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성주 용암면 대명마을 대명단과 풍천재

Jimie 2024. 5. 12. 06:54

류지미 2023. 7. 30. 20:13

 

명나라 장수는 슬프다, 400년이나 지났는데

경북 성주 용암면 대명마을 대명단과 풍천재, 시문용과 서학이 남긴 임진왜란 유적

16.04.05 16:43l최종 업데이트 16.04.05 16:44l
 
오마이뉴스2016.04.05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파병되었다가 종전 이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산 시문용, 서학을 기리는 풍천재가 있는 경북 성주군 용암면 문명2리(대명마을)의 모습.

ⓒ 정만진



풍천재(風泉齋)는 시문용(施文用)과 서학(徐鶴)을 기려 세워진 재실이다. <성주 누정록>(성주문화원)은 풍천재의 주소를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1622번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포털에서 검색하면 그런 번지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풍천재의 실제 주소는 문명리 1258번지이다. 도로명 주소로는 문명1길 198-6이 풍천재가 있는 지점이다. 글의 첫머리를 이렇게 번지 논란으로 시작하는 것은 성주문화원의 오기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풍천재가 깊고 한적한 산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주의 주련>(성주향토사연구회)에 실려 있는 '성주군 용암면 문명2리(대명동마을)' 주소만 들고 풍천재를 찾아 떠나는 것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에 견줄 정도로 무모한 도전이다. 용암면 일대의 지리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지역민 외에는 아주 궁벽한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문명2리를 좀처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찾기 어려운 풍천재, 왜 이런 오지에 세워졌을까?

풍천재는 어째서 이토록 깊은 오지에 건축되었을까? 아니, 풍천재에 모셔진 시문용과 서학은 무슨 연유에서 이렇게 으슥한 산골로 들어와 살았을까? 21세기 현대에 자동차를 몰고도 찾기 힘든 이곳을 왜 두 사람은 400년 전인 16세기 초에 거주지로 선택하였을까?
 
 
  서학과 시문용을 기려 세워진 유허비가 풍천재 입구에 나란히 서 있다. 왼쪽이 서학 유허비이다.
ⓒ 정만진


'대명동마을'이라는 별칭에서 그 해답을 찾아본다. '대구 남구 대명동과 어원이 같은 마을이름인가?' 하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둘째 글자, '명'은 명나라를 뜻하고, 대명동(大明洞)은 임진왜란 후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은 중국 장수가 거주한 마을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상상인 듯하다. 대구 대명동은 종전 후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이 살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지만, 위치면에서 성주 용암 대명동과 비교가 안 된다. 대명동은 대구광역시 195개 법정동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동이다.

두사충은 대구 중에서도 가장 번화가에 살았는데

뿐만 아니라, 두사충은 대구에 처음 집터를 잡을 때 대구읍성의 동문과 북문 사이, 지금의 경삼감영공원 자리를 점찍었다. 그 후에는 대구읍성 정문(영남제일관)의 바로 오른쪽 번화가인 계산동에 살았다.

멀리 앞산 아래 대명동까지 갈 생각은 아예 없었고, 최고 중심부에서만 거주했다. 천병(天兵) 장수가 무엇 때문에 성주 용암 대명동 같은 산골로 찾아들어 숨을 죽이고 살 것인가! 아무튼 <성주 누정록>의 풍천재 해설을 읽어본다.
 
 
  시문용과 서학을 기리는 풍천재
ⓒ 정만진


'풍천재는 중국 명나라 절강성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파병되었다가 귀화한 서학과 시문용을 추모하여 1834년(순조 34) 사림에서 건립한 재실이다. 건물은 용암면 문명리 대명동의 마을 뒤편 산기슭 아래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중앙에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며,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다듬은 화강석을 쌓은 기단(받침대) 위에 자연석 초석(받침돌)을 놓고 건물 전면(앞면)의 주열(柱列, 줄지어 선 기둥)에만 두리기둥(원기둥)을 세웠으며, 재사(풍천재 건물) 입구에 '시문용 유허비'와 '서학 유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서학은 대도독 마귀와 유격중군 시문용과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란이 끝날 무렵 성주군 용암면 대명동에 정착하였다. 시문용은 임진왜란 때 유격장군 남방위 휘하의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종군하여 7년 동안 각지에서 많은 전공을 올렸으나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했다.

