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노(老) 정객이 남긴 말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 예비후보들을 청와대로 초청, 북한의 핵개발 대책에 대한 간담회를 갖기에 앞서 이한동 후보와 악수를 하고 있다. 뒤로 노무현 당시 후보도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조가 신하들에게 내린 신선로에는 노란 계란전, 검은 버섯전, 파란 파전, 붉은 당근전의 4색 전이 들어 있었다. 관료들이 서로 공식(共食)하며 화합을 다지라는 의미로 내린 음식이었다. 비빔밥도 이질적 재료들이 조화를 이뤄 최고의 영양가를 내는 음식이다. 8일 별세한 이한동 전 총리가 회고록 ‘정치는 중업이다’에서 남긴 말이다. 그의 눈에 신선로 정치, 비빔밥 정치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지역주의였다.
□ 화합, 통합의 가장 큰 장애물을 걷어내려던 그가 1992년 14대 총선 때 중부권 역할론을 들고나왔다. 물론 경상도는 경상도대로, 전라도는 전라도대로, 충청도는 충청도대로 뭉치니 경기 인천 강원이 뭉치자는 감정적 동기가 출발이었다. 나중에는 차기 지도자는 동서가 아닌 지역, 가장 중도적이고 중립적인 중부권에서 나와야 한다는 ‘신중부권 통합론’으로 발전했다. 서울 경기 인천만 해도 2,500만 명인데 이들이 ‘고향 땅 찾아가는 투표’를 지양하고, 지역감정을 거중 조정하는 취지였다. 이제 그와 함께 잊힐 통합론이겠지만 그렇다고 노(老) 정객의 우려가 해소된 건 아니다.
□ 지난 30년간 대권 구도는 3 대 3으로 균형을 이뤘다고 그는 봤다. 지역등권론 속에 영남이 지지한 대통령과 호남이 지지한 대통령이 3명씩 나왔다는 얘기다. 그런 입장에서 지역등권론은 또 다른 지역할거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 지역주의는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지만, 이를 대신한 이념은 지역과 중첩되고, 영호남 지지후보가 상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당대표 선거에 나선 국민의힘에서 벌어지는 ‘영남당으론 안 된다’ ‘수도권에 30%나 되는 영남 표심을 버릴 거냐’는 논란에서도 지역주의는 아직 살아 있다.
□ 논란을 예견한 듯 생전의 이 전 총리는 “보수만 해도 특정 지역정당 내지 지역 세력에서 탈피해 전국 정당, 전국 세력으로 가치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한편으로 그는 40년 정치인생에서 최고의 깨달음은 중업(重業)이라고 했다. 정치인은 아무나 함부로,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을 위해 취할 직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아름다운 멍에를 짊어진 이가 돈과 명예를 탐한다면 결국에는 불행해진다는 말도 누구든 한번쯤은 새겨야 할 옥조다.
이태규 논설위원 tglee@hankookilbo.com
'보수의 거목' 이한동 지다...민정당· 자민련 거쳐 DJ 정부 총리까지
입력 2021.05.08 19:00 수정 2021.05.09 18:47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2015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 화보집 출판 기념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태우 정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에 이어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와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지낸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5공 군사정권 시절 정치권에 입문해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金) 시대'까지 정치적 격변기의 한복판에서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협치를 강조했던 보수 진영의 리더였다.
1934년 경기 포천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이 전 총리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1963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용됐다. 이후 변호사와 검사로 활동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1년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전 총리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 줄곧 보수정당에 몸담으며 당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1년 11대 총선에서 고향인 경기 연천·포천·가평에서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단 뒤, 2000년 16대 총선까지 내리 당선돼 6선을 지냈다. 민정당 소속으로 사무총장과 원내총무(원내대표), 정책위의장 등 '당 3역'을 두루 맡으며 정치력을 뽐냈다. 야당과의 관계에서도 협상을 앞세웠지만 결정을 내릴 때는 단호해 '단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 통합의 정신을 강조하는 '해불양수'(海不讓水·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가 좌우명이었다.
이한동(앞줄 맨 오른쪽) 전 총리가 민주자유당 원내총무를 지내던 1994년 4월 국회에 출석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전 총리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12월부터 1989년 7월까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97년 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당시 '9룡'으로 불리던 대선주자 9명 중에서 이회창 이인제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1999년 이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와 'DJP연합'을 꾸렸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다. 이후 2000년 6월부터 2002년 7월까지 국무총리로 재직했다. 2000년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후 인사청문회를 거친 최초의 국무총리였다.
이 전 총리는 DJP연합이 해체 수순에 접어들던 2001년 9월 "당보다는 국가와 국민 우선이라는 평소 소신에 따른 것"이라며 총리직 잔류를 결정했다. 자민련에서 제명된 이 전 총리는 2002년 재차 대선에 도전했지만 낙선한 후 2004년 자민련에 복당한다. 이후 그는 보수정당 원로로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2012년엔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각각 지지해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탰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8일 이 전 총리 별세 소식에 애도의 뜻을 밝혔다. 고용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통 큰 정치를 보여준 '거목'인 이 전 총리의 영면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김예령 국민의힘 대변인도 논평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인 이 전 총리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가 9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한동 전 국무총리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튿날 빈소에는 정계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청와대에서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이 조문했고,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빈소를 찾았다. 유 실장은 "대통령을 대신해 우리나라 정치에서 통합의 큰 흔적을 남기고 지도력을 발휘한 이 전 총리를 기리고,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남숙씨, 아들 이용모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 딸 지원·정원씨, 사위 허태수 GS그룹 회장과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 건국대병원, 발인은 11일 오전이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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