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제 64주년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뿌리'
- 김민정 학생(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대신문 승인 2018.12.09 16:49
뿌리
가진 공간이라곤 자신의 몸뚱이 밖에는 없었던 K씨는 결국 식물을 몸 안에 심기로 결정했다. K씨는 언젠가 흉부외과 방사선 사진에서 보았던 자신의 흉강을 생각하며 과연 식물을 몸속 어디에 심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를 생각했다. 아이, 괜히 이런 걸 주워서. 중얼거리면서도, K씨는 식물을 심을 곳을 몇십 분째 고민하고 있다. 위장은 위산 때문에 위험할 것 같다. 폐는 그가 가끔 얻어 피는 한 개비의 사치 때문에 식물이 말라죽을 것이다. 그러면 어디가? 발 속은 어쩐지 냄새가 날 것만 같다. 그럼 양쪽 허벅다리? 슬쩍 허벅지를 내려다보자 IMF이후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 주는 밥만 먹고 살아온 부실한 허벅지는 앙상하게도 말라 있다. 다 낡아빠진 등산 바지가 헐렁하다. 충분하지 않은 공간이다. K씨는 줄어들지 않는 무료급식 줄에 서서 골똘히 다음 장소를 생각했다. 척추에 매달아 놓기에는 척추는 너무 딱딱하고 굽어 있었다. 잘 치료받지 못한 디스크는 가끔씩 온종일을 공원 벤치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머릿속에 식물을 넣어두기엔 가끔 자신이 아닌 식물에 의해 조종당하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아 불쾌했다. 아니, 불쾌할 것까지 있나. 뇌보다는 덜 중요하면서도 몸과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부분이 없을까.
그러다 K씨는 까마득히 멀어진, 삼십 년 전의 고등학생 시절, 생물 시간에 배웠던 케케묵은 내용을 들춰내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와 떨어지는 먼지. 잔뜩 누렇게 변색 된 그 시절의 교과서 위에 있는 것은 척수를 그려 놓은 그림이다. 그리고 그 밑에 적힌 설명은, 척수란 척추 내에 위치하는 중추신경의 일부분으로 감각, 운동신경들을 모두 포함한다. 목에서부터 목척수, 등척수, 허리척수, 엉치척수로 구분되며…
여기까지 기억해내고 K씨는 식물을 척수 끝에 매달아 놓기로 결정했다. 다른 장기들이 쓸모없게 되더라도 척수에 담긴 신경은 끝까지 살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K씨는 그렇게 생각하며 철제 식판을 움켜쥐었다. 어디에 심을지가 정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K씨는 잠시 눈을 감고 어제 처음 보았던 그 식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몸 안으로 들여보냈다. 식물이 척수에 가 닿았다 생각할 때 K씨는 눈을 떴다. 무료급식소의 한가운데서 식물을 척수에 심는 것이 끝났다. 아, 빨리 좀 안 가요, 뒤에 서 있는 노숙자들이 한두 마디씩 할 때쯤이었다.
K씨는 자신이 내린 이런 결론이 어딘가 만족스러워,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일면식이 있는 노숙자들에게 화분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역시 K씨는 괴짜라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혀로 빼서 먹었다. 척수에 식물을 심었다는 대목에서는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래서 형씨는, 그러니까 몸 어딘가에 그 화분인지 뭔지가 있다는 거지?”
“드디어 미쳤어. 쯧쯧.”
같은 말들이 K씨의 이야기 뒤로 딸려 왔지만 그런 반응쯤이야 상관이 없었다. 미친 것이든 미치지 않은 것이든 식물은 분명히 척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것을 K씨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거의 벗겨져 번들거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젓가락으로 꽁치 등허리를 두 동강 냈다. 한쪽을 들어 올리자 같이 끌려 나온 꽁치의 부드러운 뼈와 신경이 흐물거렸다. 국물이 하나도 없는 꽁치는 비리다. 매콤한 맛이 하나도 없다. K씨는 그래도 오늘은 먹을 것 없는 꼬리 부분이 아닌 등허리 부분이 자그마치 두 개나 있어서 정말 운수가 좋은 날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판에 코를 처박고 밥을 먹던 사람들 몇몇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식하는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니, 학생. 꽁치는 됐고, 국물 달라고 국물. 반찬 통 말고 밥 위에.”
