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룡[崔戊龍 본명 최한련(崔漢連)]영화배우
도무사 추천 0 조회 3,094 06.07.04 11:05
* 아래는 1988년에 최무룡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일간 신문에 연재했던 자서전에서 발췌한 것임.
양 력: 1928년 3월 16일 10:00 최무룡
음/평: 1928년 2월 25일 10:00 남자
시 일 월 년
辛 乙 乙 戊
巳 卯 卯 辰
甲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대운: 순행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辰
86 76 66 56 46 36 26 16 6.10
대운 시작: 6세 10월 5일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1남 3녀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무룡(戊龍)이란 이름은 내가 태어난 해가 1928년 무진(戊辰)년이어서 무진해에 태어난 용처럼 등천하란 의미에서 지어졌다.
아버님은 임진강에 배를 한척 갖고 중국대륙과 콩무역을 하는 선주겸, 곡물도매업자였다. 나의 어린시절은 유복했고 평온했던 편이다. 예쁜 용모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귀염도 꽤 받았다.
1940년 -- 문산 소학교를 졸업하고 당시로서는 입학이 쉽지 않던 개성 상업학교에 진학. 개성상업은 도생 (경기도 상업고등학교) 숭실상업학교 와 함께 3대 명문의 상업학교의 하나였음.
1945년 -- 봄에 개성상업하교를 졸업 인본인 선생이 상업은행본점으로 추천, 은행원으로 취직시켜 주었음. 행원으로 일제 말기를 넘김. 해방 후 11월에 은행에 사표를 내고 낙향.문산금융조합에 적을 두고 대학 입시를 준비. 고향에서 보낸 그 1년 동안 평생직업이 된 연극과 조우하게 됨.
1946년 -- 연극을 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 설득문제로 봄에 경성 법학 전문학교(경성법전)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음.
1947년 -- 경성법전 2학년으로 국대안(國大案) 반대 운동에 앞장섬. 희곡 연습 중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당함.
1948년 -- 중앙대 1학년으로 전학하여 연극반을 모아 본격적으로 연극운동을 주도함. <햄릿>을 시공관에서 공연하여 성공함.
1949년 -- 햄릿 공연의 성공으로 연기와 함께 발성을 인정받아 중앙 방송국의 성우로 특채됨. 1기 전속 성우모집이 끝난 후에 특채로 뽑힌 것임. 성우시절 <산 넘어 바다 건너><동심초><어느 하늘아래>등을 방송함.
1950년 -- 시공관에서 청막극회(당시 인기 작가이던 조남사씨가 성우를 중심으로 만든 극회)가 마르셀.파뇰의 <마리우스>를 공연함. 625로 풍지박산 남. 적치하에 있던 조남사씨가 어디서 만들어온 <동맹증>으로 조남사씨등 일행과 함께 파주로 내려가 9.28수복 때까지 숨어 지낼수 있었음.
1951년 -- 1.4 후퇴와 함께 대구로 내려가 정훈대대에 입대함. 당시 정훈대대엔 모두 3소대가 있어 1소대는 연극, 2소대는 악극, 3소대는 무용을 담당했는데 1소대 연극반은 극단 신협이 맡고 있음. 장민호, 오사랑, 박암, 장일호(영화감독) 박상호(영화감독) 황정순 유계선(이대엽 의원의 장모) 문정숙씨등이 당시 신협의 주축멤버였음. 이를 계기로 학생극 연기자에서 프로 연기자로 입문한 셈이 됐음. 이북의 소위 국립극장에서 활약했던 배우 강효실(당시 20세, 백조 악극단의 여주인이자 눈물의 여왕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전옥씨의 딸)이 1.4후퇴와 함께 내려와 만나게 됨.
1952년 -- 군에서 홍보용으로 만든 영화 <탁류>로 영화에 데뷔. 부산의 LCI (미 해군 함정을 개조한 연회장)에서 강효실과 결혼식을 올림, 이후 장모의 도움을 많이 받음.
첫 번 제작한 본격 멜러물 <유전의 애수>가 흥행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돈도 별로 건지지 못했음. 첫 번째 제작부터 실패를 맛봄. 무척 많은 제작비를 들인 <잃어버린 청춘>은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계산에 실패한 첫 케이스. 지방 장사에 실패한 때문. 이때부터 빚에 쫒기는 삶이 시작됨.
