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s...

韓美 정상회담을 中에 보고하라? 그들을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Jimie 2021. 5. 30. 11:38

韓美 정상회담을 中에 보고하라? 그들을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남한산성’으로 본
한·미·중 국제정치학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05.29 03:00

 

일러스트=안병현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향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발이 묶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게 되었다. 갇힌 조선은 성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항복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이고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농성하고 역전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주전파가 대립한 것이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은 그 광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주화파의 대표인 최명길(이병헌 분)은 말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이자는 입장이다. 반면 김상헌(김윤석 분)은 임금이 오랑캐에게 굽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막강한 적의 군대가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일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은 그저 허황될 뿐.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내부의 갈등과 반란을 다스리지 못해 무너졌다. 천하의 패권은 청나라로 넘어갔다. 그 격동기에 조선은 새로운 흐름에 올라타는 대신 기존의 낡은 세계관 속에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일방적으로 주전파를 비난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각자의 논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당시는 국운이 쇠했을지언정 아직 명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조선왕조는 명나라 황제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처럼 내려오는 유교적 위계질서를 통치 근거로 삼았다. 갑자기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집권 정당성을 부정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런 맥락을 놓고 보자면 김상헌의 주전론에는 나름의 이념적 근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학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최명길은 현실주의를 대변하고 있던 반면, 김상헌은 자유주의를 표방한 셈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착한 국제정치학은 크게 세 가지의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 국가와 국제 관계를 힘(power)으로 바라보고 설명하는 현실주의(realism). 국가 간의 공동 이익 창출과 상호 협력에 주목하며, 특히 ‘제도’를 통해 상호 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자유주의(liberalism). 국제 관계뿐 아니라 각국의 내부 동역학까지 고려하며 다양한 맥락을 따지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는 케네스 월츠, 존 미어샤이머 등이 있다. 이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전제 몇 개를 공유한다. 국가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언제 침략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늘 안고 있다. 국제 관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소는 결국 힘이다. 국제사회에 정의(正義)란 없다. 억울하고 분해도 약자는 강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 병자호란의 위기 속에서 최명길이 택한 입장이기도 하다.

 

반면 조셉 나이, 로버트 코헤인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물론 국제 관계는 힘으로 작동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가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 있다. 문화와 가치를 공유한다면 그러한 협력은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 간 합의를 통해 제도를 구축하여 장기적인 공존 공영을 꾀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일종의 국제기구로 바라본다면 이는 김상헌을 비롯한 주전파의 세계관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셈이다. 유교의 종주국인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향해서는 사대를 할 수 없다는 입장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명·청 교체기에 오늘날을 곧장 대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국은 마치 명나라처럼 저물어가는 제국이며, 중국은 청나라처럼 떠오르고 있으니, 처신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총수출액 중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은 25.8%로 1위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무역 보복을 할 수 있으니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보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21세기 주화론자들의 주장이다.

 

이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 우리가 중국에 수출하는 물량의 절반 이상은 소재·부품이다. 특히 반도체의 비율이 높다. 중국에서는 한국이 싫어도 수입할 수밖에 없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상대가 무역 보복을 할까 두려워 할 말을 못 한다는 변명도 옹색하기 짝이 없다.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이 32%에 달할 정도지만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쿼드에 가입한 호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다. 한미 동맹을 공고하게 다져나가는 것은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핵심적인 가치를 공유한다. 동북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대중문화를 모두 갖춘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뿐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 노병의 삶이 조용히 웅변하는 진실을 보라. 미국은 강자고 한국은 약자다. 하지만 한미 관계는 오직 힘의 논리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돕기 위해 피 흘리고 싸운 혈맹이다. 현실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우방이 누구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이 정치권에는 더러 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린 내용만 봐도 그렇다. “문 대통령 귀국 길에 주요 수행원 중 한 사람은 중국에 들러 회담과 관련해서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중국의 속국인가?

현실의 힘에 굴복할 것인가, 기존의 신념에 충실할 것인가. <남한산성>이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그때와 같지 않다. 현실주의적으로 힘을 추종하건, 자유주의적으로 가치와 제도에 신뢰를 보내건, 우리가 갈 길은 정해져 있다. 그 사실을 끝내 부정하고자 하는 자들을 흔히 사대주의자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