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원세개의 12년간 조선에서 집정의 역사배경

Jimie 2024. 5. 11. 06:26

원세개의 12년간의 조선에서 집정의 역사배경

 

 

袁世凱의 12年間의 朝鮮統治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청사신이 26세에 조선의 태상왕이 되다.

1882년 7월 만청조정은 당시 실권자이던 조선의 왕후인 민씨의 구원신과 사자를 통해 출병을 요청해온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란 병변으로 청국이 군사를 보내 평정을 바란 것인데 청조정은 군대의 출병을 결단한다.

 

서방의 공업혁명이래 동방의 아시아국가들은 점차 개국하여 19세기중후엽의 조선은 아시아의 전략요지로 일본의 유신후 조선은 중국진출의 교두보로 인접국의 침략으로 자원수요를 채우고 발전하려 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국책으로 러시아도 조선은 태평양으로 진출을 위한 부동항을 구비한 곳으로 영국도 러시아의 확장을 막으려 한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액수한 것인데 중국으로서는 조선은 번속국으로 동북을 막는 교두보가 된다.

중국도 동북이나 경사의 보호를 위해 조선은 매우 중요한 거점이어서 종주국의 지위를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내정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려 한 것인데 전략상 매우 중요하나 당시 청정부는 내우외환의 연이은 접종으로 태평천국운동 염군지란 섬감회란 신강지란 아편전쟁 중불전쟁등이 연이어 평란과 기의의 연속으로 만청정부는 국력부족으로 평형전략을 추구한다.

 

당시 직예총독인 이홍장의 건의로 만청은 회군장령인 3천명의 군대와 오장경을 파견하고 조선의 사무대신으로 임명한다.

이들은 한성으로 진군하여 평란후 오장경은 회군들과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향하여 3천명의 회군중 23세의 젊은이 원세개가 포함된다.

 

이후 12년간 조선의 사실상의 통치자가 된 청년으로 중국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알선조정한 것이다.

이후 조선과 러시아 영국등의 열강의 관계를 조정하여 외교와 내정을 간섭하는데 원세개는 1859년생으로 하남의 항성이 고향으로 세가대족출신으로 숙조부 원갑삼은 조운총독서리로 태평천국과 염군기의시 평정에 참가한다.

그는 회군의 중요한 장령으로 생부인 원보중과 숙부인 원보경은 관료로 원세개가 원보경의 양자로 간다.

 

원보중은 원갑삼의 회군에 참여하고 원세개는 어려서부터 무관가정의 풍도에 익숙하게 되는데 후에 원보경이 2품의 관직에 올라 강남도의 도태가 된다.

원세개는 숙부의 가정에서 자라 관장의 풍운운작에 익숙해지고 가족배경상 독서에 열중하고 광명사도는 필수적이어서 과거에 열중하나 실패하고 향시에서 수차 낙방한다.

 

1879년 낙방한후 과거를 포기하고 자신의 시문을 모두 소각하고 마는데 당시의 사회는 과거가 공명의 지름길로 과거탈락후 21세에 과거를 포기하여 결단한 것인데 산동의 등주로 가서 원보경의 결의형제인 오장경에 투번한다.

오장경은 회군의 주요한 장령으로 이홍장의 친신으로 산동등주의 통수로 원세개를 특히 돌보아주어 경군의 영무처회반으로 일하게 된다.

 

조정이 오장경을 조선으로 보내 평란을 명하여 원세개도 조선으로 도착하여 실권자가 된 계기가 다가온다.

조선의 국세는 고종의 즉위시부터 시작하면 1864년 철종이 죽고 자식이 없어 흥선대원군 이재황은 신군주가 된다.

고종은 12세에 즉위하고 생부인 대원군이 집정하여 정무를 처리하고 섭정시기에 서방열강들이 조선에 습요해온다.

대원군은 보수적인 정책으로 폐관쇄국으로 10년간 집정한후 1873년 민씨일복의 정변으로 대원군은 하야한다.

 

그래서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민비가 정국을 주조하여 고종의 친정이후 민비가 장권자가 된 것이다.