1957년 -- 후암동에 처음으로 단층양옥집을 마련하고 첫딸 현숙이를 출산함. 이후 이혼할 때까지 1남 3녀를 출산함.
1958년 -- 김지미 19세로 영화계에 데뷔함.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혜성같이 나타난 김지미는 그해 겨울 30대 후반의 노총각 홍성기 감독과 전격 결혼함.
1959년 --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편수가 23편에 이를 정도로 당시 가장 잘 팔리는 배우였음.
1962년 -- 1962년 3월 26일 아들 최민수 출생함. 3월 1일 김지미 홍성기 감독과 합의 이혼 함, 3월에 한중합작영화 <손오공>의 홍콩로케 때 김지미와 첫 관계를 가짐, 11월 간통죄로 서울교도소에 수감됨. 6월에 기자들은 홍감독과 지미의 이혼을 보도하면서 '미남배우 최모군'이 이들 이혼과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보도하기 시작함. 장모 전옥은 계속 강효실에게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할 것을 종용. 62년 10월 31일 밤 10시쯤. 구속영장이 발부됨. 11월 간통죄로 서울교도소에 수감됨. 김지미의 집과 본인의 집을 위자료로 주고 풀려남. 집이 없어 당분간 장동휘씨 집에 기식하게 됐고 김지미는 친척집에 신세를 지게 됐음. 얼마 후 단칸 월세방에서 김지미와 궁색한 새살림을 시작했음.
1963년 -- 봄에 미아리고개 마루턱에 아담한 양옥집을 전세 얻어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됐음. 63년 7월 첫 아들 출생, 7개월 3일만에 태어난 이 사내아이는 체중이 1천4백 그램의 조산아였음. 얼마 후 폐렴으로 사망함.
1964년 -- 9월 두 번 째 아들(애칭-돼지) 출생.
1966년 -- 봄 한일합작영화 <고안(孤雁)>을 촬영차 지방업자들로부터 선금을 챙겨 배우는 물론 촬영, 조명기사까지 대동하고 일본 현지로케에 나섬. 4개월간 일본에 머물며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문공부장관명의로 된 '촬영중지 요청'공문이 날아왔음. 나는 이 작품에 北村菊子등 일본의 인기배우 5명을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했는데 일본 배우가 출연한 영화는 상영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임. 이 영화는 엄청난 제작비만을 삼킨 채 3년여를 질질 끌다 끝내 불발로 사장되고 말았음. 당시 김지미의 출연료가 1백만 원 일 때 빚이 3천만 원을 넘어섰음. 이자도 산더미같이 불어났음.
1967년 -- 2월엔 막내딸이자 김지미와의 사이에 유일한 혈육이 된 윤영(애칭-밍크)이 태어났음.
1969년 -- 두 번째 아들이 심한 화상을 입고 사망함. 돈암동 전세집에서 살 때의 사건임. 69년 6월 10일 아침에 가자들 앞에서 김지미와의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고 이혼을 발표함. 정릉의 대저택을 떠나 옮겨간 곳은 후암동의 토굴집이었음. 움막처럼 흙을 파고 지은 집임. 노모를 모시고 네 아이들과 함께 후암동 토굴집을 찾아들 때의 심정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음.
1970년 -- 20편의 영화에 출연함,
1971년 -- 31편의 영화에 출연함.
1972년 -- 10편의 영화에 출연함.
1973년 -- 3월 재미교포 위문차 하와이로 출국함. 머리를 식히기 위해 미주 공연을 다녀온 73년부터 다시 미국으로 들어간 76년까지 내가 출연한 영화는 10여 편에 불과함. 영화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데는 영협연기분과 위원회가 73년 3월 영화배우의 TV출연 및 유흥업소 출연을 금지하기로 결의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음.
1976년 -- 다시 영화제작을 하겠다고 문공부에 영화사설립신청을 냈음. 영화사 설립신청은 문공부에 의해 거절됐음. 이 사건은 도미(度美)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어주었음. 9월에 하와이 후지 TV가 순회공연을 제의하여 하와이 공연을 떠남, 공연이 끝난 후 일행이 귀국한 후에도 그냥 하와이에 머물렀음. 체류할 근거를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체류시한인 6개월을 넘어버렸음. 이때 한 교포여인으로 도움을 받음. 위장결혼을 함. 이 여자가 세 번째로 호적에 오른 아내임. 비자문제가 해결된 후 바로 샌프란시스코로 떠남.
