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반야월 선생과 ‘산장의 여인’

Jimie 2022. 9. 26. 21:40

반야월 선생과 권헤경의

‘산장의 여인(山莊의 女人)’

 

반야월 선생이 노랫말을 쓴 수많은 가요 중에서 권혜경씨가 불러 히트한 <산장의 여인>에 얽힌 이야기다.

 

한때 가수로서 인기절정을 달렸지만, 권혜경씨의 인생은 기구했다.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 가수가 된 직후인 1950년대 말부터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은 뒤 '호반의 벤치'와 '동심초'는 병상에서 녹음을 해야 할 정도였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지만 인연이 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련을 이기기 위해 불교에 귀의한 그는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다. '대명화'라는 법명을 받고 70년대 이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재소자들을 격려해 수많은 수인들로부터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했다.

 

심장판막증, 후두암 등 각종 병마로 평생을 투병하였으며 인생 말년 14년간 충북 청원군 남이면 산속에 홀로 살다가 2008년 청주 효성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

 

생전에 결혼은 하지 않아 자식은 없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되는 <산장의 여인>처럼 외롭게 일생을 마쳤다.

 

본명 : 권오명.

1931년 강원 삼척 출생.

 

https://www.youtube.com/watch?v=N7myY7OTVB4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위치한 국립 마산 병원의 산장 병동을 무대로 한 대중가요이다.

 

<山莊의 女人>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2*♬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러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마산 출신의 작사자 반야월은 6ㆍ25 직후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한번은 국립 마산 병원[마산 결핵 요양소]로 환자 위문공연을 가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구성지게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보니 하얀 옷을 입고 객석 뒤편에 앉아있는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더란다. 그래서 공연 후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에 있는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병사(病舍)와 부속건물의 잔해>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를 설립하면서 가포 결핵 요양소가 시작됨

1946년 국립마산요양원

 

<국립마산결핵병원 건너편 '산장병동'이 있었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다.

카티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의 흔적이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남은 잔해다.

▲ 병사에서 멀지 않는 곳에 남아있는 성모마리아상

 

지금 같으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엔 요양 중 사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외롭게 투병중인 이 미모의 젊은 여인에게 마음이 끌려 쓴 가사가 <산장의 여인>이다.

 

지금 같으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엔 요양 중 사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외롭게 투병중인 이 미모의 젊은 여인에게 마음이 끌려 쓴 가사가 <산장의 여인>이다.

 

<한국결핵협회 발간『한국결핵사, 1998년』에 실린 2인병동 카티지>

‘ 山莊의 女人"山莊

 

국립 마산 결핵 병원(가포동)의 본관 건너편 숲속에 있었던

산장은 일제 때 세워진 카티지(cottage)로 2인용 병사(病舍)였다.

 

이 숲속에는 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이 있었는데,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지금은 잔해만 남아 있다.

<한국결핵협회 발간『한국결핵사, 1998년』에 실린 2인병동 카티지>

 

이후 이 가사는 마산 결핵 병원에 입원해 있던 작곡가 이재호 [1914~1960]에게 넘겨져 곡으로 완성되었다. 이재호는 그 자신이 마산결핵병원에 요양했던 일도 있고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다고 한다.그러니 반야월의 가사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다.

그 뒤 1957년 KBS 중앙 방송국의 전속 가수로 있던 권혜경이 불렀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권혜경씨는 자신의 인생 역정이 <산장의 여인>의 가사와 너무 비슷해 이 노래의 작사자를 원망하기도 했다.

‘노래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말도 나왔다. 그녀는 ‘열렬한 연애를 한번 해 보는 게 꿈’이라고 했으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의 재소자 시설을 찾아다니며 위문과 강연 등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재소자들로부터 ‘어머니’로 불렸다고 한다. 이 같은 봉사활동으로 1982년 세계 인권 선언 기념일에 ‘인권유공표창’을 받는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강원도 삼척 출신인 권혜경이 마지막으로 산 곳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이다. 그녀는 여기에서 1994년 5월부터 14년을 살았다. 세상 떠나기 3년 전쯤 이곳에 찾아온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씨에게 자신의 묘 앞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집안의 냉장고에는

‘나 죽으면 연락해 주세요.