그리고 잠시 후에,
“아니, 넘칠 정도로 가득 부어달라고요. 넘쳐도 되니까. 그런 거는 안 중요해.”
성내는 목소리를 듣자 하니 김 씨다. 이 급식소는 주말이면 원래 있던 봉사자가 아닌 일회성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배식을 담당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말만 되면 자원봉사자들의 미숙함으로 저런 큰 소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K씨는 뭘 넣고 끓인 건지 아무 맛도 안 나는 밍밍한 국을 한 입 퍼먹었다. 주린 배를 이끌고 무료급식 밥만 꼬박꼬박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겨울이면 얼큰한 국물 하나가 그렇게 그리웠다. 꽁치가 나오는 날은 사람들은 두 파로 갈렸다. 무조건 꽁치를 많이 먹는 사람이 있는 한편 꽁치엔 관심이 없고 그 얼큰한 꽁치조림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겨울에는 특히 후자가 많아졌다. 그런 자세한 사정을 꽁치 국물로 한 끼를 때워 본 적이 없는 자원봉사자들이 알 리가 없었다.
봉사자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다들 어렸다. 어느 대학에서 수를 맞춰 온 듯했다. 실수를 한 봉사자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꽁치 하나를 더 얹어주었다 – 김 씨는 꽁치는 됐다고 분명 말을 했는데 - K씨는 만약 자식이 있다면 저 정도 나이이겠거니, 생각하다, 태어난 적도 없는 자식 나이를 세는 것도 웃기고 해서 다시 식판으로 고개를 돌려 남은 국물을 쭉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
화분을 줍게 된 것은 지난 새벽 세 시 즈음이었다. K씨는 유난히 잠이 안 와 노숙자 무료급식소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점심시간과 저녁 식사 때만 갔던 무료급식소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고 따뜻한 국물과 고소한 생선 냄새가 진동했었는데. 이런 새벽에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쭉한 흰 탁자는 온통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다. 모두 낡아빠진 자재들이다. 노숙자가 되어 이런 생활을 하는 자신의 신세에 K씨는 문득 울컥, 화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오래 이끌고 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최대한 단순하게 사는 것, 그것이 K씨가 오랜 노숙 생활 끝에 얻은, 살아가기 위해 가져야만 했던 생각들이었다.
길쭉한 테이블 여러 개를 지나갈 때마다 그동안의 식사들이 떠올랐다. 이 급식소에서 먹는 밥은 체하지 않았다. 원체 위장이, 그리고 소장 대장 등등 장이란 장은 약해 다른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는 툭하면 체를 하곤 했다. 밥을 먹었다 하면, 먹은 것은 잔뜩 마른 멸치볶음과 밍밍한 감자조림 두어 개에 불과해도, 화장실에 가 한참을 기도하는 사람 마냥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앉아있다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오곤 했다. 그렇지만 이 급식소는 이유는 무엇인지 몰라도 속을 편하게 했다. 아무튼, 좋은 곳이었다.
막 그런 생각을 하며 모퉁이를 도는데, 온갖 악취가 나는 쓰레기봉투 더미 옆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작은 화분과 그 안에 담긴 식물이 보였다. 작은 컵 정도 크기의 화분이었다. 그냥 황토색이라든가 검정 화분이면 몰라, 조그마한 식물을 품고 있는 그 화분은 쨍한 핑크색이었고 ‘아무개와 아무개 1년 기념’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1년을 기념하고 이젠 어찌 되었든 필요가 없어져서 버려졌구나.
K씨는 ‘버려졌구나’를 생각하는 순간 어딘가 욱, 그동안 누르고 살았던 특유의 감성이 올라와 버렸다. 그동안 K씨가 순탄하지 못한 인생을 살게 만들었던 것은 딱딱한 복숭아라기보다는 물렁물렁한 복숭아에 가까운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물렁복숭아 같은 그 마음이 다시 고개를 쳐들자 K씨는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을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 주울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죽은 새아버지의 음성이 K씨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 누가 버린 물건은 주워가는 게 아니다.
한창 사춘기 무렵일 때부터 들어온 지긋지긋한 말이었다. 그 케케묵은 말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새아버지를 생각하면 숨 막히는 침묵으로 가득 찬 집 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 새아버지는 K씨를 한 번도 물렁해 본 적이 없는 딱딱한 복숭아로 기억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K씨는 새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마음을 연 적이 없었고 그랬기에 K씨는 물건을 가져오지 말라는 말을 듣든 말든 꾸준히 물건을 주워 오곤 했었다.
