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Arts

[坂本龍馬]오료연가(お龍恋唄)

Jimie 2022. 10. 28. 12:50

 

[坂本龍馬]오료연가(お龍恋唄)

お龍恋唄

[오료오 코이우타 - 오료오 사랑노래]

: 永井みゆき[나가이 미유키]

作詞: 牧島 功  作曲: 弦 哲也  編曲: 前田俊明

 

 

https://www.youtube.com/watch?v=e4qIsvidyLI 

 

2014년 4월 23일 일본 데이치쿠 레코드에서 발매..

에도(江戸)시대 말기의 무사(武士)이며 개혁가로 암살당한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의 아내인 お龍[오료오]를 주인공으로 그린 노래이다.

 

1 =========================

교오토와이마고로 유키후루고로카

京都はいまごろ 雪ふる頃か

교오토는 요맘때쯤 눈 내릴 무렵일까

 

아나타와타이기니 미오스테루

あなたは大義に 身をすてる

당신은 큰 뜻으로 몸을 던졌네

 

아노히아루이타 기온노코미치

あの日歩いた 祇園の小路(こみち)

그날 거닐었던 기온의 오솔길

 

아이타쿠테 아이타쿠테

逢いたくて 逢いたくて

보고 싶어서 만나고파서

 

아아 요코스카와···

あゝ横須賀は…

아아 요코스카는···

 

코코로가유레테 요아케데스

心が揺れて 夜明けです

마음이 요동치며 새벽입니다

 

2 =========================

이마데모키코에루 이신노코에가

今でも聞える  維新の声が

아직까지도 들리네 유신의 목소리가

 

오료오와아나타노 온나데스

お龍はあなたの 女です

오료오는 당신의 여자랍니다

 

히토리봇치요 코레카라사키와

ひとりぼっちよ これから先は

외톨이 되었네요 이제부터 앞으론

 

사비시쿠테 사비시쿠테

淋しくて 淋しくて

쓸쓸하여서 허전하여서

 

아아 요코스카와···

あゝ横須賀は…

아아 요코스카는···

 

나미다데유레테 요아케데스

涙で濡れて  夜明けです

눈물로써 젖으며 새벽입니다

 

3 =========================

겟킨하지케바 하마유우카오리

月琴弾(はじ)けば 浜木綿(はまゆう)かおり

월금을 튕기노라면 문주란의 향기

 

아나타노에가오가 우카비마스

あなたの笑顔が 浮かびます

당신의 웃는 얼굴이 떠오릅니다

 

토오쿠히로가루 센카이하토바

遠くひろがる 扇海(せんかい)波止場

저 멀리 펼쳐지는 센카이 부둣가

 

욘데미루 욘데미루

呼んでみる 呼んでみる

불러나 보네 소리쳐보네

 

아아 요코스카와···

あゝ横須賀は…

아아 요코스카는···

 

이치즈나코이노 요아케데스

一途な恋の 夜明けです

한결같은 사랑의 새벽입니다

 

お龍恋唄 - 永井みゆき 発売日期 : 2014年04月23日 <テイチク>

 

お龍[오료오]와 坂本龍馬[사카모토 료오마]

お龍[오료오]는 楢崎 龍[나라사키 료오]로 에도(江戸)시대 말기부터 메이지(明治)시대의 여성.

생애는 1841년 7월 23일 - 1906년 1월 15일.

 

황족(皇族)을 모시는 의사(侍醫)의 장녀로 京都(교오토)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죽고 곤궁한 때에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와 1864년 5월 처음 만난 뒤에 아내가 되었음.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1836년 1월 3일 - 1867년 12월 10일)는 도사 번(土佐藩)의 하급 무사(武士) 출신으로 무역회사와 정치조직을 겸한 亀山社中(뒷날의 海援隊)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삿쵸오 동맹(薩長同盟)의 알선과 대정봉환(大政奉還-쇼오군[将軍]의 막부 정권을 조정에 되돌려 줌)의 성립에 진력하는 등, 막부(幕府) 타도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영향을 끼친 유신(維新) 개혁 지사(志士)로 그를 소재로 한 노래와 영화,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졌음.