선조가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첨지중추부사(조선 시대 관직 18품계 중 제 5등급)를 제수했다. 그는 군사뿐만 아니라 풍수와 의술에 능하여 1616년(광해군 8) 정인홍의 추천을 받아 성지, 김일룡 등과 함께 궁궐 및 왕릉 축조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면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가렴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추궁당하게 된다. 1741년(영조 17)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워 정3품 벼슬을 받은 시문용

뜻밖에도, 성주 용암 깊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작고 외진 이 마을도 천병 장수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대명동이 되었다. 놀랍고 궁금하다. 그들은 왜 두사충처럼 번화한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지 않고 이토록 구석진 시골에 묻혀 살았을까?

두사충처럼, 대명동 마을을 개척한 시문용과 서학 두 명나라 장수들도 전쟁이 끝난 후 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문용이 귀국을 하지 않은 것은 전투 중 크게 다친 때문으로 전해지고, 서학은 동료 시문용을 이국만리에 홀로 버려두고 갈 수 없어서 의리상 조선에 남은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서학과 관련되는 재미있는 설화부터 살펴봐야 겠다.
 
 
 
  풍천재 앞 배롱나무들이 겨울 추위 탓에 아직 새잎을 싹틔우지 못하고 있다.
ⓒ 정만진


임진왜란 발발 전인 1561년, 사신을 수행하여 명으로 가던 조선 역관(譯官) 홍순언은 어떤 청루(술집) 문앞에서 '삼천 냥을 내면 미녀를 소유할 수 있다'라는 방을 목격했다. 홍순언은 주인공 처녀를 만나보았다. 유(兪)씨 처녀는 자신을 명나라 예부시랑의 딸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버지가 모함으로 투옥되었는데 청루주인에게 1천 냥을 빌려 일단 처형 위기를 모면했다고 말했다.

처녀는 2천 냥을 더 쓰면 아버지가 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팔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작정, 3천 냥을 내걸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3천냥을 선뜻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홍순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1천 냥 어음과 사신 일행의 공금 2천 냥을 아무 조건없이 그녀에게 주었다. 홍순언은 그 일로 귀국 후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술집에 팔린 처녀를 구해주려고 공금까지 쓴 홍순언

3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홍순언은 원병을 요청하러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또 명나라로 갔다. 그런데 황제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중 홍순언은 낯선 저택으로 안내되었고, 미모의 귀부인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아버님!" 하고 반기는 뜻밖의 장면과 마주쳤다.

30년 전 3천 냥을 그냥 보태주었던 바로 그 유씨 여인이었다. 홍순언의 도움으로 여인의 아버지는 옥에서 풀려났고, 가문이 회복되자 여인은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결혼했다. 유씨 부인과 석성은 명이 지원군을 조선에 파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석성은 황제 신종으로부터 전쟁 책임에 대한 탄핵을 받아 1599년 옥중에서 죽었다. 유씨 부인은 두 아들에게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했다. 그 중 차남 석천은 성주 운수 꽃질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 서학의 사위가 되었다.
 
 
 
  서학, 시문용의 유허비와 풍천재 모두가 보이는 풍경
ⓒ 정만진


석성이 병부상서(국방부 장관)일 때 병부시랑(국방부 차관)은 시윤제였다. 시윤제는 시문용의 아버지였다. 이는 정신(鄭藎)의 <풍천재기>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임진년(1592)에 왜노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거늘 선조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피란할 때, 나의 종선조(從先祖, 집안 선조)인 서천군(정곤수)이 왕명을 받고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갔다.'로 시작되는 <풍천재기>의 중간 부분을 읽어본다.

'(정곤수 등이 원병을 요청했을 때) 명나라 대신들이 듣지 않았다. 병부시랑(국방차관) 시윤제가 우리나라 사신과 관사에 함께 머물면서 힘을 다해 주선하였다. 이 때문에 지원병이 우리나라에 와서 신속히 섬오랑캐들을 쓸어내어 다시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시공(시윤제)의 힘은 진실로 많았다. 공의 아드님 문용이 당시에 도사관(都司官)이 되어 중군(中軍)의 행영(行營)으로 4년 동안 종군하면서 여러 번 기이한 공을 세웠으니, 그 또한 위대한 일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공(시문용)은 동방(조선)에 오래도록 태평의 기운이 있다 하여 드디어 머물러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대명(大明)이라 하고,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배전(拜奠, 절하고 제사지냄)의 예를 행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첨망(瞻望, 바라봄)할 곳으로 삼아 머리를 흐트리고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하지 않고, 명나라의 옛모습을 보전한 지 어언 200년이나 되었으니, 공의 처음 가진 선견(先見, 앞날을 내다봄)이 아니면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성주 누정록>의 번역문 인용)
 
 
  풍천재 내부
ⓒ 정만진


두 사람의 조선 생활에 대해서는 풍천재 기둥의 주련(柱聯, 기둥 순서대로 이어가며 써놓은 시의 구절)이 잘 묘사해준다. 풍천재의 주련은 전면 기둥과 중간 기둥에 폭 9.5cm, 길이 82.0cm, 두께 1.0cm의 8폭 소나무 판자를 걸고, 판자마다 음각(안으로 새김)하여 글씨를 판 다음 붉게 칠해 두었다. <성주의 주련>에 실려 있는 한문 원문과 번역문을 읽어본다.