‘어차피 그동안 물건 같은 것들 잘 줍고 살았지. 뭐 어때.’
지금 내 나이가 남들 말 들을 나이인가? K씨는 잘 나가던 회사원이었다가 노숙자가 된 자신의 신세를 떠올리며 그 순간 화분을 슬쩍 집어 올린 것이었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나오는 어느 십이월의 새벽이었다.
공원 수돗가에 가 쓰레기봉투에서 나온 진물들로 찐득해진 화분의 겉면을 문질러 씻었다. 그 안에 담긴 흙이 많이 젖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해 본 것이 근래 처음이었기 때문에 K씨는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소중한 무언가가 생기는 기분은 묘한 흥분과 불쾌감을 함께 자아냈다. 동정심으로 거둬 오긴 했지만 그 이후에 이어져야 할 식물의 관리를 생각하면 아득해졌다. K씨는 예전부터 살아 있는 무언가를 기르는 데에는 젬병이었다.
K씨는 매일 들고 다니는, 땟국물에 절은 검정 가방 안에 화분을 넣고 지퍼를 닫았다. 가방을 다시 들쳐메고 공원 벤치로 향했다. 그것이 어제 새벽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침에 가방을 열어 보자 식물은 힘이 하나도 없이 말라 죽어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싱싱한 이파리로 찰랑거리던 녀석이었다. K씨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안타까움과 섭섭함을 느끼며,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노숙자 신세에 뭔가를 기르고 신경 쓴다는 것은 여간 귀찮고 힘든 일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영양제 약값 정도는 굳었다 생각하며 공원 벤치 근처 흙을 파 그 밑에 식물을 묻어두고 화분은 풀숲 어딘가로 멀리멀리 던져버렸다.
그러고 무료급식소에서 비린 꽁치를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 이상한 것이 – 식물이 사람인 것은 아니지만 – 지나고 난 뒤에 생각해 보니 자꾸만 그 작은 것이 눈에 밟혔다. 물렁물렁하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식물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버리고 K씨에 의해 한 번 더 버려진 식물이 자신의 신세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그렇게 K씨는 철제 식판을 부여잡으며, 식물을 척수에 키우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
그 날 밤부터 K씨의 별 내용 없던 꿈에서는 유난히 죽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로 죽은 어릴 때 친구부터 시작해서 여러 어렴풋해져만 가는 얼굴들을 지나 어머니에 이르렀다. K씨는 매일같이 K씨를 아무도 없는 집에 방치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과연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긴 했었는지 묻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 어머니는 사랑이 결여된 회반죽 같은 얼굴로 K씨를 멍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K씨의 새아버지였다. 그 후로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K씨는 꿈만 꿨다 하면 강에 빠져 죽은 새아버지가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를 하고 정물화 안에 담긴 사과처럼 가만히 의자에 앉아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꿈을 꿨다. K씨는 그럴 때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거나 – 그래도 뒤를 돌아보면 새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꿈속에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다 아침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형씨, 요즘 왜 이렇게 수척해졌어. 맛대가리 없는 마늘종 같은 것을 씹어먹으며 점심이고 저녁이고 노숙자들은 그렇게 물었다. 혹시 그, 몸속에 심었다던 풀때기 때문인가? 누군가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주변에 앉아있던 노숙자들은 입김을 내뿜으며 피식, K씨를 제외하고 웃음이 터지다 가라앉곤 했다.
다섯 번째 그 꿈을 꾸자 K씨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K씨는 새아버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새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새아버지가 우린 다 죽었는데 넌 왜 안 죽었냐, 하며 목을 조르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K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도리어 불안해졌다. 막 새아버지의 귀 근처에서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데, 그 순간 새아버지가 K씨를 바라보았다.
왜 지금까지 나를 피한 거냐.
… 보기가 싫었으니까요.
…
제 꿈에 왜 자꾸 나오시는 거예요. …아버지.
죽고 나니까 아버지라고 불러주는구만.