 

お龍[오료오]의 집안은 원래 제법 부유하였으나, 아버지가 병으로 죽은 후에 가구나 옷가지 등을 팔아 근근이 생활하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나쁜 사람”에게 속아 여동생 起美(카츠미)는 島原(시마바라)의 견습 기생으로, 光枝(미츠에)는 大坂(오오사카)의 유곽(遊廓)으로 팔려 간 것을 알고서 칼을 품고 죽을 각오로 남자들을 상대로 싸워 동생들을 되찾아온 모험도 있었다고 함.

お龍[오료오]의 젊은 시절의 사진

 

1866년 1월 료오마(龍馬)의 중재로 삿쵸오 동맹(薩長同盟) 성립 직후의 寺田屋(테라다야) 사건에서 お龍[오료오]의 재치로 죽을 뻔한 위기를 벗어난 료오마(龍馬)와 부상당한 치료를 위해 3월~4월 가고시마(鹿児島) 주변의 온천을 둘이서 순회했는데 이것은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이 되었음.

료오마(龍馬)와 결혼 후에도 여전히 곤궁하여 “날마다 먹는 둥 마는 둥” 물질적으로는 실로 한심한 살림이었다고 함.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음.

 

료오마(龍馬)가 1867년 12월 10일 교오토(京都)의 近江屋[오오미야]사건에서 에도막부(江戸幕府)를 옹호하던 京都見廻組(라는 說이 현재는 유력함 - 처음에는 新選組라는 설이 강력했음)에 의해 암살당한 후, 각지를 떠돌다가 1875년에 노점상인 西村松兵衛(니시무라 마츠베에)와 재혼하였으나, 만년은 몰락하여 가난 속에서 1906년 1월 15일에 66세의 나이로 죽었음.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와 お龍[오료오]의 사진

 

그녀의 무덤은 요코스카 시 오오쓰(須賀市 大津)의 信楽寺(신교오지-신교오 절)에 있음.

오랫동안 묘비를 세울 수 없었으나, 죽은 지 8년 후인 1914년 8월에 여동생 中沢光枝(나카자와 미츠에)가 시주(施主)하고 西村松兵衛(니시무라 마츠베에)의 찬조로 묘를 건립하였는데 묘비에는 남편인 西村松兵衛(니시무라 마츠베에)가 아닌 「贈正四位阪本龍馬之妻龍子之墓」라고 하여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의 아내 무덤(龍子之墓)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

 

2010년 1월 15일 横須賀市(요코스카 시)의 信楽寺(신교오지-신교오 절)에서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사후 143년 만에 합동위령제가 열렸음.

お龍[오료오]의 무덤과 묘비

 

격동의 막부 말기...
질풍노도의 시대를 온몸으로 맞선 사카모토 료마와 그의 연인 오료(본명 나라사키 료, 楢崎龍)...!!!
훗날 부부의 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은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사츠마번 키리시마온천, 1866)이란 진기록을 남겼다.



[사카모토 료마(1835-1867)].

お龍( 본명 나라사키 료, 楢崎龍 1864~1906)

坂本龍馬と結婚した「おりょう」

 

おりょう(お龍)の父は今でいう医者で、子供時代は裕福な家庭に育っています。京都に生まれたおりょうは、「京美人」と称される美貌の持ち主で、生け花に香道、茶の湯も習っていたため所作も美しかったとか。

そして慶応2年(1866年)6月、傷が癒えた龍馬は第二次長州征伐で幕府軍と戦う長州へ向かうことになり、おりょうは途中の長崎で下船、小曾根英四郎家に預けられ、翌慶応3年(1867年)2月10日、龍馬は下関の伊藤助太夫家を借りて亀山社中(後の海援隊)の拠点を置くことになり、おりょうはここで妹起美と過ごすことに。

 