민비가 집정한후 외척들을 부식하여 조정대권을 농단하고 민비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민비집단은 중국의 양무운동을 조방하여 조선도 근대화개혁에 나서는데 당시 조선은 인접의 일본이 명치유신을 완성하여 재정통일과 공업화로 대량의 무사집단은 실직하여 일본사회의 동란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일본정부의 안정마져 해쳐서 이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이코 다카모리집단이 정한론을 제출하여 조선에 출병하여 자원의 약탈을 주장한다.

이는 무사실업문제의 해결책인데 재부의 약탈을 하려 하나 일본의 보수파는 시기가 성숙하지 않다고 보아 반대한다.

1873년 정한론으로 인해 좌가지란이 일어나 사이코 다카모리등이 격진파로 몰려 하야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국내의 문제는 갈수록 엄중하여 1875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 모획하고 일본해군은 운양호등 3척의 배를 보내 조선에 침략하여 강화도사건이라 한다.

일본은 서방학습후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려 한 것인데 일본침략자들은 중국의 태도부터 탄색하고 당시의 청조는 서북의 신강문제가 미완으로 고심한다.

월남문제도 프랑스와 갈등이 커지는데 조선의 국세를 돌보기 어려운 형편으로 청조는 간섭하지 못하고 만다.

 

 

일본은 이를 탐지한후 조선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1876년 일본의 압력하에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불평등한 조약이다.

이에 일본은 성공적으로 조선을 개방시키고 무역특권을 얻은후 동시에 일본은 조선에서 실력을 늘려 친일파들을 양성한다.

청조는 조선에 대해 국세를 돌보지는 못하나 이홍장은 일본의 야심을 알고 조선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일등과 수교를 하도록 한다.

청정부는 이들국가들과 수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고 상호평형을 이루게 한 것인데 민비집단은 조선의 양무운동의 추동자가 된다.

 

 

이들은 열강들과 일련의 조약을 맺고 1881년 민비집단은 신식군대를 창립하고 일본군관을 초빙한다.

일본은 이기회에 조선의 각방면으로 삼투하고 민비집단의 관원들의 탐오는 커지면서 민비의 개방과 친일로 보수파들의 반발이 커진다.

특히 민비집단이 조건한 신군은 장비나 보급상 구군대보다 많아 구군대는 보급이나 급여미지급으로 원성이 커진다.

1882년 7월하순 구군대의 사병들은 13개월간이나 급여지급이 밀려 선혜청이 결국 급여지금을 하나 잡질로 분노한 구군대는 폭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민비집단의 대원군에 대한 수년간의 탄압으로 대원군도 선동하여 보복에 나서고 민비집단과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로 폭동이 더욱 극렬해진다.

난군들은 민비집단의 관원들을 살해하고 공격하는데 왕궁에 진공후 민비는 환장하여 도주하고 만다,

 

민비의 도주로 정권에 복귀한 대원군은 난군들은 일본의 신식군관들을 살해하고 일본의 공사관도 불질러 일본공사인 화방의질은 연야로 달려 도주하여 영국군함을 타고 본국으로 도주한다.

민비는 숨어서 청조정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데 평란을 바라고 일본에도 동시에 출병을 구원요청한다,

청은 회군장령 오장경을 파견하는데 6개영의 3000병력으로 조선에 도착하고 오장경은 한 개의 영을 우선 등륙시킨후 나머지 군대는 방관하여 오장경은 분격하고 장령들을 혁직시키고 원세개를 대신 투입한다.

그래서 원은 조선에서 기회를 얻는데 상안후 영채를 세우는데 당시 회군들은 이미 사기가 죽고 부패되어 군기가 환산된 것이다.

 

사병들은 등륙후 주민들을 약탈하고 소요하여 원은 오장경에 보고하고 간살약탈자들을 처벌하게 한다.

그러자 원은 7명의 사병들을 참수하여 과단성을 보여 오장경은 감탄하고 과찬하여 군대를 통솔하게 한다.

청군은 한성에 입성한후 아편을 피우는 자가 많아 조선의 백성가에 침입하여 강간을 자행한다.

