견주어 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명당은 서산대사보다 스물 셋이나 아래였으므로, 그 기백이나 패기는 서산대사보다 앞섰지만 그래도 스승 만한 제자가 없다는 말처럼 도술에 있어서는 어딘지 모르게 뒤졌다.

 

그렇다고, 사명당이 결코 도술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스승인 서산대사보다는 못했다. 사명당이 한참 도술을 걸어, 동서남북을종횡무진하고 다닐 무렵 세상에는 심심치 않는 소문이 구구했다.

그 중에서도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기상천외한 도술에 있어서,서산대사가 낫다느니 사명당이 낫다느니 소문마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지경으로 두 사람의 도술이 막상막하임을 실감케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산대사가 사명당보다 한 수위라는 세론이 지배적이었다.

 

사명당은 자신이 서산대사만 못하다는 세상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더 좀 잘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측근에 있는 여러 스님들로부터 서산대사보다는 오히려 사명당이 훨씬 나을 것이란 말이 들려오기도 해 사명당은 마음 속으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지.' 그러면서도 서산대사의 그 신출귀몰하고 신비 속에 쌓인 비법을 인정할 터라 다소 위축감도 없지 않았다.

 

'나에게도 승산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 사명당은, '이번 기회야말로 서산대사와 선의의 경쟁을 하여 천지조화를 부리는 서산대사를 천길 만 길이나 되는 궁지에 빠지게 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설레는 가슴에 비록 축지법을 쓰기는 해도 비호처럼 질주하는 것마저도 스승인 서산대사보다 더디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서산대사가 수도하고 있는 금강산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했다.

우거진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며 돌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은 태고의 신비를 더해 주었다.

 

사명당이 험준한 계곡을 축지법이 아닌 발걸음으로 오르고 있을 때, 서산대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를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돌리며 상좌승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지금 저 아래 계곡에는 묘향산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사명당이란 스님이 오고 있으니 어서 가서 모셔 오라."고 했다.

 

아무 영문을 모르는 상좌승은 깜짝 놀라며, "사명대사께서 수도하시는 묘향산과 여기 장안사는 아주 먼 거리인데 아무 전갈도 없이 올 까닭이 있겠습니까?"

상좌승의 이 같은 부정적인 태도에 서산대사는,

"" 소리와 함께 손바닥을 펴 보이며, "봐라, 저기 오고 있지 않느냐." 상좌승은 서산대사의 손바닥을 쳐다보는 순간 또 한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손바닥 안에는 사명당이 오고 있는 모습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상좌승은 몸둘 바를 모르고 곧장 사명당을 마중하려고 몇 발자국을 뛸 무렵 서산대사는 다시 상좌승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계곡을 쭉 내려가다 보면 사명당이 물을 거꾸로 몰고 올 테니 시냇물은 반드시 역류할 것이고 바로 근처에 사명당이 올 거야."

상좌승은 서산대사의 예지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너무나 자신에 찬 소리여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상좌승이 정신 없이 가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계곡의 맑은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물방울이 튀기어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침내 산모퉁이를 돌아갈 무렵 사명당이 오고 있음이 눈에 띄었다.

상좌승은 사명당 앞으로 다가가, "스님, 스님께서는 정녕 사명대사이시지요?"

 

사명당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서산대사가 마중을 보낸 상좌승임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서산대사보다 한 수 뒤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마중을 나온 상좌승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그동안 서산대사의 도술을 하는 모습을 잘 봤느냐며 근황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상좌승은 자신으로서는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신출귀몰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어느덧, 장안사에 당도하여 법당을 향하여 걷고 있을 때 서산대사께서는 법당의 돌계단을 막 내려오려던 참이었다.

사명당은 인사에 앞서 공중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생포하여 주먹 안에 넣고서 서산대사에게, "대사님, 소승이 쥐고 있는 이 참새가 죽었을까요, 아니면 살아 있을까요?" 하고 첫 질문을 가볍게 던지자,

서산대사는 껄껄 웃으면서, "손안에 쥐고 있는 새이므로 그 새의 생사는 오직 사명당에게 달려 있을 뿐이오.

왜냐하면 내가 죽었다고 할 경우에는 그 새를 그대로 날려보낼 것이고, 살았다고 하면 손을 꼭 쥐어 살생도 불사할 테니 말이오."

 

서산대사의 이와 같은 말에 사명당은 주먹 안에 있던 새를 휙 하고 허공에 날려버렸다.

 

그런데, 이젠 서산대사가 내려오던 돌계단을 다시 올라 법당에서 향을 피워놓고 문턱을 넘어서면서,

사명당에게, "여보시오 대사.내가 지금 한 발을 법당 안에 또 한발은 법당 밖에 있는데 과연 어떡하겠오.?