悲歌落日望中原
저문 날 슬피 노래하며 중원을 바라보니
蘇北腥塵滿眼昏
소북(蘇北, 북경 주변)의 성진(腥塵, 비린내 나는 먼지, 청의 지배)이 눈앞에 가득하네
風煙百月思鄕土
바람 연기 속 여러 해 동안 고향 그리며
冠帶三韓長子孫
사대부로 삼한에서 자손 길렀네
萬曆山河雙壯士
중국의 산하에서 자란 두 장사는
朝鮮天地大明村
조선 땅에 대명촌(大明村)을 이루었도다
從古東人忠憤在
옛부터 동방의 사람들은 충성스런 마음이 있어
欲將盃酒酹英魂
한 잔 술 가지고서 영혼께 제사 드리고자 하네

이제 한 가지 말하지 않고 지나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다. 앞에 <성주 누정록>의 풍천재 해설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문단의 한 문장을 임의로 누락시켰다. 그 문장을 다시 넣어서 원문대로 읽어본다.

시문용은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면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가렴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추궁당하게 되지만, 처형을 면하여 (성주군) 용암면 대명동에 은거하였다.' 그후 '1741년(영조 17) 병조참판에 증직된다.'

<성주 누정록>은 시문용이 1643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인조반정 직후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1572년생인 시문용이 52세인 1623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데에는 <광해군 일기> 1623년 3월 14일자 기사가 바탕이 되었다.

유허비와 <성주누정록>에는 1643년 사망, <광해군일기>와 20년 차이

당일 기사는 전문이 단 여섯 자에 불과하다. '이이첨 등이 참형을 받았다(李爾瞻等伏誅).' 인조반정 다음날 실록인 이 기사는 처형 당한 대표 인물이 이이첨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등'이 누구인지는 전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이날 실록을 적은 관리는 본문 뒤에 '이이첨, 한찬남, 백대형, 정조, 윤인, 이위경, 이원엽, 이홍엽, 이익엽, 이병, 한정국, 홍요검, 서국정, 채겸길, 민심, 정결, 황덕부, 이정원, 이상항, 한희길, 박응서, 정영국, 유세증, 윤삼빙, 조귀수, 정몽필, 유희분, 유희발, 정인홍, 이강, 원종, 신광업, 성지, 시문용, 김일룡, 복동'이 처형되었다고 덧붙였다. 이 명단에 시문용이 들어 있고, 그래서 그가 1623년에 죽었다고 알려지게 된 것이다.
 
 
 
 
  서학과 시문용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제사지냈던 곳에 '대명단' 세 글자가 뚜렷하다.
ⓒ 정만진

하지만 의문이 솟구친다.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사관이 덧붙여 나열해 놓은 이 명단 외에는  실록 어디에도 시문용이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1623년 <인조 실록>에 실려 있는 처형 일자를 개인별로 보면 3월 14일 한찬남, 백대형, 3월 17일 성지, 복동, 3월 19일 조귀수, 이이첨, 정조, 윤인, 이위경, 이원엽, 이익엽, 이홍엽, 박응서, 한희길, 3월 25일 은덕, 여옥 등 나인 12명, 4월 3일 정인홍, 민심, 유세증, 서국정, 한정국, 이정원, 채겸길, 홍요검, 황덕부, 이이반, 유몽옥, 이여계, 이병, 이수, 4월 4일 유희분, 유희발, 이상항, 이일형, 정지준으로 나타나는데, 시문용은 없다.

정결, 정영국, 윤삼빙, 정몽필, 이강, 원종, 신광업, 김일룡도 없다. 그런가 하면, <인조 실록>의 처형자들 중 나인 12명 말고 이이반, 유몽옥, 이여계, 이수, 이일형, 정지준의 이름은 거꾸로 <광해군 일기>에 없다.

