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귀신 잡는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devil)의 통영상륙작전

Jimie 2024. 5. 11. 06:28

They might capture even devil

통영타워전망대, 충무공 이순신장군, 통영상륙작전(6.25전쟁) 등 안내문

 

통영 원문공원에서 바라본 통영바다.

 

They might capture even devil

 귀신 잡는 해병의  통영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은  낙동강 방어선의 서쪽을 지키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작전이다. 또한 한국 해병대 단독으로 실시한 첫 상륙작전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작전의 전과로 한국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전투력을 인정받았다. 이 중심에 안창관 해병대령이 있다는~.

 

바다를 지켜낸 용감한 영웅

안창관 해병대령은 독립운동가 안용운 선생의 막내로 1924년 1월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들어간 그는 하얼빈 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금강소학교에서 수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국이 광복되자 귀향한 안 대령은 곧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이후 1948년 9월 해군사관후보생 특별교육대 2기생으로 임관하며, 1949년 4월 해병대 창설 멤버로서 해병대 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 

 

안 대령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진주와 제주도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우며 해병대의 위상을 떨친 바 있다.

 

그의 무용담은 ‘진동리 지구 전투’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김성은 부대’의 7중대장이었던 안 대령은 탱크를 앞세우고 마산 진동리로 향하는 북한군 6사단의 1개 정찰대대를 기습공격하며 적 90여 명을 살상하고 2대의 전차와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대승리였다. 또한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첫 전투에서 북한군의 침략 기세를 꺾어 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들의 공을 높이 치하한 정부에서는 전 부대원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했고, 안 대령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진동리 지구 전투의 패배로 마산 진입에 실패한 북한군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허술한 통영지역을 돌아 경상남도로 진입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작전을 알아챈 해병대는 통영 반도에 상륙, 통영 진입로인 원문고개를 점령하며 북한군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이것이 바로 ‘통영상륙작전’이다. 안 대령은 중대원들과 함께 5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종군기자 히긴즈가 그 활약을 지켜보곤  ‘그들은 악마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보도했고, 여기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이 유래되었다.

 

안창관 대령은 그 후에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 도솔산고지 전투, 김일성ㆍ모택동고지 전투 등 6.25 전쟁 대부분의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휴전 후에는 제2상륙전단장, 진해기지 참모장, 해병대사령부 군수국장 등을 역임, 해병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다 1966년 해병대령으로 전역한 후 1971년 타계했다.

 

현재 안 대령의 유해는 국립현충원 7묘역 5판 1호에 안장되어 있다.

모두가 패전을 예상한 진동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안창관 대령.

그는 귀신잡는 해병의 화신이다.

 

6·25 전쟁 당시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맨 왼쪽)가 휴식 중인 군인들을 취재하고 있다. /보훈처 제공

 

 

They might capture even devil

귀신 잡는 해병

 

한국전쟁 때 통영상륙작전의 치열한 격전지였던  원문고개.                                                             

원문고개로 오르는 길옆엔  통영상륙작전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통영지구 전적비’가 있다. 

통영지구 전적비

원문고개 위에는 ‘해병대 통영상륙작전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2층 건물로 실내 전시관, 체험시설, 야외 전시장으로 되어 있다. 전시관 안에는 통영상륙작전의 주역인 김성은 장군의 흉상이 있다. 그리고 해병대 역사자료 및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해병대 7대 작전의 사진과 전황이 있고, 김성은 장군과 이성호 함장의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통영상륙작전은 해병대 7대 작전 중 하나이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게 밀려온 국군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여 반격을 할 때, 북한군 제7사단은 국군의 전략요충지인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해 먼저 통영으로 들어왔다. 

 

통영을 통해 거제도로 침입하려는 북한군을 괴멸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해군함정 512호와 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통영반도 동북방 1km 지점에 있는 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 전황을 보니 거제에 상륙해 방어를 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직접 상륙하여 적을 괴멸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통영반도에서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인근에 있던 해군함정 703.901.504.512.302.307호와 평택호 등의 지원포격의 엄호 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장평리에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당시 전투에 사용된 상륙주정)

장평리에  상륙한 김성은 부대는 8월 18일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요충지인 원문고개를 확보하여 적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원문고개를 점령한 해병 3중대와 7중대는 통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인 망일봉을 차지하였고, 북한군과의 치열한 교전으로 망일봉을 지켜낸다.

