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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샹송가수 .. '황혼의 엘레지'의 주인공, 「최양숙」

Jimie 2022. 7. 4. 20:53

 

[박성서 평론] 우리나라 최초의 샹송가수 최양숙이 사는 이야기

■ ‘눈이 내리는데’, ‘가을 편지’, ‘황혼의 엘레지’의 가수 최양숙, 돌아오다



‘눈이 내리는데’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샹송가수라 불리며 ‘가을편지’, ‘세노야’ ‘황혼의 엘레지’ 등으로 잘 알려진 가수 최양숙 씨가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얼굴도 이제는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음에도 그 스스로 이름까지 바꿨다. 대중들로부터 잊혀진 채 그저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다. 그러나 노래만큼은 영영 떠날 수 없어서였을까, 그가 오랜만에 대중들 앞으로 돌아왔다. 2015년 11월,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린 ‘박성서의 토크 콘서트-최양숙 가을음악회’ 무대에서다.

최양숙은 서울음대 성악과에 재학 중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합창단에 들어가 활동하던 중 당시 라디오 드라마 ‘어느 하늘아래서’의 주제가인 ‘눈이 내리는데’를 첫 녹음한 이후 영랑의 시에 손석우 선생이 곡을 붙인 ‘내 옛날 온 꿈이’를 음반으로 발표했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기타 반주에 맞춰 최양숙은 자신의 히트곡과 더불어 데뷔 당시 일화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아름다운 외모와 성악에 기초한 클래식한 창법으로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가수 최양숙, 그녀가 살아가는 이야기, 무대를 떠난 이후 이십년 간의 이야기.

글ㅣ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ㅣ장성하(사진작가)



■ 시시때때로,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날라드는 ‘수신자 없는 편지’

최양숙 - 가을 편지 (1971 초판) 고은 작사

https://www.youtube.com/watch?v=wiVT5bJ1jiE 

가을편지

고은의 시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다. 선율을 모르는 채 그냥 읽어도 그리움의 리듬이 완연히 느껴지는, 이 노래의 주인공 최양숙씨.

최양숙(崔良淑), 본명이다. '양(良)'자는 '좋다, 뛰어나다, 또는 아름답다'라는 뜻을 갖고 있고 '숙(淑)'자는 '맑고 깊다, 혹은 정숙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 이름 그대로 '맑고 깊은, 그리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주로 부른' 가수였다.

“그저 평범한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은데 그 것도 쉽지 않아. 이름 석 자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병원 같은 데서 이름이라도 불리어질라 치면 누가 알아보는 것 같아 아직도 불편해. 그저 잊혀져 조용히 늙고 싶은데 말이지... ”

마치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가을편지의 한 구절처럼 살고 싶은 것일까.

서울대 성악과를 나온 음악도로 국내 최초의 샹송가수라 일컬어지며 '황혼의 엘레지' ‘모래 위의 발자국’ ‘초연’ ‘호반에서 만난 사람’ 그리고 ‘꽃피우는 아이’ ‘세노야’ 등을 발표했던 최양숙은 샹송에 관한한 독보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가창력이 뛰어났고 분위기 또한 매력적이었다.

1937년 원산에서 태어난 최양숙(83세)은 경음악평론가이자 DJ로 활동하던 최경식씨의 동생. 원산 명석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부산에서 임시로 문을 열었던 무학여중에 들어간 뒤 환도 후 지금의 서울예고에 진학한다.

당시 노래 실력이 뛰어나 서울대 음대 주최 전국콩쿠르서 '시인'을 불러 대상을 차지한 뒤 60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진학한 최양숙은 2학년 때 중앙방송국(현 KBS) 합창단원으로 입단해 활동을 시작했다.

합장단원이었던 그녀가 솔리스트로서의 자질을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이 무렵, 지휘자 이남수의 인솔로 해병대 의장대원들과 함께 한국예술사절단의 일원으로 해외 공연을 떠나던 해군 항공모함, 즉 LST 안에서였다.