손성미, 전화 02) 907-XXXX'

이라고 쓰여진 메모지가 한 장 붙어있었다고 한다.

*손성미는 셋째언니 딸로 서울에 사는...

 

권혜경씨는 2008년 5월 25일 영면했다.

 

.

권오명(權五明)

 

강원도 삼척시에서 세무서원이었던 아버지의 2남 4녀 중 넷째로 1931년 11월 12일 태어났다. 의정부로 이사, 대문을 세 번이나 열어야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의정부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동구여상을 졸업한 후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 수학하였으나 양반집 부모의 뜻을 따라 조흥은행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녀. 스물 여섯이 되던 해인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가수모집에 응시, 제2기 전속가수로 입사, 다음 해인 1957년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산장의 여인'을 불러 유명해졌다.

 

'사랑이 메아리칠 때', '바닷가에서'의 가수 안다성 씨, 그리고 영화배우 박노식 씨의 동생인 박노흥 씨 등이 그녀의 방송국 입사 동기다.

 

그러나 부모는 가수활동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심지어 '풍각쟁이 광대'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부모의 뜻을 거역했다는 배신감으로 그녀가 번 돈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부모와는 그 후 쉽사리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점차 부친은 어느 정도 이해해 주기 시작했지만 정작 어머니는 끝내 용서치 않은 채 갑자기 타계했기 때문에 권혜경 씨 입장에서는 당시 받은 충격을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대견하다 싶은 일이라도 생기면 먼저 어머니 무덤부터 찾곤 했다.

 

예명 '권혜경'은 본인 스스로 지었다.

특히 '벼슬 경(卿)'자를 이름에 선택했을 만큼 엘리트 의식 또한 강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 때까지 가요의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창법과는 다른 클래식한 발성으로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후 '첫사랑의 화원', '동심초', '호반의 벤치', '물새 우는 해변', 등을 불러 1950년대 후반의 최고 인기 가수로 군림했으나 데뷔 2년 후인 1959년 그녀 나이 스물 아홉 살에 심장판막증 판명을 받으면서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심장판막증과 그 후유증으로 발병한 후두암으로 시작된 투병생활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결국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본래 수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절에서 목숨을 건진 후 불자가 된다.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도선사의 청담(淸潭)스님으로부터 하루 5천배씩 절을 하라는 명을 받고 또 다른 힘든 고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대명화(大明華)'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는 청신녀(淸信女)라 이름 지었다.

 

한 때 '산장의 여인'을 만들어 부르게 한 작사가 반야월 선생에게. '하필이면 슬픈 노래를 내게 주어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게 했느냐'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전해 지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러한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스스로 남은 인생 모두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근 50여 년 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사형수, 무기수, 10대 범죄자 등 재소자들을 격려해오고 있어 수인들 사이에서 지금도 '어머니'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다.

교도소 위문공연, 강연 만도 4백여 차례. 이러한 공로로 권혜경은 제 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 표창을 비롯해 현재까지 표창 만도 5백여 회 수상했다.

 

1994년 충북 청원군 남이면의 한 농가에 정착했고 그후 말년 14년을 그녀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되는 그녀의 히트곡 '산장의 여인' 노랫말처럼 홀로 적적히 노년을 지내다가 '첫사랑의 화원'처럼 꽃 피고 새 울던 그 날, 2008년 5월 25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본명 : 권오명.

1931년 강원 삼척 출생.

 

1956년 KBS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

이듬해 '산장의 여인'을 발표하며 데뷔,

이후 '호반의 벤치', '동심초', '물새 우는 해변' 등을 발표.

 

60년대 전성기 시절 심장판막증, 결핵 등

병마와 싸우며 활동, 이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재소자를 위한 4백여 차례 봉사활동을 펼쳐 수인들 사이에서 '어머니'라 불리기도 했다.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던 그는

제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표창을 비롯해 5백여 회 표창을 수상했다.

 

2008년 5월 25일 타계.

 

현재 청주 일원을 중심으로  '권혜경가요제', '노래비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수목장 모습;

둘째 언니 권오택씨(당시88세) 와 조카 원유택씨

 

 

좌로 부터 조미미, 권 혜경, 김세레나, 김 하정, 양 미란

 
https://www.youtube.com/watch?v=N7myY7OTV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