 

망일봉을 거점으로  8월 19일 북한군 소탕작전을 펼쳐 통영시내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소탕한다.

 

통영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한 해병대는 북한군의 유일한 공격루트인 원문고개에 진을 치고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격퇴시킨다.

 

전황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창군 최초 적전(적의 영역)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것은  인천상륙작전보다 한달 앞서 이루어진 한국군의 독립적인 상륙작전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 작전에서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기관총 128정, 소총 107정, 권총 13정 , M1소총 3정, 기관단총 14정, 박격포 2문, 지프 2대, 트럭10대, 전화기 5대 등과 수많은 탄약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도 15명 전사, 47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로써  1950년 8월 17일 18시, 7척의 함정으로 통영의 장평리 해안에 상륙하여 2일 만에 통영을 탈환하고, 적의 유일한 공격로였던 원문고개에서 적을 격퇴하여  서쪽 낙동강 방어선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했던 것이다. 

중대규모의  한국 해병대가  사단규모의 북한군을 패퇴시킨 맹활약사을 지켜본  종군 기자는 흥분하였다.

 통영상륙작전  종군기자로 참여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 지의 도쿄 특파원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한국 해병대의 전투력을 보고  ‘귀신도 때려잡을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란 기사를  전 세계에 타전하여 ‘귀신 잡는 해병’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귀신잡는 해병대 유래

 

뉴스보훈소식

“한국의 해병은 귀신이라도 잡을 수 있다” -They might capture even devil-

기사승인 2021.08.17  12:12:47

- 되돌아보는 통영상륙작전 전승의 역사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통영상륙작전은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 철수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
또한 유엔군의 도움 없이 대한민국 국군이 단독으로 승리한 첫 전투였으며, 군과 민이 함께 이룬 값진 승리였다.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로 해병대는 통영을 넘어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었다.

통영지구전적비

■ 김성은부대, 명령을 받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8월에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동부 전선에서는 포항 외곽에서, 중부 전선에서는 왜관 등지에서 혈전이 계속되었고, 서부 전선에서는 진동리로 침입한 적이 마산·진해·부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공격 기세가 꺾여 본래의 의도인 마산·진해·부산 등지로 직접 침입하는 것이 곤란해지자,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는 통영반도를 먼저 점령한 뒤 거제도를 점령하여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예상한 바와 같이 1950년 8월 16일 미명을 기하여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한 북한군 제7사단 제51연대와 제104치안연대의 650명이 1950년 8월 17일 새벽 1시 통영시내로 침입해 왔다.


이같이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해병대 김성은부대는 즉시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상륙 실시하는 김성은부대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김성은부대는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통영반도 동북방 1㎞ 지점에 있는 지도(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거제도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함정 703·901·504·512·302·307호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장평리에 상륙을 개시했다.


한편, 해군함정들은 협조된 계획에 따라 통영항 내에 접근하여 매일봉·남망산 및 부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해병대를 상륙시킨 512호정과 평택호도 남하하여 함포 사격에 가담하였다.


적은 해병대가 통영항구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고지에 배치하였던 병력을 통영 남해안 일대에 집결시켜 해안선에 배치시켰으므로 접전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통영상륙작전에 사용된 상륙주정

통영상륙작전 기함 PC-703호 

‘귀신 잡는 해병’ 별명을 붙인 마거리트 히긴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대한민국을 빛낸 세계인 70인] '귀신잡는 해병' 말의 유래가 된 美 종군여기자

취재=권승준 기자
편집=뉴스큐레이션팀
입력 2015.08.1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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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리트  히긴스

"그들은 마치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1950년 8월 23일 미국 뉴욕헤럴드 트리뷴지(紙)에 실린 6·25전쟁의 전황 보도 중 한 줄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주일 전 북한군 2개 연대가 경남 통영 시내를 기습 공격하자 한국 해병대가 단독으로 반격에 나선 '통영상륙작전'을 다룬 기사였다. 이때 해병대의 활약에 강한 인상을 받은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가 기사에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국내 신문이 이를 번역해 보도하는 과정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우리 해병대를 대표하는 수식어로 쓰이고 있다.