여흥시간 중 게임에서 져 벌칙을 받아야 했던 그녀가 부른 노래는 샹송 '고엽(Autumn leaves)', 이어 앙코르 요청에 의해 부른 노래가 '자니 기타(Johnny Guitar)'였다. 망망대해 선상에서 반주 없이 부른 이 노래로 함께 동행 했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당시 방송국 관계자들이 이를 놓치지 않고 눈여겨보았음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 예그린 공연사진, 1962년 시민회관

■ ‘눈이 내리는데’와 ‘내 옛날 온 꿈이’를 노래하다



이듬 해, 합창단원인 그녀에게 솔로로 마이크 앞에 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대학 3학년 때였다. 무대에 서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음악부장이 찾아와 지금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를 녹음 중인데 그 주제가를 한 번 불러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처음 그녀는 거절했지만 그냥 연습 삼아 불러보자는 말에 악보를 받아 쥐고 마이크 앞에 섰다.

‘눈이 내리는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데
모두다 세상이 새하얀데

나는 걸었네 님과 둘이서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하염없이
아아 아아

지금도 눈은 내리는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데
모두다 세상이 새하얀데’

-한운사 작 ‘어느 하늘 아래서’의 주제가.

이 노래의 작곡자이자 당시 중앙방송국 가요 담당 지휘자였던 작곡가 손석우 선생의 당시 회고를 들어보자.

“중앙방송국(KBS)로부터 연속극 ‘어느 하늘아래서’의 주제가 작곡 청탁을 받았어요. 가사를 받은 나는 한운사 씨 가사에 감동했지요. 누구나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아주 쉬운 말로 씌어진, 그러면서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정경이 떠오르는 시정(詩情)... 흔히 접하지 못했던 감동이 느껴졌지요.

그날 밤 집에서 기타를 안고 앉은 나에게, 힘들지 않게 자연스럽게 멜로디를 그 가사가 뽑아 주었지요. 중간 부분이 4소절이 돼 좀 짧은 듯했지만 큰 결함은 아닌 것으로 여겨졌는데 정작 가수 선택이 어려웠습니다. 내 주위엔 별로 없는, 성량과 호흡이 충분한 가수를 곡이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며칠 후 A의 노래로 방송국에서 녹음을 했어요. 녹음이 끝나고 악단도 나도 모두 일어서려는데 조정실에 있던 조백봉 음악부장이 한 번 더 하자고 해요.

그러면서 초면의 여성을 대동하고 들어왔어요. 그녀가 누구인지 영문도 모르고 따랐지만. 그녀의 목소리로 녹음하면서 가슴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어요. 그날 밤 첫 방송엔 주제가가 A군이 아닌 그 여성의 노래가 나가고 있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KBS합창단의 최양숙이었습니다.”

한편 당시 최양숙은 이 노래가 실제로 녹음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첫 방송되는 드라마에 자신의 노래가 주제가로 방송되고 있었다. 이 드라마 제목이 '어느 하늘 아래서(한운사 극본)'이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노래가 연속극 주제가로 방송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최양숙은 서울대 음대 학장실에 불려간다. 그리고 당시 학장이었던 작곡가 현제명으로 부터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냐?’는 추궁을 당한다. 특히 노래 중 '모두가 세상이 새하얀데...' 라는 후렴구의 고음 부분에서 최양숙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 주제가는 이어 한명숙과 블루벨즈의 목소리로 '눈이 내리는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눈이 내리네 ( 최양숙)

https://www.youtube.com/watch?v=JXOwENsoog4&t=16s 

한명숙 '눈이 내리는데'

이 드라마는 당시 HLKA 라디오 연속극에 이어 이후 64년도 말부터 동양 TV(D-TV, 채널 7)에서 최초의 TV 일일드라마로 리바이벌, 제작되기도 했다. 이 때 드라마 제목은 '눈이 나리는데(황운진 연출)'. 또한 지난 2006년 ‘손석우 노래 55년’ 음반을 통해 인순이가 리메이크했다.

