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정상회담 회담록은 30년 지정기록물로 분류돼 있다. 당시 초미의 국민적 관심은 고인이 생전에 대통령으로서 김정일에게 과연 NLL 포기 발언을 했는지 여부였다. 회담에 배석했던 이들은 그런 적 없다고 일제히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어찌 아는가. 대화록은 30년 후에야 공개되는데?
방북 후 “남북정상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던 노무현이었다. 지금은 북한이 NLL을 우습게 침범하지만 그때만 해도 NLL은 성역이었다. 그런데 정문헌이 여기다 “비밀대화록이 존재한다”고 꼬리를 붙여 폭로하면서 사안의 본질이 흐트러졌다. 그 뒤 8개월을 대화록이 있느냐 없느냐, 사초(史草) 증발 사건이냐 뭐냐… 엉뚱한 싸움이 돼버린 거다.
마침내 국정원장이 불타는 애국심으로 정상회담 회의록을 확 까고 말았다. 노무현이 김정일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30년 후가 아닌 당대의 국민이 똑똑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10년 후인 지금, 신문지면으로 다시 보니 섬뜩하다. 노무현은 NLL 포기만 말한 게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위원장하고 인식을 같이한다. NLL은 바꿔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담은 동아일보 2013년 6월 26일자 지면.
● “서해평화지대, 위원장 승인해주신 거죠?”
당시 10·4 선언 초안까지 만들었던 대통령비서실장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그리고 2017년 대통령이 돼서는 2007년에 못했던 일들을 현실로 밀어붙였다. 우리 군의 무장해제나 다름없는 9·19 남북군사합의, 서해평화수역… 2012년 대선 후보 때는 “NLL을 확실히 수호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던 것과 딴판이다. 유훈 통치는 북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먼저 NLL을 보자. 10년 전 노무현 재단에선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설이 날조라고 했다. 회의록을 보니 노무현은 그보다 더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 NLL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말하자면 서해 평화지대를 만들어서 공동어로도 하고, 한강하구에 공동개발도 하고, 나아가서는 인천, 해주 전체를 엮어서 공동경제구역도 만들어서 통항도 맘대로 하게하고, 그렇게 되면 그 통항을 위해서 말하자면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하거든요. 여기는 자유통항구역이고, 여기는 공동어로구역이고, 그럼 거기에는 군대를 못 들어가게 하고. (중략) 헌법문제라고 자꾸 나오고 있는데 헌법문제 절대 아닙니다.(중략) 위원장께서 지금 승인해 주신 거죠?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자 심지어 김정일은 말을 더듬기까지(혹은 천천히) 했다. “그건 아니…정전협정 문제가 우선…그게 풀어진 조건에서…평화협정을…중간에 시범적으로 하고…그렇게 되어야지 지금은 아마…그 전 단계로서 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노무현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김정일이 보기에도 대선이 불과 두 달 앞이고 정권교체가 될 게 뻔한 남한 대통령이 너무 앞서가는 게 기막혔던 모양이다.
2013년 11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대정부 질의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관련 자료가 화면에 나타나 있다. 사진 오른쪽 통로측 자리에 앉은 사람이 문재인 전 대통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19대 국회의원)이다. 동아일보DB
● “핵무기 신고 안 한다”하자 노무현 “잘 하셨다”
NLL 무력화보다 심각한 게 있다. 회담이 열린 날은 6자회담 성과로 나온 9·19 공동성명(북한은 모든 핵무기 및 핵계획 포기하고 미·일은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약속한다는 내용)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가 발표된 날이었다. 정상회담 전에 어떻게든 2단계 조치를 타결해 10·3 합의문을 내놓으려 한국은 북한과 함께 미국을 윽박질렀을 정도였다. 김정일은 막 합의를 마치고 온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내용을 설명하도록 했다.
=김계관: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 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한다. 그 다음 핵계획과 관련해서는 농축우라늄 문제가 해명되는 차제로 한다.(중략)
=대통령: 수고하셨습니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 하셨구요.
김계관은 이미 만든 핵무기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의 폐기’(CVID)에 응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더 중요한 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문제다. 북한이 우라늄탄을 제조하기 위해 비밀리에 HEU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돼 2002년 2차 한반도 핵 위기가 시작된 거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앞에선 핵무기 보유와 HEU프로그램 존재를 시인했던 북한은 그러나 곧바로 말을 뒤집었다. 2005년 9·19 공동성명 때도 한사코 HEU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지금도 HEU 시설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는다.