1977년 -- 뉴욕으로 이주함, 브로드웨이 34번가에 그간 저축한 돈으로 건물을 세내 <브로드웨이 클럽>을 열었음.
1981년 -- 출국 5년만인 3월 21일 아침 8시 모친의 위독한 병환으로 귀국함, 모친은 도착 당일 새벽 3세에 77세로 별세함.
1982년 -- 5월에 S그룹 창업주의 미망인과 결혼함. 살림집인 77평형 워커힐 아파트를 월간지등 매스컴에 공개함. 이 부인이 마지막 빚 1억원을 해결해 줌. 1982년에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위원장과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앗음.
1983년 -- <자유부인>의 성공으로 영화계에 복귀함,
전경환의 새마을 본부측과 <이 한몸 돌이 되어>를 제작함, 영화엔 전경환의 새마을 본부측에서 내놓은 2억 5천만원, 본인이 사채로 끌어들인 1억 5천만원 총 4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됨. 2년에 걸친 긴 여정이 끝나고 마침내 '이 한몸 돌이 되어'의 완성품시사회가 열렸음. 그러나 흥행은 참패였음. 어용영화는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어용일 뿐이었음. 게다가 새마을본부측은 사전에 언약했던 관객동원약속을 지키지 않았음. 새마을요원과 예비군교육용으로도 활용되지 못했음.
1984년 -- S그룹 창업주의 미망인과 S그룹의 내부 사정과 개인 사정으로 별거를 결정하고 짐을 싸들고 2년여 정들며 살던 광장동 워커힐아파트를 떠났음. 그로부터 시작된 별거는 3년여를 끌었음. 이혼수속을 밟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계기도 없었기 때문임.
<종녀(種女)>라는 작품을 선택하여 제작하였으나 이번엔 공연윤리위원회란 문턱에 걸려 넘어짐. 부분적으로 11개 항을 개작하라는 것이었는데 내용적으로는 전면개작지시나 마찬가지였음.
<덫>은 시나리오부터 제작, 감독, 주연까지 모두 나혼자 1인 4역을 해낸 작품임. 물론 돈도 많이 들었고 나의 에너지를 많이 뺏어간 작품이지만 흥행에는 실패, 궁지에 빠진 나를 더욱 수렁으로 끌어들였음. 어쩌면 <덫>은 실패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종녀>의 공륜반려로 창졸지간에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임. 그러나 <덫>은 내 나름대로 이 시대의 한을 담아 보려한 작품이었음. 당시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한국적 영화상황이 저주스러웠음.
1988년 -- 13대 총선의 선거날을 만 20일 앞둔 지난 4월 6일 하오 4시 30분께 공화당 김종필 총재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왔음. 공천을 통보하는 전화였음.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서 출마함, 5월 27일 새벽, 3만 4천 2백 19표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가 확정되어 정계로 진출함. 당시 집이 없어 양훈씨 집에 방 한 칸에 기거하고 있었음.
1993년 ~ 1994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1995년 -- 우리영상사업단 이사장 등을 지냄.
1999년 -- 4월 대종상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영화발전 공로상'을 받았음.
1999년 -- 11월 11일 사망함, 보관문화훈장(寶冠文化勳章)이 추서되었음.
다음은 1988년의 가족 상황임.
큰딸 현숙(32)은 하와이로 시집가 지난 5월 둘째딸을 낳았으며
둘째딸 예숙(30)은 서울에서 아들 하나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막내딸 연숙(28)은 기독교선교활동에 투신해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비록 시집은 안 갔지만 나름대로 삶의 보람을 찾으려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외아들 민수(26)는 아버지의 대를 잇겠다며 연기생활에 혼신의 힘을 바치고 있다.
밑으로 두 아이는 이미 밝혔듯 김지미와 나의 가슴에 못을 박고 일찌기 유명을 달리했다.
막내딸 밍크(21)는 김지미의 보살핌 속에 예쁘게 자라 LA에서 유학생활 중이다.
도무사 첫댓글 06.07.02 17:10
이분이 출연한 영화가 약 500편이라 함.... 한때 정말 잘나가던 배우였음... 영화제작에 손대면서부터... 빚에 쪼들려 일생을 빚 속에서 살았던 인생... 비견, 겁재가 중중하니... 재를 극하여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처를 극하여... 혼인신고만 4번....4번 다 헤어지고... 재물을 극하니... 일생 빚에 시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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