■ 최양숙의 또 다른 이름 ‘주미옥’에서 ‘베로니끄’까지

▲ 동료가수 한명숙(우측)과 함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 목소리의 노래가 방송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장실에 불려가 추궁까지 당했던 가수 최양숙. 당시 여건에서 명문대생이 대중가요 가수로 활동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 무렵 연습 삼아 불러보았던 또 한 곡의 노래가 '내 옛날 온 꿈이(김영랑 시, 손석우 작곡)'다. 가수 최양숙이 처음 음반으로 취입한 이 노래는 '주미옥(朱美玉)'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어 발표된다. 본인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양숙은 대학을 졸업한 것과 때를 같이해 방송국 합창단 활동을 접고 모교인 서울예고의 음악교사로 교단에 선다. 그러나 1년이 채 안 돼 교편생활을 접는다. ‘예그린 합창단’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61년 5월 16일, 라디오에서 새벽을 가르는 군가연주와 '혁명공약'을 낭독하는 아나운서의 소리에 국민들은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얼마 뒤 '국가적인 차원에서 예술 중흥을 위해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쳐 '예그린 가무단'을 창단, 합창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예그린의 단장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혁명 주체 세력' 김종필씨였다.

'단복은 계절에 따라 무상 제공', '출연료 파격 대우', '향후 무대 활동 보장' 등이 예그린 측이 내건 조건이었다. 이 예그린합창단의 월급은 당시 돈으로 무려 '오천원' 정도였다. 때문에 기성가수나 교직에 몸담은 실력자들까지 앞 다투어 응시, 경쟁이 치열했다. 예그린은 당시 악보 보는 것을 시작으로 연기, 춤까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를 요구했던 만큼 이들의 실력은 이미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

▲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린 박성서의 토크콘서트- 최양숙 가을음악회 무대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예그린은 1962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옛과 어제를 그리며 내일을 위하여’를 캐치플레이즈를 내걸고 ‘예그린악단 창립대공연 - 삼천만의 향연’의 막을 올린다. 예그린 합창단을 비롯해 예그린 관현악단, 예그린 무용단 등 총 2백 여 명 전원이 시민회관 무대에 올랐다.

당시 신문기사, ‘흥겨운 민족 정서, 예그린 악단 첫 공연을 보고’라는 기사를 보면, “옛과 어제의 찬란한 우리 문화를 되살려 내일의 위대한 민족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예그린은 대담하고도 과감한 기획을 통해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며 이어 “이원강 구성의 ‘삼천만의 향연’은 합창과 관현악, 국악과 무용, 승무와 농악으로 엮어진 하나의 교향시로 그 속에 담긴 민족정서가 한결 평화롭고 흥겹다. 무엇보다 새롭고 이채로운 것은 국악과 양악의 합주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예그린 창립공연인 ‘제1회 삼천만의 향연(1.13~17일)’에 이어 2회 ‘봄잔치(3.16~20일)’와 임시야외공연 ‘꽃잔치(4.20~29일), 그리고 3회 ’오월의 찬가(5.18~22일)’, 4회 ‘여름밤의 꿈(7.19~23일)’, 5회 ‘추석놀이(9.13~16일)’, 그리고 이듬해 63년 들어 막을 올린 ‘흥부와 놀부(1.1~1,5)’ 등의 공연을 펼치며 연일 화제를 몰고 왔다.

1년 후 예그린 창단멤버들은 해체된다. ‘예술을 그리다, 한국 뮤지컬의 미래를 그리다’는 뜻의 예그린은 이후 또 다른 변신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창작뮤지컬 발전의 큰 원동력으로 자리한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거론하기로 한다.

예그린 해체와 함께 그는 본격적으로 '최양숙'이라는 본명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첫 발표곡이 바로 박춘석 작사, 작곡의 '황혼의 엘레지'다. 1963년의 일이었다.

 

최양숙 - 황혼의 엘레지 (1964)

https://www.youtube.com/watch?v=OiuWeshUTVQ 

'황혼의 엘레지'
 
 

[오아시스레코드] 최양숙(오리지날 힛송 총결산집)

https://www.youtube.com/watch?v=kkad18XOaRg&t=11s 

 

'최양숙 오리지날 힛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