下関に滞在中の龍馬とおりょうは、巌流島で花火を打ち上げたり、歌会に出席したりしたが、 同年5月28日、龍馬はおりょうに対していろは丸事件の経過報告と、おりょうを気遣う手紙を送っているのが、現存するおりょう宛ての唯一の龍馬の手紙であるということ。尚、おりょうと龍馬が最後に会ったのは、慶応3年(1867年)9月に下関に寄港した際だったそう。

 

龍馬暗殺

慶応3年(1867年)11月15日、龍馬は京都の近江屋で中岡慎太郎と共に暗殺されたが、その時下関にいたおりょうは、血だらけの竜馬の夢を見たという話。龍馬の訃報は12月2日に下関に伝えられ、覚悟していたものの、おりょうは髪を切って仏前に添えて号泣したそう。龍馬との間に子供はなし。

龍馬は寺田屋で遭難しそうになった時から長府藩士三吉慎蔵に、もしものときはおりょうの面倒をみるように頼んでいたこともあり、また長府藩主からおりょうに扶持米が出たため、しばらくは下関で暮らしたが、海援隊でおりょうの今後のことを相談の結果、3か月後の慶応4年(1868年)3月、土佐の龍馬の実家の坂本家に送り届けられて暮らすことに。尚、三吉慎蔵には中島作太郎が正宗の短刀、後藤象二郎が国産の紙を贈ったそう。

 

 

、おりょうの晩年


安岡秀峰 – 明治37年12月15日「東京二六新聞」, パブリック・ドメイン, リンクによる

そういうわけなので、おりょうは明治7年(1874年)頃から勝海舟の紹介で、神奈川宿の料亭田中家で仲居として働き、横須賀の行商人(回操業)の西村松兵衛と知り合い、明治8年(1875年)34歳の頃、旧海援隊士安岡金馬の媒酌で再婚、西村ツルと名乗って横須賀に住むように。

再婚相手の西村松兵衛は、寺田屋時代からの知り合いだったという説もあり。松兵衛との入籍後は母の貞を引き取り、妹の子を養子としたが、おりょうが50歳の頃、母と養子が相次いで亡くなったということ。おりょうは幸せとは言えず、貧乏長屋暮らしでアルコール依存症の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

 

가수소개

이름: 永井みゆき [ながい みゆき 나가이 미유키] 日本의 가수

본명: 永井みゆき

생일: 1975년 9월 22일 혈액형: A형

출신: 大阪府岸和田市 出身

취미: 스노보드[snow board]. 축제. 그림그리기.

특기: 주산[초단]. 일본 춤[藤扇流]. 다도(茶道)[裏千家].

데뷔: 1992년 2월 21일 소니 레코드에서 「大阪すずめ」로 데뷔.

 

大阪府 岸和田市[오오사카부 기시와다시] 출신.堀越[호리코시]고등학교 졸업. 法政[호세]대학 중퇴. 1988년 제6회 関西[칸사이] 엔카 대상에서 그랑프리 획득. 이듬해 상경하여 작사가 たかたかし의 내제자가 됨.

1992년 2월 21일 소니 레코드에서 싱글「大阪すずめ-오사카 참새」로 16세의 여고생 엔카가수로 데뷔. "일본의 소녀가 여기에 있습니다."를 구호로 내세우며 사랑스러운 외모와 상큼한 목소리로 유명해짐.

1992년 제34회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신인상[엔카 · 가요부문]을 수상.

2001년 데이치쿠로 이적하여 토끼띠 동갑내기 上杉香緒里[우에스기 카오리], 山口ひろみ[야마구치 히로미]와 「レインボーうさぎ組 - 무지개 토끼 팀」도 결성.

 

 

 

 

 

 

[坂本龍馬]

 

日本人들이 가장 尊敬하는 1位 人物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라는 明治(메이지) 維新의 先驅者다.

日本 歷史를 通하여 數많은 英雄豪傑과 綺羅星 같은 政治家가 輩出되었음에도 不拘하고 어떤 理由로

人物이 그들을 모두 제치고 現代 日本社會에서 不動의 1位를 維持하고 있는 것일까?

 

료마는 도사번(土佐藩, 現 고치縣)의 下級에 屬하는 土着 武士의 2男3女 中 막내로 태어난다.

