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로 1929 김연실 원창 ✔
영화 暗路 1929.01.29 암로 주제가
金曙汀김서정 작사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mFTDGBnLadU
노래/ 金蓮實 (1910~1997)/(1929년 빅타레코-드 취입)
< 1 >
숩 사이 시내물 흐르는데 閑暇한 물네방아
아름다운 大自然 속에 내 몸은 자랏네
내 사랑 어린 몸을 이 어린 나를
부드러운 그 품안에 껴안아 주서요
< 2 >
흐르는 달 아래 散步할 제 따뜻한 그의 손길
櫻桃가튼그 입슬은 내 눈에 그렷네
내 사랑 어린 몸을 이 어린 나를
부드러운 그 품안에 껴안아 주서요
< 3 >
十五夜 두렷한 저 달 아래 쌍々이 노는 물새
아름다운 그 노래 속에 내 맘은 傷해요
내 사랑 어린 몸을 이 어린 나를
부드러운 그 품안에 껴안아 주서요
< 4 >
世上을 떠나는 그날까지 조곰도 변치 않고
어린 넋을 당신에게 밧치려 함니다
내 사랑 어린 몸을 이 어린 나를
부드러운 그 품안에 껴안아 주서요
일제 강점기 1930년대 이전에는 전문적인 가수가 없어서 노래는 명창이나 명기들에 의해 불려졌고 1930년대 초반에도 배우들이 부르기도 하였다.
暗路(어두운 길)은 1929년 영화 暗路의 주제가로 1929년 김서정(金曙汀) 작사.작곡으로 1930년 김연실(金蓮實)이 불렀는데 그 후 후배 가수 고복수, 신카나리아 등이 리메이크 음반을 냈다.
*김서정(金曙汀, 1898~1936): 1920~30년대 당시 무성영화 최고의 변사로 활약하였던 김영환(金永煥)의 필명,
-주요작품: 낙화유수, 암로, 세동무, 봄노래, 강남제비 등.
원래 연극배우였고 후에 영화배우로서 이름을 떨쳤던 김연실 (金蓮實)은 고운 몸매, 단아한 용모, 초롱초롱한 눈매의 미녀로 그의 노래는 청중들을 도취하게 했다. 그는 활동사진 '낙화유수'와 '세동무'의 주제가를 불러 이름을 떨쳤다. '낙화유수'(일명 '강남달')는 짜릿한 민족감정이 연모의 노래로 위장되어 있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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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실( 金蓮實 경기 수원 1911-1997) : 친일, 공산귀족, 최은희의 손윗 시누이
김연실은 1910년 12월 29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여자보통학교를 마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관료(평북 성진 군수와 해주 군수 역임)였던 김연식이다.
김연실(金蓮實 경기 수원)은: 1927년 18세의 나이에 오빠의 소개로 나운규 프로덕션 영화 <잘 있거라>에 시골 소녀로 출연한 뒤 1935년 까지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여 유명 배우가 되었다.
- 영화출연: 세동무(삼걸인 1928) , 화륜(1931),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림꺽정(1987-1989, 해방후 월북),
- 주요 취입곡: 암로(暗路 1929), 세 동무(콜럼비아 레코드 1930.3)
6.25 전쟁때 남편 김혜일과 월북하여 김연실은 국립영화촬영소 소속으로 연기 활동을 재개했고 김혜일도 촬영 소에 소속되어 영화미술을 맡게 되었다. 1997년 사망(향년 87세)
*김연실의 남동생 김학성도 나운규 프로덕션에서 촬영기술을 배워 기사가 되었으며 후일 배우 최은희(崔銀姬) 와 결혼하여 첫 남편이 된다. * 최은희 ( 본명최경순, 崔慶順)
대중가요(大衆歌謠) 1세기(1)
우리 국민들이 즐겨 불러온 대중가요는 그때그때의 시대상황을 잘 나타나고 있다.