그렇게 말하는 새아버지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밭고랑처럼 패여 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K씨는 문득 이런 좋지 않은 꿈을 꾸는 이유가 새아버지의 금기를 어겨서인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제가 아버지 말씀 안 들어서 그런 건가요?
무슨?
누가 버린 물건은 주워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네.
아버지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했으니까요.
그만큼 네가 길거리에서…
K씨는 공원 벤치에서 벌떡 깨어났다. 한겨울인데도 식은땀이 목덜미에서부터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새아버지와 이렇게 대화를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둘 사이에는 이런 별 것 아닌 대화조차 없었다. K씨가 철저히 새아버지를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 그렇지만 K씨는 그것을 새아버지가 자신을 버려서, 라고 생각하고 있다 – 죽은 이후에 시작되는 대화라니. K씨는 삼십 년도 더 된, 십 대 때의 기억을 좇으며 새아버지의 문장을 완성했다.
길거리에서 이상한 물건들 자주 주워 왔었으니까.
그 생각에 이르면 K씨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던 텅 빈 집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K씨는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길에서 주워온 상자를 잘게 잘라 이어붙여 미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주워온 돌멩이라든가 누가 버린 몽당연필, 깨진 안경, 낡은 인형 같은 것들을 넣어두었다. K씨가 만든 미로에는 출구가 없다. 또한, 물건들은 서로를 만날 수 없다. 아무리 미로를 헤매어도 서로의 방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외로운 물건들을 신이 된 것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며 K씨는 조금이라도 덜 외로워질 수 있었다.
새아버지는 아무렇게나 물건을 주워 오는 K씨의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아버지도 든 적이 없던 회초리를 들고 혼을 냈다. 온갖 무서운 이야기를 새아버지는 애써 지어내 들려주었지만 이미 사춘기가 지나고 있던 K씨에게 그런 말들이 약효가 있을 리가 없었다. K씨는 그런 새아버지의 서툰 모습을 비웃었다. 역시 어수룩하다니까. 낄낄거렸다. 새아버지가 하는 말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은
― 누가 뭐래도 너는 내가 낳은 자식이다.
라는 말이었다. 마음으로 낳으면 낳았지 어떻게 당신이 낳았겠어요, 라고 밥상머리에서 이야기하면 새아버지는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들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K씨는 그런 말에 더 짜증이 났다.
새아버지를 향한 짜증과 배척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새아버지가 마치 무엇이라도 된 듯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열일곱 살이었던 K씨가 새아버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새아버지가 K씨를 선택한 것만 같은 느낌에 K씨는 분해졌다. 게다가 자꾸만 내가 낳은 자식 운운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심지어 죽어서까지도 새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은 듯했다. 죽은 새아버지가 나온 꿈을 열 번째 꾸었을 때 K씨는 이제 결론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K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영락없는 물귀신 꼴로 쇼파에 앉아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는 저에겐 가짜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제가 어머니와 함께 만들었어요. 어머니가 사랑하는 새 남자와 가정을 합치는 것이 어머니와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K씨는 어머니와 그 문제를 논의한 적이 없었다. 항상 자기 자신의 감정이 우선이었던 어머니는 K씨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이야 어떻든, K씨의 말에 새아버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는 당신에겐 자연의 방식대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출발은 중요하지 않다. 넌 내가 내 몸에 심어놓은 자식이야.
심어놓았다고요.
그래.
어디요?
그 말에 새아버지는 조금 망설이다 자신의 배 부분을 가리켰다. 자세히 다가가 들여다보자 동그랗고 검은 공간이 새아버지의 배에 뻥 뚫려 있었다. 그것은 K의 새아버지가 전쟁에서 얻은 평생 지우지 못할 훈장 같은 것이었다. 수류탄 파편이 지나가고 열악하게 꿰매진 새아버지의 배는 온통 흉터투성이였는데, 그래서 못 쓰게 된 장기를 이리저리 이어붙이는 바람에 배꼽 아래쪽, 본디 소장이 구불구불 라면 면발처럼 가지런히 접혀 있어야 할 곳은 정말 뻥 뚫려 있다고 새아버지는 말하곤 했었다.
이 뱃구렁에서 너를 키웠다.
새아버지는 정물화 속의 사과 같이 동요 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깨고 보니 별 해괴한 꿈이었다. 하고 싶은 말도 다 하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만 더 듣고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새아버지는 K의 꿈에 나오지 않았다.