12살에 동네의 書堂(楠山塾)에 入學했으나 問題兒로 烙印 찍혀 退學 當하고 만다. 이 事實로 보아

그는 學問과는 因緣이 먼 듯하다. 以後 14살에 劍道를 始作하여 도사의 히네(日根野弁治) 道場에

다니다가 本格的인 劍道 修行을 爲해 江戶(에도), 卽 <지금의 東京>에 進出한다.

 

에도에 進出한 료마는 當時의 最高 劍術家의 한 사람인 치바(千葉定吉)와 사쿠마(佐久間象山)로

부터 徹底한 劍術家로서의 修練을 받는다. 이런 저런 見聞과 西洋文物에 對해 工夫하며 故鄕에

머물던 中, 아직 劍術이 境地에 오르지 않았다는 判斷이 서자, 다시 에도의 道場으로 復歸한 그는

以後 3年 餘 間 오로지 劍術修練에 熱中하여 北辰一刀流 免許를 取得한다.

 

이로 보아 료마는 이미 當代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을 程度의 높은 武藝를 몸에 지닌 人物로

評價된다. 료마의 一代記를 小說化한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坂本龍馬’를 參考하면,

어느 날 이 道場에서 修練 中인 同僚가 남의 物件을 훔쳐 困境에 빠지자 그 親舊를 逃亡하게 한

逸話가 傳해진다.

 

當時 武藝界의 原則으로 보면 도둑질을 한 武士는 割腹自殺로 名譽回復을 해야 했는데 료마는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自身의 行動을 反省하고 改過遷善하는 게 낫다는 判斷을 한 것 같다.

以後 그의 一生 곳곳에서 이러한 現實妥協 精神과 實利的 精神을 찾아볼 수 있는데, 當時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츠마(薩摩, 가고시마)와 조슈(長州, 야마구치) 藩의 同盟을 成事시킨 삿초同盟과

다이세이 호칸에서 보여준 그의 妥協術이 그것이다.

 

當時의 武士 階級들은 長劍을 차고 다니는 것이 流行이었다. 어느 날 료마의 故鄕 親舊가 오랜만에

그를 만나니 短刀를 차고 있었다. 왜 短刀를 차고 있느냐고 물으니 “實戰에서는 짧은 칼이 휘두르기

便하지”라 하기에 옛 親舊도 共感이 가는 터라 納得을 하고 짧은 칼을 차고 다녔다.

 

다음에 만났을 때 親舊가 短刀를 자랑하자 이번에는 拳銃을 내밀며 “銃 앞에서는 칼 같은 건

無用之物이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親舊는 拳銃을 사서 잡고 다녔다. 세 번째 만났을

때 親舊는 멋진 拳銃을 내보이며 자랑하자 료마는 萬國公法(國際法) 冊을 내밀며 “只今부터는

世界를 모르면 안되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한 발 앞서가는 료마에 미칠 수 없음을 안 親舊는 여기에서 抛棄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료마의 一生은 그의 當代에는 脚光받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露日戰爭 때 ‘皇后’의 꿈에

어떤 健壯한 사나이가 나타나 “日本海軍은 반드시 이깁니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健壯한

사나이가 바로 료마였다는 것이다.

 

當時 皇后는 료마의 모습을 잘 몰랐는데 宮內의 大臣이 寫眞을 보여주자 “틀림없이 이 人物이다”

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世間에 傳해지게 되고 當時의 日刊紙가 이를 크게 報道함으로써 日本 國民들

사이에 료마 붐이 일게 된 것이다. 이후 료마는 日本 國民의 가슴속에 가장 尊敬하는 人物로 새겨져

지금도 變함없이 그 人氣를 維持하고 있는 것이다.

 

明治維新은 日本의 幕藩 體制를 解體하고 中央 統一 權力의 確立에 이르는 廣範圍한 變革 過程을

總稱한다. 國을 近代化 시킨 先覺者 朴正熙 . 그는 韓國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임에 틀림없다.

 

(出處 : 近着 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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