이처럼 두 실록의 명단이 상당히 다르다. 그 중 특히, 관리만이 아니라 사노(私奴, 개인의 종)에 불과한 복동의 죽음조차도 이름을 빠뜨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단독 기사화한 <인조 실록>에 시문용의 처형 사실이 거론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종인 복동 처형도 실록에 기록했는데 사문용은 안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본문 뒤에 사관이 덧붙인 글은 임금과 대신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 생각을 적은 부분이다.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단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면, <인조 실록> 3월 17일자 '(복동이) 추격당할 때 상처를 입어 죽었다(逐擊之際 仍傷致死). 공개 처형을 받지 않았다(未伏顯戮)'라는 본문이 <광해군일기> 3월 14일자 사관의 덧말에는 '(복동을) 잡아서 목베었다(被執斬之)'로 바뀌어 있다.

복동의 경우만큼 두드러진 것은 아니지만 이대엽의 죽음에 대한 표현도 사관의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인조 실록> 4월 20일자 본문은 '(이대엽이) 옥중에서 자살하였다(自殺於獄中)'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광해군 일기> 3월 14일자 사관의 첨언은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死獄中)'로 표현되어 있다. 자살과 사망은 전혀 다르다.
 
 
 
  풍천재 뒤편 얕은 산 능선으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시문용 등이 명나라를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던 대명단이 남아 있다.
ⓒ 정만진
 

뿐만 아니라, 시문용이 1741년(영조 17) 병조참판에 증직된 사실은 시문용의 1623년 사망설을 더욱 못 믿게 한다. 정인홍이 복권되는 때가 1908년(순종 2)이다. 같은 때 같은 죄로 인조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시문용이 정인홍보다 그렇게 167년씩이나 빨리 복권될 이유가 없다. 즉, 시문용은 1623년에 처형되지 않고 1643년에 자연사했으며, 그로부터 98년 뒤 영조가 그에게 병조참판(국방부 차관)이라는 명예를 얹어주었다는 해석이다.

영조 때 선비 홍직필이 쓴 문장을 새겨 만든 풍천재 앞 '유허비'에도 시문용의 타계 연도는 164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영조가 시문용에게 병조참판을 증직할 때 조정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논의하였을 것이다.

당사자가 언제, 어떻게 타계했는지 관심도 없이 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높여주었을 리는 없다. 시문용이 왕으로부터 병조참판 증직을 받은 후 그의 유허비문을 집필한 홍직필(1776, 영조 52-1852, 철종 3)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유허비문의 1643년 타계 기록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정조 임금도 <조선왕조실록> 1793년 7월 27일자 기사에 육성을 남겨 시문용의 편을 들어준다. 정조는 "본주(성주)에 대명동이라는 마을이 있다고 들었다. 이는 바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원조해준 중국군 시문용이 살던 옛터라고 한다. 문용의 아버지 윤제는 병부(兵部)에서 벼슬하면서 병부상서 석공(석성)이 주장한 우리나라 원조 정책을 힘껏 도왔다"고 회상한다.

정도는 또 "문용도 군사 사이에서 숱한 공을 세우고 그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다. 선조 때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고, 선조(先朝, 영조) 때는 참판을 추증하면서 '시문용 후손들을 천역(賤役, 험한 일)의 명단에 이름을 두지 말라'고 전교하셨다. (중략) 지금이라고 어찌 똑같은 예로 그의 자손들을 녹용할 방도(錄之方, 벼슬을 시킬 방법)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증 참판 시문용의 후예들을 도백(道伯, 경상감사)으로 하여금 불러보고 올려보내라" 하고 지시한다.

시문용을 극찬하면서 그 후손들을 돌보아 주라고 한 정조

어명을 받은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9월 2일 장계를 올린다. 조진택은 "증 참판 시문용의 후손 14명을 모두 불러 보고 그들의 살던 곳과 사적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시문용은 동방(우리나라)에 온 이후로 동면(東面) 대동방(大洞坊)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또 집 뒤에 단(壇)을 쌓아 놓고 달마다 초하루 보름이면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마을을 대명동(大明洞)이라고 부르고, 그의 후손들은 다른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시문용의 6대손 유영과 7대손 한익에게 식량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하고 보고한다.

정조는 그 두 해 뒤인 1795년 윤2월 26일에도 "증 참판 시문용의 후손에게 급료를 주며 활쏘기를 권장하게 한 것도 관직을 추증(追贈)하신 (영조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모시려는 뜻에서 발표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후손이 오늘 과거 시험을) 제대로 치르었으니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똑같이 일내(왕을 호위하는 내금위)에 (배치하여) 직부하도록(무과 본시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지시한다.

시문용에게 병조참판의 벼슬을 추증한 영조도 영조이지만, 정조의 발언 그 어디에도 시문용이 처형된 데 대한 안타까움의 표시는 없다. 실제로 시문용이 1623년 인조반정 때 처형되었다면 영조가 추증을 할 까닭이 없고, 정조가 그의 자손들을 보살폈을 리도 없다. 만약 시문용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여겨 새로 복권을 했다면 두 임금이 그의 죽음에 대한 위로의 말 또한 아니할 리 없을 터이다.
 