*
지하철이 너무 빠르구나.
K씨는 그 말을 기억한다. 그 말은 K씨의 새아버지가 영영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K씨에게 이야기했던 문장이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밖에서 길을 헤매다 돌아온 새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 식탁 의자에 배를 부여잡고 힘겹게 걸터앉으며 이야기했었다. 그때 K씨는 새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으므로,
그러네요.
하고 회사에 일을 하러 나갔었다. 그때 새아버지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K씨는 생각나지 않았다. 표정 없는 마리오네트 같던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전형적인 ‘할아버지’가 되어가던 새아버지는 휴대폰 지도 어플을 사용할 줄도 모르고 오로지 감에만 의존해 길거리를 다녔다. 그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고 경찰서의 도움으로 집에 겨우 돌아오는 것이 다반사였다. 혹은 기어코 그 골목을 찾아가 과거의 추억이 담긴 점포들이 지금은 자취도 남지 않은 채 사라졌다는 것을 전쟁이 관통한 텅 빈 배를 부여잡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낡아빠진 국가유공자 모자를 새아버지는 외출할 때마다 쓰고 다녔다. 가끔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할아버지 두세 명과 함께 아파트 앞 화단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K씨는 그런 새아버지가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좀 쉬세요.
나는 나가고 싶다.
이 짧은 대화 이후로 다시 침묵의 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동안 어머니라는 연결고리로 겨우겨우 이어 붙여져 있던 가정은 어머니가 없어지자 가족이라 하기에도 뭐한, 동거인에 가까운 형태로 바뀌어버렸다.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가 새아버지가 결국 집을 나가 실종된 후 강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이유였는지. K씨는 새아버지의 조끼에서 나온 유서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 했었다. 하지만 유서엔 그런 이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찬장 구석에 돈을 모아놨으니 잘 뒤져 보아라는 것이 내용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찬장 구석을 쥐잡듯이 살펴 그는 접시와 접시 사이, 교묘하게 가려진 봉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봉투 안엔 통장이 들어 있었고 K씨는 그 금액을 보고 놀랐지만 그런 것과 새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철저히 별개였다.
K씨는 새아버지가 죽은 후, 집에 돌아오면 느껴지는 적막의 무게가 달라진 것을 느꼈었다. 안쪽 방에서 귀찮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없어지자, 집에 오면 온통 어둠이었던 십 대의 겨울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만든 박스로 만든 미로들…. 혼자 했던 외로운 싸움.
여섯 번째 꿈에서였나 일곱 번째 꿈에서였나. 새아버지는 매일을 미로를 삼키는 기분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배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소장 대신 미로가 한가득 쌓이는 기분으로 살다 보니 한평생이 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에요. 죽은 새아버지와 대화를 하다 보니 새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진부한 스토리는 K씨에게 통하지 않았다. 무료급식소에서 꽁치 등허리를 쇠젓가락으로 갈랐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하루들이 일렬종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새아버지가 죽은 시점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직장도 잃고 떠돌이 노숙자가 되니 이젠 새아버지를 왜 미워하기 시작했는지도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다.
*
꿈에 온통 가시가 돋친 덩굴식물로 뒤덮인 미로가 나왔을 때 K씨는 척수에 심은 식물이 드디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K씨는 그 미로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어릴 적의 미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K씨는 머릿속으로 미로의 지도를 만들며 미로를 답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두 시간. K씨는 이 꿈의 미로는 출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만든 미로와 같은 구조였다. 그렇게 식물들로 뒤덮인 출구 없는 미로를 걷는 꿈에 K씨는 갇혀버렸다.
오늘의 주메뉴는 냉동 고기 경단 세 개. K씨는 육즙이 흘러나오는 고기 경단을 잘게 씹었다. 이런 고기의 맛을 느껴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그러면서도 삼겹살이나 갈비 같은 ‘진짜 고기’들을 먹고 싶었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일 밥엔 삼겹살이 나온대.”
맞은편에 앉은 박 씨가 이야기했다. 그 옆의 김 씨가 말을 보탰다.
“여기 창립일이라나 뭐라나…”
“내일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겠네.”
