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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쇼다운 쇼' 보고 싶다

Jimie 2022. 3. 18. 11:37

[특파원 리포트] 이젠 '쇼다운 쇼' 보고 싶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입력 2022. 03. 18. 03:01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좌측).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 시각) 수도 키이우에서 교전 19일 차를 맞아 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ㆍ우크라이나 대통령 공보실

 

 

유엔 정기총회를 앞둔 지난해 8월 뉴욕경찰 쪽 정보원으로부터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뉴욕 JFK 공항을 통해 왔다”는 귀띔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이 확정돼 사전 답사를 온 것인가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방문지 분위기를 가장 잘 아는 수많은 현지 인력을 두고 의전비서관이 오는 건 이례적이었다. 그냥 비서관이 아니라 문 대통령의 ‘이미지 연금술사’ 아닌가.

 

탁 비서관이 BTS의 유엔 공연이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관람을 준비하러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 대통령 임기 최후의 카드이자 마지막 유엔 연설 주제였던 ‘한반도 종전선언’ 관련 이벤트를 추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뉴욕엔 유엔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들도 있고, 그들을 먹여 살리다시피하는 친북 교포 단체들이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을 엮어 ‘평화쇼’를 하려는 문 정부의 시도를 여러 번 감지했다. 하지만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 걸 본 적이 없다. 탁 비서관이 다녀가던 그때, 유엔에선 각국 엘리트 외교관과 정보 분석가 수백 명이 북한이 국제 제재를 어떻게 위반하고 핵시설을 어디에서 가동 중인지 담은 보고서를 만들고 있었다. 또 한편에선 한국만 빠진 채 북한 인권결의안이 작성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청와대 쇼 전문가가 다녀간다 한들 제대로 된 쇼가 진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쇼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정치는, 특히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제에선 다분히 연극적 요소가 있다. 지금 국제사회는 극단적으로 다른 두 대통령의 쇼를 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푸틴은 한때 웃통을 벗고 사냥하거나 말 타고 설원을 달리는 상남자 쇼로 일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팬데믹 이후 ‘개인기’를 못 하게 된 푸틴이 강한 러시아의 환상을 충족시키려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이 쇼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휴지가 된 루블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

 

반면 젤렌스키는 도망칠 거라던 예상과 달리 군복 티셔츠 차림으로 결사 항전을 외치는 소셜미디어 생중계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통령을 연기했던 배우 출신인 만큼 카메라 앵글부터 발성, “난 탈출보다 탄약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예사롭지 않다. 영국 유명 극작가가 “가장 깊은 진실을 연기하는 세계 최고의 배우”라고 찬사하는 그의 퍼포먼스에 여성들도 무기를 들고,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 사업 철수로 이익을 포기했다.

 

세계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열광하는 것은 불의가 득세하고 선악 구분이 모호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리더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진실 앞에 정직하고, 약자의 편에 서고, 자신의 소중한 것마저 버리는 결단력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달라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쇼’에 목말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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