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공군 MiG-29 전투기. [뉴시스]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갓 독립할 당시 세계 최정상급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최신 주력 전투기 Su-27과 MiG-29는 물론, 세계 최대 초음속 전략폭격기 Tu-160 블랙잭 등 1100여 대에 달하는 군용기를 보유했다. 그러나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우크라이나 공군력은 붕괴했다. 2월 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에 직면했을 때 우크라이나 공군력은 한 줌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공군의 전투기 수는 70대가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 주둔한 전투기 가운데 우크라이나가 인수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전력은 Su-27 32대와 MiG-29 37대뿐이다.
‘적당한’ 성능으로 설계된 MiG-29
특히 우크라이나 공군이 보유한 초기형 MiG-29 성능은 여러모로 문제였다. 전투기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RD-33 엔진의 추력은 동급 전투기보다 우수한 편이었다. 문제는 추력 외 나머지 요소가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문제가 400시간에 불과한 엔진 수명이다. 비슷한 시기 미국이 개발한 동급 전투기용 F404 엔진 수명 4000시간의 10분의 1에 불과한 수준. 보통 전투기 조종사의 기량을 유지하려면 연간 150~200시간 비행 훈련이 필요하다. MiG-29의 경우 통상적인 훈련만 해도 2~3년마다 엔진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가난한 MiG-29 운용 국가들은 비행시간을 크게 줄이거나 엔진 수명을 넘기고도 전투기를 띄우는 실정이다.
미사일보다 짧은 레이더 사거리
전투기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더와 전자장비 성능도 취약하다. MiG-29에 탑재된 R-27 중거리공대공미사일의 사거리는 적외선 유도형인 R-27ET 버전이 약 30㎞, 레이더 유도형인 R-27R가 80㎞ 정도다. 그런데 MiG-29 초기형의 N019 레이더는 적 전투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최대 70㎞, 적 전투기를 추격할 경우 최대 35㎞밖에 탐지하지 못한다. 아무리 긴 사거리의 미사일을 장착해도 레이더 성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MiG-29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서방 전투기들의 레이더는 4~8개 표적을 동시 추적해 2~6개에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반면 MiG-29는 최대 2개 표적을 추적해 그중 1개 표적만 공격할 수 있었다.
러시아 공군 Su-35 전투기. [뉴시스]
21세기 최초이자 사실상 유일한 에이스 파일럿에겐 ‘키이우의 유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키이우의 유령은 당초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떠돌던 ‘도시전설’ 취급을 받았으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 등은 “키이우의 유령은 실존하는 우크라이나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 직전 MiG-29 6대를 MiG-29MU1 버전으로 개량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14년 크림반도 사태 이후 러시아로부터 부품 수급이 불가능해진 MiG-29를 어떻게든 계속 유지하려는 자구책이었다. 기체 수명 연장을 위한 조치와 일부 전자장비 교체 위주의 사업으로, 비약적 성능 개량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구식 전투기로 어떻게 러시아 최신 전투기들을 상대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고성능 추력편향 레이더, 최신 공대공미사일로 중무장한 Su-35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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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공중전에서 중요한 요소는 위치와 스피드다.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전투기를 띄워 고도와 속도에서 우위를 점한 우크라이나 MiG-29는 저공비행으로 적기를 비교적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MiG-29에 탑재된 헬멧 장착 조준기 역시 공중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우크라이나는 ‘SURA-M’이라는 헬멧 장착 조준기를 생산해 러시아에 납품하고 자국 공군용 전투기에도 탑재했다. 이 장비는 조종사가 고개를 돌려 적기를 보면 자동으로 미사일 조준이 되는 장치다. 적기의 꼬리를 물기 위해 격렬한 공중 기동을 할 필요가 없어 근접 공중전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군 전투기에도 모두 달려 있는 장비이기에 우크라이나 MiG-29만의 절대적 강점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MiG-29가 러시아의 최신 수호이 전투기들에 결코 밀리지 않게 해주는 ‘비장의 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월 27일 우크라이나 정부가 SNS에 올린 에이스 파일럿 ‘키이우의 유령’ 관련 홍보물. [우크라이나 정부 공식 트위터 캡처]
우크라이나 결집시킨 ‘희망’
그럼에도 대통령까지 나서 키이우의 유령을 언급하는 이유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키이우의 유령은 개전 초 패배감에 사로잡힌 우크라이나군과 국민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우크라이나군과 국민은 무섭게 결집해 러시아군을 각지에서 격파하고 있다. 40년 전 나토가 MiG-29에 부여한 별명은 ‘펄크럼’(Fulcrum: 버팀목·지지대)이었다. 그 별명처럼 펄크럼을 탄 유령이 우크라이나인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30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