일찍 와야겠어.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다시 자기 앞에 놓인 밥을 마지막 밥알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란 흰 테이블마다 가스버너가 올려지고 그 위에 고기 굽는 판이 깔렸다. 오랜만에 배에 기름칠을 할 수 있는 날이다 보니 점심시간 한참 전부터 노숙자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K씨도 그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제도 꿈에는 미로가 나왔다. 미로를 걷다가 미로 벽면을 타고 올라가는 덩굴식물의 비정상적으로 큰 가시에 팔목을 꿰뚫려 버렸다. 바싹 마른 K씨의 손목에 굵은 주삿바늘 정도의 굵기의 가시가 푹 들어갔다. 가시가 얇은 살을 뚫고 들어갈 때 나는 소리는 퍽이 아니라 투둑, 이었다. 모직 옷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와 흡사했다. K씨는 손목에 박힌 가시를 바라보며 이걸 뽑아야 하나, 그대로 있어야 하나, 평생 가시가 박힌 채로 사는 게 나으려나 고민하다, 심호흡을 하고 굵은 가시를 혈관에서 드드득, 돌려 뺐다.
막힌 곳이 터지며 피가 왈칵 터져 나왔을 때 K씨는 뜻밖에도 아픔과 함께 약간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오줌을 참다 겨우 화장실에 갔을 때 느끼는 쾌감과 비슷했다. K씨는 상처에서 느끼는 이 낯선 쾌락에 젖어있다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막았다. 그러다 번뜩 눈을 뜨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꿰뚫린 손목을 보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역시 꿈이란.
잔뜩 달궈진 불판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고 있다. K씨는 집게를 쥐고 고기를 뒤집으며 입맛을 다셨다. 잘 익은 삼겹살을 자를 때마다 둘러앉은 노숙자들의 눈빛은 저것을 곧 먹겠다는 기대감으로 이글거렸다. 고기 한 점을 씹자 고소한 육즙이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삼겹살의 맛이 K씨는 못내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쌈 여섯 개째를 싸 먹고 있는데 K씨의 앞에 몸에 쫙 달라붙는 얇은 패딩을 걸친 청년 한 명이 다가왔다. 바람에 날려갈 것 같은 몸에 껄렁한 포즈, 영락없는 날라리 고등학생이다.
“화분 훔쳐간 거, 아저씨죠?”
청년은 대뜸 그렇게 이야기했다. 훔쳤다는 단어에 주변 노숙자들이 입 안에 쌈을 한가득 싸 넣어 우물거리는 채 이쪽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K씨는 명백히 버려져 있던 것도 가져가면 훔쳐간 것이 되는지 의문이 드는 한편 아무도 없는 새벽에 화분을 주워 간 것을 어떻게 저 청년이 알고 있는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그런 생각의 결과는
“무슨 화분…?”
이라는 누가 봐도 좀도둑처럼 보이는 대답이었다.
“이미 CCTV 다 돌려봤고, 여기 센터에서 도둑질 이력이 가장 많은 사람이 아저씨라고 센터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아니다. 도둑질이라는 것은 모함이다. K씨는 이 급식소에서 도둑질이라는 것을 한 적이 없었다. 급식실 한쪽 구석에 일주일 정도 방치된 쿠키 상자가 있길래 그걸 들고 와 먹은 적은 있었지만 그런 것이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무 신경도 쓰고 있지 않다가 없어지고 나서야 그걸 찾기 시작하는 오만함이 K씨는 싫었다. 정말 큰 도둑질 사건이 하나 있긴 했다. 사무실 서랍 안에 있던 돈다발이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지금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없는 다른 노숙자가 한 일이었다. 다만 그저 K씨가 가장 물렁해서, 물렁한 대응으로 인해 가짜 도둑으로 몰린 것일 뿐이었다. 오래전 회사에서 해고당할 때처럼.
K씨가 이런 생각에 잠겨 본의 아니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사이에 청년은 무어라 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K씨에게
아니 아저씨, 빨리 화분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라며 억지로 꾸며 낸 듯한 화를 내가며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어린 게 어디서 반말이야 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K씨는 그저 멀뚱히 듣고 있었다. 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듯 몽롱하다. 아, 이것도 꿈인가. 왜 화분을 가져갔냐고 이 노숙자 새끼야, 하며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가 새파랗게 화난 표정으로 K씨를 몰아세웠다. 그것 때문에 싸우고 재회한 여자친구와 또다시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여자친구가 일 년 기념으로 함께 키우는 반려식물을 선물했었다나 뭐라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화분이라 새로 살 수도 없어요, 제발요. 어느새 다시 존댓말. 그런 시시콜콜한 연애사가 뭐 그리 중요하나 싶지만 K씨는 그 말들에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그래도 쓰레기봉투 옆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는 걸 가져간 건데 그게 무슨 잘못인가. K씨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혼자 화내고 혼자 흥분을 가라앉힌 청년이
그래서 화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이 새끼야.
