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권구용 기자,조소영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16일 '독대' 오찬 회동이 당일 전격 취소됐다. 권력 이양기에 '마지막까지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구(舊)세력과 '새 정부에 일임하는 것이 옳다'는 신(新)세력 간 권력 충돌 양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오늘로 예정된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은 실무적 협의가 마무리 안 돼서 일정을 다시 잡기로 했다"며 "실무자 차원의 협의는 계속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도 서면 브리핑에서 "오늘 예정됐던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은 실무적 협의가 마무리되지 않아 일정을 다시 잡기로 했다"며 "실무 차원에서 협의는 계속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이어진 취재진과 질의응답에서 "오늘 일정을 미루기로 한 이유에 대해서는 양측 합의에 따라서 밝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셨으면 한다"며 "상호 실무 차원에서 조율하면서 나온 결과라서 어느 한쪽이 (연기 요청을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측에서도 회동 결렬 이유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상황이다.
청와대와 당선인 측은 전날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이 이날(16일) 낮 12시 청와대에서 배석자 없이 오찬 회동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대선이 치러진 지 일주일, 윤 당선인이 당선된 지 엿새 만에 이뤄지는 첫 만남으로 관심이 컸다. 특히 대통령과 검찰총장으로 인연이 있는 두 사람은 직접적인 만남을 기준으로 할 때 윤 당선인이 검찰총장 시절인 지난 2020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 이후 1년9개월 만에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윤 당선인은 이번 만남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포함)의 사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추가경정예산(추경)안 등을 건의하고, 문 대통령과 정부 주요직 인사 협조, 청와대·관저 이전 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과 이철희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이 전날 오후 만나 의제를 두고 막판 조율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양측이 입장 차가 큰 것을 확인하고 회동 연기를 선택했다는 후문이다.
이번 회동은 발표에서부터 매끄럽지 못했다. 이날 오찬 내용은 전날(15일) 오전 청와대와 당선인 측이 같은 시각 발표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14일 저녁에 보도가 되면서 혼선이 일어났다. 양 측은 보도와 관련한 책임을 전가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공기업·공공기관 인사, 김오수 검찰총장 거취, 민정수석실 폐지를 둘러싼 갈등 등이 그대로 노출되면서 양측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졌다.
국민의힘에 따르면 윤 당선인은 대선 직후 청와대에 "문재인 정권 임기 말 공기업·공공기관 인사를 무리하게 진행하지 말고 우리와 협의해 달라"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분명한 것은 5월9일까지는 문재인 정부의 임기"라며 "임기 내 주어진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신·구 권력 갈등은 윤 당선인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비판하며 이를 폐지하겠다고 한 것을 두고 확전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민정수석실 존폐 여부는 정책적 판단의 문제로 과거 국민의 정부에서도 일시적으로 폐지한 적이 있다"면서도 "다만 현 정부에서 하지 않았던 일을 들어서 민정수석실 폐지 근거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정권교체에 역할을 한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에 "대한민국 헌정사에 불법 관권선거 사례로 길이 남을 울산시장 선거공작 사건을 총괄 지휘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범죄 집단의 소굴 아니었나"라면서 "구중궁궐 청와대 내 깊숙한 곳에서 벌여온 온갖 음모와 조작의 산실 민정수석실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마땅하다"고 맞받았다.
김 총장도 양측 충돌의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검찰총장이자 윤 당선인의 후임자로 지난해 6월 취임한 김 총장은 임기가 내년 5월까지 1년여 남아 있다. 새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되는 데, 윤 당선인의 최측근 인사가 '자진사퇴'를 언급하면서 갈등의 불씨로 작용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전날 라디오에서 "김 총장이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해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구 권력간 신경전이 '오찬 취소'로 드러나면서 윤 당선인의 취임 전까지 양측의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될 것이란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윤 당선인은 초창기 국정 운영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문재인 정부와의 차별화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이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수록 양측의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한때 세상을 지배했지. 내 말 한마디에 바다가 출렁거렸어… 이제는 사방 벽에 에워싸여 깨닫네. 내 성(城)은 소금과 모래 기둥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권력의 몰락을 풍자한 이 노래의 표지그림은, 프랑스 7월혁명을 찬미한 명화입니다. 그렇듯 웅장한 리듬을 타고 관중이 터뜨리는 떼창이 민중의 함성 같기도 합니다. 조국 전 장관이 민정수석 시절 페이스북 첫 화면에 올려, 자신의 운명을 내다본 선곡 같기도 하다는 얘기가 나왔지요.
고대 그리스 디오니시우스 왕은 신하 다모클레스가 권력을 부러워하자 왕좌에 앉아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천장에는 한 가닥 말총에 매달린 칼이 머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권력자가 방심하거나 오만해져서 칼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순간 '다모클레스의 칼'은 떨어져 내립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에 출근한 첫날, 민정수석실 폐지와 특별감찰관 임명을 선언했습니다. 민정수석실은 5대 사정기관을 좌지우지하며 권력 수호에 앞장서 온 '호위 무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운명을 결정할 온갖 정보가 쌓이고, 무소불위 권한을 전방위로 휘두를 수 있어서 '권부 안의 권부'로 불립니다.
그래서 민정수석실 폐지는 일단, 제왕적 대통령을 떠받쳐온 한 축을 버리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권력의 단맛에 빠지지 않겠다는 경계의 몸짓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돌아보면 민정수석실이 대통령 지키기에 골몰하느라 친인척 비리와 측근 전횡에 눈감은 결과가 대통령을 어떻게 만들었던가요. 권력의 허리가 꺾인 채 국민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대통령이 한 둘이었던가요.
문재인 정부가 끝까지 임명하지 않은 특별감찰관 자리를 윤 당선인이 되살리겠다는 것 역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뜻일 듯합니다.
하지만 제도와 자리가 있건 없건, 모든 것은 권력을 쥔 사람이 할 나름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새로 법무비서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름만 바뀌었을 뿐 민정수석의 역할과 기능을 유지했다는 게 초대 법무비서관의 증언이었지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영장심사에서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이 법" 이라며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습니다.
권력이 위험한 것은 강력한 중독성 때문입니다. 누구나 권력을 잡으면 마음껏 휘두르고 싶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절반만 행사해야 한다"는 김종필 전 총리의 어록을 떠올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