내가 밖으로 나갈 상이요. 아니면 법당 안으로 들어갈 상이요?" 하고 애매 모호한질문을 던졌다.

 

이를테면 방금 사명당의 새에 관한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사명대사가, '틀림없이 내가 밖으로 나올 거라고 이야기하면 안으로 들어 갈 것이고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 밖으로 나올 거라.' 고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에만 잠겨있자.

서산대사가 사명당에게, "대사무엇하시오. 답을 내려야 할게 아니요?" 하고 독촉을 하자 사명당은,내가 멀리서 왔으니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을 하는 것보다는 나와서 손님 대접을 할거란 생각에,

", 대사님. 지금 법당 밖으로 나오시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고 답을 던졌다. 그 말을 해놓고도 서산대사가 '아니요, 나는 법당에 볼일이 있어 다시 들어 갈 겁니다.' 한다면 큰 낭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역시 스승답게, "그렇소! 대사가 묘향산에서 예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손님대접을 하기 위해서 나가야지요." 하고는 돌계단을 내려왔다.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그 같은 너그러운 마음에 고마운 생각을 가지면서,서산대사와 정중한 예의를 나눈 뒤 자신이 묘향산에서 이곳까지오게 된 연유를 설명하고쉬어가는것도 좋겠지요~~^^

 

금강산 장안사

 

유정 (惟政) --

출생 1544(중종 39), 경남 밀양 무안면 고라리

사망 1610(광해군 2)  

 

'사명당 의승병 기념관'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불교승려였지만 승병장이나 외교가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1559년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고 3년 뒤 승과에 합격했다.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보현사로 휴정을 찾아가 수행에 정진했고,

 

1581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에서 진리를 깨닫고 오대산 영감사에 머물렀다.

 

의승도대장으로 1593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4차례 협상회담에 참여했으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1604년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어 1605년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16108월 입적했다.

 

四溟堂

 

본관은 풍천(豊川).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峰). 아버지는 수성(守成)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사략 史略을 배웠으며,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명종 13), 14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에게서 전등록 傳燈錄을 배웠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많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는데, 특히 20세 연상인 박순(朴淳)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자주 토론하며 가까이 지냈다.

 

또 당시 재상이던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장자·문자 文子·열자 列子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1575(선조 8)에 선종 승려의 여론에 의해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수행에 정진했다.

 

1578년에 휴정에게 하직하고 보덕사(普德寺)로 가서 3년간 머문 후 1581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진리를 깨닫고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당했다가, 강릉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기응변으로 인근 9개 촌락의 백성을 구출했으며,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그해 3월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받았다.

 

15944월부터 15973월 사이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4차례 협상회담에 참여했다.

1595년에는 장편의 상소문을 올려 전쟁에 대비하여 국력을 충실히 하는 방책을 건의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승려로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여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왕명을 받고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6054월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찾아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고 한다.

 

묘향산으로 가서 휴정의 영정을 참배한 다음 원주 치악산에 머물렀다.

그후 병이 들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던 중 16108월에 입적했다.

 

그는 휴정의 4대 제자의 하나였지만, 불교승려로서의 독창적이며 체계화된 사상은 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병장(僧兵將)이나 외교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부국강병책을 건의하여 중농정책의 실시, 인물본위의 관리채용, 탐관오리 숙청, 민력(民力)의 무장, 산성축조, 무기제조, 군량미 비축 등을 강조했다.

 

특히 불교억압책으로 인하여 몰락한 승려의 사회적 신분을 일반민과 같이 해줄 것을 건의했다.

임진왜란중에 이미 가토와 4차례의 회담을 가진 바 있는 그는 난이 끝난 직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성공적인 강화를 맺고 귀국했으며, 입적하기 직전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종의지(宗義智)에게 우호를 강조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시문에 능하여 저술이 많았으나 임진왜란 때 거의 불타버렸고, 사명대사집 四溟大師集7권과 분충서난록 奮忠紓難錄1, 기타 상소문·발문(跋文서장(書狀) 등이 전한다.

 

문도들이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탑과 비를 세웠다. 밀양 표충사(表忠祠),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홍제암(弘濟庵) , 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 석장비(慈通弘濟尊者 四溟大師 石藏碑) 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四溟大師) 부도(浮屠:보물 제1301호)

 

 

표충각(表忠閣)과 표충비각(表忠碑閣)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 홍제사(홍제암)

표충비는 1738년(영조 14) 사명당의 제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세운 비석이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앞면에는 사명당의 행장인 <송설대사비명(松雪大師碑銘)>이,

뒷면에는 스승 서산대사의 행장인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이 새겨져 있다.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 땀흘리는 비로 유명한 '사명대사의 땀흘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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