라고 말할 때 – 청년은 뇌 어딘가가 아무 무늬 없는 회백질로 변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 K씨는 식물을 척수에 심어놓은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물렁물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년은 ‘역시 못 배워먹어서’라는 말을 시작으로 K씨를 까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못 배워먹었나? K씨는 억울하다. 대학도 나오고 번듯한 회사도 다녔는데 시대에 휩쓸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아니 IMF 이후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 내 잘못인가?
K씨가 여전히 대답이 없자 무슨무슨 새끼야, 하며 말끝마다 욕이 시작됐다. 요지는 화분 도둑놈이 왜 이렇게 뻔뻔하냐, 빨리 화분 뱉어내라는 것이었다. K씨는 거기서 자신은 과연 누구의 새끼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머니의 새끼인 것은 확실했지만 그건 반쪽짜리였다. 남은 반쪽이 확실치 않았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친아버지가 정말 아버지이긴 한가, 라는 또 다른 질문에 부딪혔다. 새아버지는 K씨를 열심히 키워주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새아버지의 아랫도리에서 K씨가 시작되었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저씨 애비가 그렇게 가르쳤어?”
그 말에 별안간 K씨는 눈앞이 온통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청년이 이야기하는 ‘애비’ 라는 말에 K씨는 자신의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도 애비는 확실히, 새아버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누가 버린 물건은 주워가는 게 아니라며 허구한 날마다 혀를 끌끌 차며 말하고 K씨가 가져온 잡동사니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던 사람. 새아버지는 도둑질을 하라고 K씨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 화분을 척수에서 빼내 버리면 텅 빈 공허가 평생 척수 끝에 매달려 있을 것이었다. 평생 텅 빈 것을 몸 안에 품고 사는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다. 화분은 나의 것이다. 그 누구도 빼내 갈 수 없다. – 이런 생각들을 반복하다 K씨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청년의 손을 붙잡고 뜨겁게 달아오른 불판에 무턱대고 꾹 눌러 지져버렸다. 그것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라 고기를 먹고 있던 노숙자들 중 아무도 K씨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고 당연하게도,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K씨는 청년의 손바닥을 지지더니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잔뜩 휘둥그레진 노숙자들의 눈이 좇고 있었다. K씨는 미로같이 구불구불하게 난 길을 따라 아무 곳으로나 달렸다. 그저 막다른 길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곳이 그가 그렸던 출구 없는 미로를 그대로 옮겨놓은 세상이 아니길 바라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며 K씨는 그 청년의 손을 왜 불판에 지졌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
그 날도 K씨는 꿈을 꿨다. K씨는 미로를 달리다 그동안 본 적이 없는, 미로 한가운데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덩굴식물들을 보게 되었다. 식물들은 구(球) 모양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고 K씨의 키보다 두 배나 되는 높이에 비현실적인 부피였다. K씨는 그 안에 들어가 보기로 결심했다. 집채만 하게 자라난 덩굴식물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칼을 쓰지 않아 자연의 방식대로, 덩굴식물의 커다란 가시 때문에 온몸이 상처로 이리저리 찢겨나갔다. K씨는 어쩐지 침입자가 되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을 놓을 수 없었다. 끝끝내 K씨는 덩굴식물의 한 가운데에 들어갈 수 있었다. 투두둑 소리를 내며 손인지 덩굴인지 모를 것이 뜯겨 나가고, K씨는 아직도 시야를 빼곡히 가리고 있는 덩굴 사이로, 덩굴들이 그렇게도 간절히 그 속에 붙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붉고 둥글며 한없이 빛나는 것이었다. 태양일 것이다. K씨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 뒤로 들리는, 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땅을 긁는 소리, 머리를 온통 회백질로 만들어 버리는 아찔한 초록빛 냄새. 식물을 척수에 심는 게 아니라 팔뚝에 심어버릴 걸 그랬어. K씨는 눈이 멀어버릴 것 같으면서도 그 둥근 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덩굴을 헤쳐 나아갔다. 그러다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덩굴들이 흔들리고 미로가 벽을 부르르 떨었다. 한번 시작된 진동은 곧 차분하고 부드러운 리듬으로 바뀌었다. 그 리듬은 누구의 음성을 닮았나. 문득 K씨는 이곳이 새아버지의 뱃구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새아버지의 뻥 뚫린 배. 미로를 삼키며 살아왔다는 새아버지의 배는 이렇게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정말… 죽어서까지. 붉어진 눈시울로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새아버지의 시뻘건 자궁이 거기에 있었다.