● 우라늄프로그램, 노무현 듣고도 “잘 알았다”
북한 핵무기 제조 방식이 기존 플루토늄 방식에서 우라늄 방식으로 전환된다는 건 심대한 의미가 있다. 수공업으로 만들던 것을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꾼 것 같은 획기적 변화다. 영변 핵시설은 플루토늄프로그램이고 2000년대 초부터 비밀리에 개시한 핵무기 제조방식은 우라늄 프로그램이다. 영변 핵시설은 이제 별 의미 없는 고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IAEA가 감시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진 거다(이용준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
이렇게 중요한 HEU에 대해 2007년 김계관은 “해명되는 차제로 한다”(6자회담에서 이견이 해소되면 한다)며 신고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 모든 (개)소리를 듣고 난 노무현의 답변이 “예, 잘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였다.
이토록 죽을 힘을 다해 지켜낸 HEU프로그램으로 북한은 김정은 대에 이르러 핵무력을 완성한 것이다. 2018년 신년사에서 “2017년을 국가 핵 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한 해”라고 외친 것이다. 그 이면엔 북이 죽자고 숨겨온, 노무현과 문재인이 현장에서 듣고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던 HEU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이다.
● 고철 영변 핵시설 거래에 김-문 손 잡았다
김정은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세기의 회담에도 성공했다. ‘미-북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 미군유해 송환’(순서가 중요하다)에 합의해 원하는 걸 다 얻어내며 트럼프는 바보라고 생각했을 터다. 2019년 2월 발걸음도 가볍게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김정은은 영변 원자로를 폐기할 테니 대북 제재 4건을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영변 원자로가 고철에 불과하다는 걸 트럼프가 모를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트럼프는 알고 있었다. 비밀 농축우라늄핵시설이 따로 있다는 것도. 그래서 단호히 거절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문 대통령은 “영변 핵시설이 전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해맑게 주장했다.
누구 죽으라고 문재인은 김정은의 살 길과 핵무기 양산의 길을 열어주려 했는지 소리쳐 묻고 싶다. 고철 덩어리 영변 핵시설을 모두 없앤대도 HEU프로그램이 잔존하는 한, 아무 소용 없다. 외려 더욱 은밀하고 효과적인 핵무기 생산의 길을 열어줄 뿐. 그래서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노이 회담이 깨지고 트럼프도, 문재인도 정권이 교체된 것이다.
● 정말 알고 싶다, 문재인은 대체 왜?
2018년 3월 8일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온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고 발표했다. 참내.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이것이 포인트다) 핵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소리라는 걸 북핵 문외한인 나도 알겠다.
더구나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만(欺瞞)이란 너무나 쉽고도 당연한 병법의 기초다. 1994년 제네바합의부터 지금까지 온갖 합의를 다 해놓고는 얻을 것 다 얻고, 판판이 다 깼던 나라가 북한이었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에 성공한 것 자체가 성공적 기만의 사례일 수 있다는 논문도 나와 있다(박휘락 국민대 교수의 2020년 논문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의 전략적 기만 분석’).
한국과 미국의 북한 비핵화 전략이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 증강 시간을 벌어주었음을 지적하는 박휘락 국민대 교수의 논문. 2020년 12월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의 학술저널 ‘국제정치연구’에 게재됐다.
2018년에도 한미 양국은 ‘비핵화’를 핵무기 폐기로 오해해 협상을 시작했다. 박 교수는 북한 기만의 핵심적 표적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고 문 전 대통령도 비핵화=북한 핵 폐기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의문이다. 진정 핵 폐기를 믿었다고? 믿는 척 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이라고 반드시 우리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다. 대통령 잘못 뽑았던 탓에 이제 우리는 핵 보유국인 북한과, 핵을 포기할 의지가 절대 없는 북한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새롭게 각오를 다져야 할 때가 됐다(앞으로 대통령은 군을 경험한 사람을 뽑았으면 한다. 여성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K팝 걸그룹 블랙핑크 공연을 대북 확성기로 북한에 꽝꽝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