그래서 악명이 커지는데 원세개가 엄격한 처벌로 참수하거나 청으로 돌려보내 엄격한 조치로 아편중독자들을 참수하여 본을 보인다.

그래서 오장경은 원에 대한 신임이 커지고 인정하는데 은위병시로 사병들도 그를 존경하고 보급을 중시하여 충분한 공급을 한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 위망이 커지면서 청군은 용산에 병영을 세우고 대원군에 대한 경계로 유혹하여 청으로 압송계획을 세운다.

1882년 8월 대원군은 경군병영에 회방중 원세개는 대원군의 위사를 때어놓은후 주저하는 동안 강제로 교자에 태운후 천진으로 압송한다.

 

이후 대원군의 여당들을 사로잡고 평란후 민비를 돌아오게 하고 민비집단이 다시 조정을 공제하게 한다.

이러한 평란중에 원은 대공으로 이홍장의 인정을 받아 5품의 직함을 주고 민비도 감은하여 신군훈련을 부탁한다.

임오군란중 청은 조선의 반란을 평정해주어 종주국의 위망이 커지고 일본도 파병해오려 한다.

청군은 반란의 평정으로 정중동하던 일본도 공사관의 분소를 핑계로 조선과 불평등조약을 다시 체결하여 제물포조약을 말한다.

제물포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주병권을 얻고 천명의 병사를 보내 항형하려는 청군도 오장경군을 조선에 주재하게 한다.

 

 

청조는 조선의 종주국이나 내정에 불간여한 것인데 주군을 시작으로 내정에 간여를 시작한 것이다.

임오군란의 해결로 조선의 관원들은 갈수록 청조의 보호를 바라는데 사대당들이 세력을 키우고 독립을 주장한 개화당과 대립을 시작한다.

 

개화당중 친일파관원이 늘고 중일양국의 조선내 경쟁은 격화되고 대립도 커져서 임오군란중 청군의 강력한 작용으로 고종과 민비도 청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다.

그래서 조선 정부중 사대당의 우세로 일본도 경제삼투를 강화하여 개화당은 일본의 사상을 접수한다.

이에 개화당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대당을 점차 구축하고 원은 당시 조선의 신군을 훈련하면서 고종은 1000명의 정병으로 신군을 조건한다.

 

이 연병의 성공으로 원도 조선에서 군대중의 위신이 커지면서 연병의 경험은 후에 회국후 발적의 자본이 된다.

1884년초 중불간의 마찰로 전쟁이 일촉즉발로 이홍장은 오장경의 3개영 1500명을 산동으로 회국시켜서 프랑스군의 해상등륙에 방비하게 한다.

 

오장경이 회국한후 청군은 3개영만이 조선에 남고 오조유 정광전 원세개가 통솔하는데 두사람은 2품관원으로 원세개만은 막 5품관으로 승진한 신예에 속한다.

 

원은 겨우 25세로 독자적인 영장이 된 것인데 승진속도가 대단한데 군사재능과 외교수단이 고명하여 중용된 것이다.

청군은 중불전쟁의 여파로 병력이 반감되고 일본과 개화당이 득세하려 하여 일본군들을 개입시키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1884년 12월 4일 조선우정국의 건성식에서 우정총판이 조선의 대신들과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

이중 일본공사인 죽진일랑은 병으로 참가를 피하고 개화당원들이 연회중에 불을 놓아 혼란중 사대당의 주요한 대신들을 살해한다.

 

이들은 황궁에 진입후 청군의 작란이라 하고 고종과 민비를 놀라게 하고 일본에 구조신을 작성하게 한다.

개화당은 서신을 일공사관에 전하고 일공사인 죽첨일랑은 즉시 출병하여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여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에 연금시킨다.

개화당은 청과 친근한 조선대신들을 찾아내 참수하고 고종을 핍박하여 개화당을 요직에 임명하게 한다.

다음날 개화당은 신정부를 선포하고 청군은 이소식에 분격한 원이 궁으로 가 고종울 구출하고 오조유와 장광전은 소극적인 태도로 이홍장의 처분을 기다린다.