수상 소감
어릴 때 어머니는 몇 시간이고 저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셨습니다. 읽기가 끝나면 저는 새로운 동화책을 다시 한가득 꺼내 왔다고 합니다. 그 후 초등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모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셜록 홈즈 시리즈에 푹 빠져 지내며 이런 ‘재미있는’ 소설이란 것을 나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제 단편을 책처럼 제본해 주셨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을 글쓰기가 제본된 제 글을 받아든 순간 어떤 목표가 되었습니다.
글쓰기에 푹 빠져 보겠다는 이유로 휴학한 후 글을 쓰다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좋은 상을 받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일까 고민을 했는데 정해진 답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제가 앞으로 쓰는 글도 저의 첫 다짐과 닮아 있었으면 합니다.
항상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믿어 주신 부모님, 존재 자체가 기쁨인 동생에게 감사합니다. 이상 세미나 신범순 교수님과 세미나 동료들에게 매주 월요일마다 저를 다시 채우는 좋은 시간을 마련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소설을 쓰겠다는 저를 응원해 준 친구들, 든든한 버팀목인 창문(창작문학) 동료들, 제 글을 언제나 큰 애정으로 읽는 연인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좋은 상을 받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 문학상을 더욱 노력하라는 채찍질로 알고 제가 믿는 상상과 창조와 꿈의 힘을 계속 이끌어 나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 제 64주년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뿌리'
- 김민정 학생(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심사평
예심을 거쳐 심사위원들이 당선 여부를 두고 본격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뿌리」, 「좁게 보는 남자」, 「너무 오래된 독백」, 「주머니 속의 칼」 등이었다. 이들 네 작품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좋을 만큼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으며 문학적으로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지만 각 작품의 장단점을 헤아리는 심사 끝에 수월하게「뿌리」라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그만큼 「뿌리」는 압도적이고 재치 있는 문학적 자질을 겸비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가진 것이라고는 몸뿐이어서, 우연히 갖게 된 식물을 할 수 없이 ‘척수’에 심는 흥미로운 발상으로 시작한다. 이런 능청스럽고 자못 환상적인 서두는 새아버지에게 이식된 듯한 자신의 삶을 진중하고도 흥미롭게 회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종내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자란다는 것은 속이 뻥 뚫린 듯한 공허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해석으로 돌출된다. 흔하디 흔한 가족 서사를 흥미로운 상상으로 비릇는 힘과 그렇게 함으로써 진중하게 이 시대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힘은 가히 기성작가의 재능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과 상상과 현실을 조율하는 능력, 그에 걸맞은 깊이 있는 해석까지 갖춘 뛰어난 작품이었다.
가작으로 선정된「주머니 속의 칼」이라는 작품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두려움과 불안을 강박증적으로 밀도 있게 다루고 있었다. 지금 이 시대의 현상과 첨예한 문제의식을 서사화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인물이 밤새 고장 난 버스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는 설정을 좀 더 믿음직스럽게 썼으면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긴장과 서스펜스를 다루는 능력은 여느 작가의 솜씨와 비교해서 뒤지지 않았다.
백마문화상은 이 시대 가장 젊은 상상력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문학을 둘러싼 불신과 풍문이 심상치 않음에도 빼어난 두 작품을 백마문화상을 통해 만날 수 있어서 몹시 기뻤다. 이 두 명의 대학생 작가들이, 개성과 완숙도를 갖춘 예비 작가들이, 한국 문단에서 제 몫을 하는 작가로 성장해나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신수정 교수(문예창작학과) / 편혜영 교수(문예창작학과)
출처 : 명대신문(http://news.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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