 

마거릿 히긴스는 6·25전쟁을 취재한 300여명의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기자였다.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한국 땅을 밟은 뒤 6개월간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전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여자를 함정에 태우지 않는다는 미군의 방침에 맞서 "갑판 위에서 자겠다"며 버텨 승선을 허락받은 일화도 유명하다.

 

광주광역시의 충현원에는 6·25전쟁 당시 고아 1000여명을 구출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동상이 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2007년 이 고아원을 돕기 위해 자신의 회고록 판권을 넘기는 등 계속 한국의 고아들을 도왔다. 오른쪽 아래는 러셀 대령의 실제 사진. (김영근 기자)
 

광주광역시의 충현원에는 6·25전쟁 당시 고아 1000여명을 구출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동상이 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2007년 이 고아원을 돕기 위해 자신의 회고록 판권을 넘기는 등 계속 한국의 고아들을 도왔다.

미국에 돌아온 뒤인 1951년 그간 취재를 바탕으로 '한국전쟁(War in Korea)'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캠페인은 미국 젊은이들로 하여금 한국을 위해 참전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역시 6·25전쟁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 사진기자 맥스 데스포도 히긴스와 함께 전쟁의 실상을 알린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히긴스와 데스포가 전장을 누빌 때, 미 공군의 군종장교로 참전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은 온 서울을 뒤지며 수송기와 트럭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군대가 후퇴하자 블라이스델 대령도 자신의 책임 아래 돌보던 전쟁고아들을 탈출시켜야 했다. 그는 제5군 사령부에서 기적적으로 만난 부사령관을 설득해 일본에 있던 C-54 수송기 16대를 김포공항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미 공군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전쟁고아 탈출 작전 모습. 1069명의 생명을 구했다. (충현원 제공)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항까지 아이들을 태울 차량도 없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시내에서 수송 임무 중이던 해병대 트럭을 발견하고 "상부 명령"이라고 속여가며 아이들을 태웠다. 극적으로 공항에 도착한 블라이스델 대령과 고아들은 제주도까지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살아난 고아와 보육교사는 총 1069명. 이 작전은 공식 미군 전사(戰史)에 '유모차 공수작전(Kiddy Car Airlift)'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을 위해 묵묵히 싸운 전사(戰士)들의 공도 컸다. 1951년 2월 중공군의 공세를 꺾은 지평리 전투에서 필사의 총검 돌격을 감행한 프랑스군을 지휘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령, 미 해군 정보장교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큰 공을 세우고 서울탈환작전 중 녹번동 일대에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그런 용사 중에서도 빛나는 이들이다.

6·25전쟁 때 터키군 1개 여단을 이끌고 참전한 타흐신 야즈즈 준장도 부산·수원 등에서 북한군을 격퇴했고,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UN군의 후위에서 퇴각을 엄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와 터키군의 분전 덕분에 오늘날 한국과 터키 사람들은 서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며 가깝게 여기고 있다.

공동기획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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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연예

[TV하이라이트]‘귀신 잡는 해병’의 유래

 
입력 2012-06-21 03:00업데이트 2012-06-21 03:00
 
역사스페셜(KBS1 오후 10시)
 
6·25전쟁 개전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미국인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서울로 잠입한다. 그는 한강인도교 폭파와 서울 함락을 목격하고, 최전방인 낙동강 전선까지 달려갔다.
 
낙동강전투의 중요 전투였던 통영상륙작전을 취재한 그는 기사 제목을 ‘귀신 잡는 해병대(They might capture even devil)’라 붙였다.
이는 나중에 한국 해병대의 유명한 별칭이 됐다.
 
인천상륙작전 동행취재로 여성으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그의 삶을 통해 6·25전쟁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