그러나 원은 청시한후 즉시 태도를 정하여 일본과 쟁단을 피하는 두사람의 영장과 달리 원은 신군을 솔령하여 궁으로 가 조선군의 공격에 환격하여 격전으로 반군과 일군의 우세에도 원의 부대만이 승리한다.

 

이날 밤이 되면서 청군의 원세개 부대가 공세중 승리하여 고종을 구출하고 반군들을 참수한다.

이에 일본공사인 죽첨은 일본으로 도주하고 일본공사관은 민중에 의해 분소되고 3일간의 갑신정변은 철저히 실패하고 만다.

 

 

이홍장은 조선의 급보에 놀라는데 이틀후 반란평정소식으로 원에 대해 크게 칭찬하고 조선국내에서도 큰 위망이 생긴다.

그러나 원의 평판의 사적은 국제적인 강렬한 반향으로 일본은 크게 항의하고 격진파들은 청조와 개전을 주장한다.

더구나 청국과 교전중이던 프랑스는 일본과 동맹을 맺고 중국에 대한 침략을 밀모하여 러시아와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해온 것인데 일본을 부추겨 중국에 강경한 태도로 경고하게 한다.

 

이러한 국제정세로 청조의 많은 관원들은 원세개를 지책하고 멋대로 행동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탄핵을 당하고 동료들인 두상사도 원의 공로를 시기하여 발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원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크게 중시하고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원도 퇴량의사를 보여 회국하여 휴식하게 한다.

 

 

1885년 일수상 이등박문은 천진에 가 갑신정변의 후속처리를 이홍장과 담판하는데 중불전쟁중으로 무리한 요구를 수용한다.

이등박문은 3개의 요구를 제출하는데 1)정변에 관여한 청군의 장령을 징계하고 2)사변중 참살된 일본인에 대한 배상과 3)청군의 조선에서 철군을 요구한 것이다.

제1조는 원세개를 겨냥한 것으로 청군에 책임을 돌리는데 이홍장은 이를 거부하고 강경한 자세로 원을 비호한다.

제2조의 배상은 동의하고 제3조인 청군의 조선에서 철군은 일본의 주요한 목적으로 쌍방은 공식으로 청과 일본은 모두 조선에서 철군하고 향후 조선에 출병시는 상호간에 서로 인지하도록 통보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청일천진조약의 내용으로 표면상 평등조약이나 청조정이 크게 양보하여 손해를 야기한 조약이다.

청은 조선의 종주국이나 청은 조선파병시 일본에 통보하게 한것인데 현재도 조선에서 동시에 철군을 답응한다.

이후 출병시도 일본에 통지하게 한 것인데 9년후 갑오전쟁시 복필을 심은 것이다.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에서 모두 철군하여 러시아가 조선에서 기회를 잡는데 목인덕이란 독일인은 본명이 뭴렌도르프로 원래 이홍장이 조선에 파견한 이로 러시아와 조선간의 가교역할을 한다.

목인덕은 러시아가 조선의 보호를 하도록 알선한 것인데 조선과 수차의 교섭으로 조러밀약을 체결한다.

그런데 청은 조선과 러시아의 비밀접근을 발견하는데 영국은 러시아와 줄곳 적대시하고 러시아해군의 조선으로 남하를 크게 우려한다.

영국은 먼저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일본도 당황하는데 조선은 자신들의 표적인데 러시아가 선기를 잡자 불만이 커진 것이다.

만일 러시아가 조선을 탄병한다면 일본에 대한 거대한 위협이어서 우려하고 일본은 청국이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조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뭴렌도르프의 파면을 바라고 영국도 청이 조선조정에 압박을 가해주길 바라는데 러시아와 비밀협정의 취소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청조정은 사신을 보내 내정에 대한 관리를 결정하여 이홍장은 원세개를 적임자로 보아 추천하여 1885년 10월 원을 청조정이 총반조선교섭통상사무로 임명한다.

 

이는 사실상 청조정이 파견한 최고의 책임자로 26세가 된 원세개는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다.

이파견의 의도는 조선에서 러시아의 확장을 막으려 한 것인데 원은 동안 줄곳 보정과 천진에서 연금중인 흥선대원군과 동행하여 돌아온 것이다.