 
 
  대명단
ⓒ 정만진


사관이 시문용이 1623년 처형되었다고 덧붙여 기록해둔 까닭을 생각해 보면, 인조반정 직후 조정에 시문용 처형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처형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사관이 들은 소문을 적어놓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인조 실록> 1623년 3월 14일자의 '인조의 즉위와 광해군의 폐위에 대한 왕대비의 교서'도 그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한 증거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我國服事天朝, 二百餘載, 義卽君臣, 恩猶父子, 壬辰再造之惠, 萬世不可忘也. 先王臨御四十年, 至誠事大, 平生未嘗背西而坐.)'

시문용은 '아버지의 나라'이자 '조선을 다시 만들어준' 명의 장수이다. 게다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정3품 고위 벼슬까지 준 인물이다.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준' 명나라의 시랑(차관) 아들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런 중국 장수를 목베어 죽였다가는 인조에게 어떤 정치적 부담이 돌아올지 모른다.

그래서 시문용은 정인홍 등 북인들과 절친하게 지낸 것이 문제가 되어 벼슬이 떨어진 채 시골로 추방되었을 법하다(오수창의 논문 <인조대 정치 세력의 동향>에 따르면 광해군 재위 16년 중에 종6품 이상의 벼슬에 오른 인물은 321명으로, 32명이 처형되는 등 전체의 40%에 이르는 127명이 인조 때 처벌을 받았다).

그후 1637년(인조 14)에는 청이 조선에 살고 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시문용은 외진 골짜기를 찾아 더욱 깊이 은거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성주 용암 대명마을인 것이다.

대명마을에 풍천재가 건립된 때는 1834년(순조 34)이다. 그 이듬해인 1835년에는 시문용과 서학을 기리는 유허비도 풍천재 입구에 나란히 세워진다. 그 결과, 오늘날 대명마을을 찾은 답사자는 마을 들머리 주차장에서 하차한 후 마을 끝까지 걸어들어가 풍천재와 유허비를 보게 된다.
 
  두사충의 대명단은 지금 자취를 찾아볼 길 없지만 서학과 시문용의 대명단은 성주 용암 대명마을 뒷산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 정만진

풍천재와 유허비를 본 후 마을을 떠날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답사를 마치면 흡사 '고추장 없는 비빔밥'을 먹은 꼴이 된다. 풍천재 뒤편 군성산에 오르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곳에 대명단(大明壇)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1793년 9월 2일자 기사에 나오는 '달마다 초하루 보름이면 (시문용과 서학이)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한' 바로 그 '단' 말이다.

두사충도 대명단을 쌓고 명나라를 향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두사충의 대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성주 용암 군성산에는 시문용과 서학의 대명단이 뚜렷하게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대명단은 마을 입구의 공영 주차장 오른쪽, 즉 마을 첫집의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 가량 오르면 있다. 산 능선을 타고 풍천재 뒤쪽을 바라보며 숲 사이를 잠깐 걸으면 '大明壇(대명단)' 세 글자가 선명한 제단이 호젓이 얼굴을 내민다.

대명단을 보는 것은 정말 감동스럽다. 시문용과 서학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해 공을 세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그들의 인간적 처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남의 나라 외진 산 속에 살면서 두고 온 어린 시절을 한없이 그리워했을 눈물겨움이 안타까워서일 뿐이다. 들고 온 물이나 소주 한 잔이 있다면 단 위에 얹고 절이라도 하고 싶다. 물론 중국 황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문용과 서학을 생각해서, 그리고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간구하는 마음에서.

시문용을 기려 세워진 다른 재실들
경상북도 성주군에는 풍천재 외에 모명재(慕明齋)라는 또 다른 시문용 재실이 있다. 주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보월로 127. 경상북도 고령군에도 시문용을 기려 세워진 재실이 있다.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흑수길 61-6의 염수재(念修齋)와 같은 운수면 꽃질1길 46-8의 내화재(迺華齋)가 바로 그들이다.

시문용 재실이 풍천재가 있는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외에 이렇게 산재하게 된 것은 그의 후손들이 그곳 대명마을에서 나와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된 때문이다. <정조실록> 1793년 9월 2일 경상도관찰사 조진택의 장계에는 '後孫散居他里(후손들이 다른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현재 대명동마을에는 서학의 후손들만 거주하고 있다.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에 있는 모명재. 역시 시문용을 기리는 재실이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의 모명재는 이름은 같지만 두사충을 기리는 곳이다.)

ⓒ 정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