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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문건에 왜 일본은 없었을까

Jimie 2023. 4. 13. 05:49
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도청 문건에 왜 일본은 없었을까

중앙일보

입력 2023.04.13 04:00

업데이트 2023.04.13 06:43

 
김현기 기자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도청에 무슨 선의와 악의가 있나
그만 두지도, 막지도 못할 것이면
'파이브 아이즈' 가입 추진이 정답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1 도쿄 아자부의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불과 60m가량 떨어진 곳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안가가 있다.

'전파 연구소'라고 불리는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다.

다만 "아자부 주변 외국 대사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란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그래서 2013년 노후화한 주일한국대사관을 전면 재건축할 당시 가장 신경 쓴 것도 도청 방지였다.

국정원 특별팀을 수차례나 파견해 공사 과정에서 모든 선·장비에 도청 장치가 묻어 들어가지 않게 경계했다.

일본 도쿄 아자부의 주일한국대사관이 지난 2013년 전면 재건축해 완공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모습. 연합뉴스

사실 도청의 대상은 동맹·우호국·적대국을 가리지 않는다.

북한 김정남·장성택이 처형된 것도 중국 저우융캉(周永康) 정치국 상무위원의 도청을 통해 김정남 후계 논의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통화를 도청했다.

 

미국은 2015년 가장 가까운 동맹인 일본의 핵심 인사 유선전화 35곳을 지속해 도청한 사실이 탄로났다.

 

#2 이번 도청 논란 직후 대통령실의 첫 반응은 "과거 전례와 다른 나라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번 보겠다"였다.

 

아주 정확히 그렇게 따라갔다. 2013년 미국의 주미 한국대사관 도청이 폭로됐을 때도 똑같은 대응이었다.

 

1976년 청와대 도청이 불거진 박동선 게이트 때는 아예 미국에 도청 사실을 부인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문건의 '다른 나라' 사례.

지난 10일 프랑스·이스라엘이 "허위 정보"라 주장하고 나서자 11일 우리도 "문서는 누군가가 상당 부분 위조했다"고 했다.

미국을 방문한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이 지난 11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특파원들과 만나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김 차장은 출국 전 기자들에게 "(도청 의혹 문서는) 누군가가 상당 부분 위조했다"고 말했다. 뉴스1

예상된 조기 봉합이다. 이틀 동안 미국과 한국 당국이 머리를 맞대고 짠, 잘 짜인 출구전략이다.

"그렇다면 왜 첫날부터 부인하지 않았느냐" "위조된 부분이 구체적으로 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사태를 더 키우거나 총대를 멜 용기도 없거니와 그렇게 한들 도청을 인정할 미국도 아니다.

 

그렇다면 실익을 챙기는 쪽이 낫다.

 

문제는 이걸 2주 후 한·미 정상회담에서 '카드'로 활용할 머리와 배짱, 재주가 이 정부에 있느냐다.

 

#3 미국의 도청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에 거론된 건물 내 음파가 어떻고 진동 발생기를 부착하고 하는 논의는 까마득한 옛날 얘기다.

 

현재 미국은 100여 개의 정찰위성을 유기적으로 가동하며 전 세계 '음'을 모두 빨아들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굳이 용산 대통령실 공사장에 들어가 도청 장치를 심을 필요 따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논란에서 진짜 신경 쓰이는 건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의 형편없는 정보 관리 능력. 수집량은 어마어마하게 방대해졌는지 모르나 관리는 한심할 정도로 방만해졌다. 최근 10년 사이 네 번이나 유출됐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오른쪽)이 지난 10일 이번 도청 문건 유출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그는 "문건은 명백히 국가안보 우려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문건 유출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EPA=연합뉴스

 

 

이번 문건도 몇달 전부터 온라인에 등장했지만, 미 당국은 이제야 알아챘다. 우리는 이 점을 캐고 따져야 한다.

또 하나는 왜 이번 문건에 일본은 없었을까 하는 점.

 

일본은 현재 기밀정보 공유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미국·영국·캐나다·뉴질랜드·호주)'에 새롭게 들어가기 위해 물밑에서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로 정보를 전면 공유하고, 서로를 도청하지 않는 진짜 동맹이다.

 

사실 2021년 미 하원에서 처리된 국방수권법에 "한국과 일본·독일 등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021년 9월 2일 미국 하원은 '파이브 아이즈'의 회원국에 한국, 일본, 인도, 독일까지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국방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미 행정부는 확대 대상국의 참여 여부를 검토해 최종 결정할 방침이다. 확대 전 기존 파이브 아이즈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미 일본은 그에 근접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있을 순 없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국이 악의를 갖고 (도청)했다는 정황은 없다"고 하나 도청에 무슨 선의와 악의가 있는가.

 

또 우리가 따진다고 미국이 도청을 멈출 것 같은가. 우리는 지금 도청 안 하나. 어림없는 얘기다.

 

그렇다면 아예 미국, 나아가 '파이브 아이즈'와 보다 높은 레벨에서 고급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관리하는 역발상이 필요한 지점 아닐까.

 

어차피 방패로 막을 수 없는 창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못지않게 챙겨야 할 숙제가 또 생겼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kim.hyunk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