 

원은 조선에 다시 赴任한후 조선의 친러세력들을 분쇄하고 조선과 러시아간의 전보선도 차단시킨다.

이는 양국의 연락을 막으려는 것인데 가전보를 통해 청조가 조선왕실에 대한 공포성의 문건도 보내게 한다.

원은 조선왕실의 친러정책을 명백한 배반행위로 보고 비난하여 조선의 조정상하는 크게 놀라고 난작으로 고종은 러시아와의 연계를 중단하고 러시아는 청의 조선에 대한 보호의지를 보고 영국과 청의 연합대처에 큰 우려를 한다.

 

 

그래서 러시아는 더 이상 조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영국에 중국에 대한 이권을 상호간에 연합하여 차지하는 보증으로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하게 된다.

이에 청과 영국이 조선영토에 대한 침점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영군도 즉시 거문도에서 철군하고 조선과 러시아의 비밀밀약도 취소된다.

 

그러나 원의 강경한 태도로 조선과 청조의 열흔도 갈수록 커져서 조선은 갈수록 독립의 의지를 희망한다.

원은 1885년부터 조선에 부임한 이래로 청의 종주권을 유지하려고 조선의 내정 외교 군사 경제등에 대한 간섭을 한다.

그래서 조선의 태상왕이 된 것인데 대단한 발호로 늘 황궁에 들어가 고종을 문책하고 압박한다.

이에 조선은 청조의 공제상태가 되고 기타국가들은 조선에 접근조차 어렵게 된 것이다.

일본이나 서구열강들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나 원의 방해로 모두 실패한다,‘

 

 

이에 조선의 모든 근대화건설은 원이 관리하여 공제하고 조선왕실은 수차나 천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원의 철환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홍장은 단연 거절하는데 약10년후 1894년 3월 조선에서 종교단체인 동학당의 기의로 처음에는 서학과 기독교를 반대하나 후에는 농민기의를 주도하여 점차 규모가 커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정권은 큰 위기를 맞고 일본은 기회를 잡은 것인데 일본은 청에 같이 출병하여 평란을 암시한다.

더구나 일본은 출병하여 간섭을 하지 않으려 하는 의도를 흘리는데 원은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필히 출병하여 평란을 하기로 한다.

그래서 조선조정이 청의 도움을 요구하게 하여 차병을 고무시켜서 1894년 6월 3일 조선은 정식으로 청에 대한 출병을 요청한다.

 

 

이홍장은 직예제독인 엽지초와 태원진의 총병인 섭사성을 보내 회군 1500명을 솔령하게 한다.

이조치로 두사람이 육로로 조선으로 가 평란에 협조를 명령하고 동시에 북양수사의 제독 정여창도 제원호 양위호를 솔령하여 해상으로 출병하게 한다.

 

그런데 천진협정의 규정에 의해 청정부는 출병을 일본에 통지하는데 일본은 불출병의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돌연 일군은 8000명을 파견하여 두나라의 출병으로 조선의 전부가 동학당과 체결한 전주화약에 위배된 것으로 사태는 악화된다.

 

 

조선정부는 원에 대해 청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일본의 철군도 당연시되는데 청군은 철수를 동의하나 일본이 철군을 거부한 것이다.

사실상 일본은 이러한 기회를 엿본 것으로 철군거부의 이유를 찾고 두나라가 연합하여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개혁을 건의한다.

 

그런데 청측은 이를 거부하고 일본은 조선조정에 압박을 가하여 조선의 내정개혁을 압박한다.

이후 무력동원을 협박하나 조선정부가 일본에 대한 답응이 없어 일본은 무력으로 왕궁을 무력으로 공점한다.

 

이로서 민씨집단이 와해되고 친일내각에 세워지는데 일본의 통제하에 조선정부는 청과 맺은 모든 협약을 취소하게 한다.

이후 동아정국을 바꾸게 되는 갑오청일전쟁이 곧 폭발하게 되고 원세개는 세두가 미묘해지자 이미 4일전 변장하고 조선에서 도주하여 천진으로 돌아간다.

 

지난날 풍광무한의 조선감국은 암연히 도주한 것인데 12년간의 조선에서 세도도 끝이 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