대중가요를 통하여 일반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도 있고 그때의 사회상과 나라가 처한 역경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대중가요의 시원은 일제강점기로 보는 것은 대체로 동의하는 입장이다.
1925년 11월에 발매한 “조선소리판”이라는 레코드에 당시에 유행하던 일본유행가를 처음으로 한국말로 부른 노래
<시들은 방초>[원제 선두소패(原題는 船頭小唄)]를 취입한 사람은 도월색(都月色)이었고,
<장한몽(長恨夢)>[원제 금색야차(原題는 金色夜叉)]을 김산월(金山月)이 불렀다.
당시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한 사람들은 당대의 명창․ 명기들이었다.
도월색․ 김산월도 이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가요를 전문적으로 부르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요를 노래하는 본격적인 가수의 등장은 1930년대 이후다.
가요음반이 대중의 기호물이 되면서 연극배우들 중에서 “막간무대”에 등장했던 1935~1936년까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때 배우로서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전옥(全玉) ․ 복혜숙(卜惠淑) ․ 김선초(金仙草) ․ 김선영(金鮮英) ․
남궁선(南宮仙) ․ 강홍식(姜弘植) ․ 나품심(羅品心) ․ 강석연(姜石燕) ․ 이애리수(李愛利秀) ․ 윤심덕(尹心悳) ․ 김연실(金蓮實) 등이다.
1932년 신인가수 발굴경연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고복수(高福壽)가
1933년 OK레코드사에서 취입한 손목인(孫牧人) 곡의 <타향살이> <사막의 한> (이상 孫牧人 작곡)이
히트하여 레코드 가수로서 성공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순수한 창작 가요는 1929년 김서정(金曙汀) 작곡인 <낙화유수>(이정숙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27년에 상영된 극영화<낙화유수>의 주제가였다.
이 노래를 작곡한 김서정(본명 김영환)은 당시 영화해설자(변사)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는 계속해서 <세동무> <강남제비> <봄노래> 등을 발표하여 인기가요로 손꼽히게 되었다.
1932년에는 전수린(全壽麟)이 <황성옛터> (이애리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이러한 가요의 계열이 한국적인 가요의 맥락을 이어왔다.
초창기의 창작 가요는 대부분 신민요 풍의 가요가 특징으로 나타났는데,
<오동나무> <봄맞이> <노들강변> <능수버들> <맹꽁이타령> <대한팔경>
<노다지타령> <피리소리> <장기타령> 등은 널리 알려진 가요들이다.
1928~1936년 사이에 콜럼비아. 빅타. 포리돌. OK. 태평. 시에론. 리갈 등
각 레코드사들이 레코드 제작을 본격화하면서 1936년을 전후하여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축음기 판매를 중심으로 레코드의 범주도 다양해졌다.
곧 판소리. 민요. 가곡. 동요. 극영화해설집. 드라마. 만담. 경음악(주로 미국의 재즈. 팝송. 찬송가)과
서양 고전 음악 등 다양해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대중가요가 레코드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취입에서 제품까지 대부분 일본에서 하였고, 서울에서의 취입과 프레스 등 일반 작업시설의 확장은 1940년 이후였다.
1931년 일본의 유행가 (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채규업(蔡奎燁)이 한국말로 취입하여 히트하자,
일본가요의 인기곡은 대개 한국말로 취입되어 한국어판 일본의 엔카[연가(演歌)]가 판을 치게 되었다.
한국의 가요(창작가요)도 일본에서의 녹음과정에서 일본인이 편곡하는 것이 상례였다.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우리의 가요가 태동한 것은 1920년대 중반으로 시작한지 근 100여년이 경과되었다.
우리의 주권을 강탈당하였던 암울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10여년이 지난 1930년대 중반에는 황금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대중음악이 흘러온 발자치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문화적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서 맥을 이어왔다는데 경이를 표하고 싶다.
2016년 03월 31일(목요일)
夢室에서 김광수
[출처] 대중가요(大衆歌謠) 1세기|작성자 더 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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