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민해방군군가(中国人民解放军军歌) 작곡가 <정율성선생>
중국애국가 다음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곡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军歌)>는 중국 군사 퍼레이드 혹은 중요한 국가행사에서 꼭 등장하는 유명한 해방군의 군가(军歌)입니다.
정율성선생은 본명은 정부은이고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중국 근대사에서 중국애국가를 작곡가 <섭이>와 함께 걸출한 작곡가, 중국무산계급혁명 음악사업의 개척자이며
중국에서 <군가(军歌)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1933년 정율성은 당시 중국수도였던 남경에 와서 조선인의 항일독립운동조직인 <의렬단>에 참여 하였고 한켠으로 항일운동을 하고 한켠으로는 음악공부를 하였다.
1939년 정률성은 유명한 <연안송(延安颂)>를 작곡하여 단번에 유명해졌으며 1939년 중국공상당에 가입,그해 <팔로군진행곡(八路军进行曲)>을 작곡하였으며.. 곡명을 <중국인민해방군군가(中国人民解放军军歌)>로 바꿨다. 1950년에 중국국적을 취득하였고 북경에 정착하였으며 1976년에 타계하다.
어린시절:
정율성의 본명은 정부은으로 1914년8월13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였났으며
어린시절 말더듬병으로 알았지만 나중에 음악적 재능이 발견되고 나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919년 광주에서 일본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삼일 운동”이 있었으며 정율성은 부친과 형의 애국주의 사상으로 항일(抗日)에 강한 감회를 갖게 된다.
1933년에 정율성의 3명 형들은 한반도와 중국 혁명사업에서 목숨을 잃었고
19세의 정율성은 한반도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젊은 분들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와서 조선재중항일단체서 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하였고 조선혁명조직인 '의열단'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항일조직에도 가담하였다.
1936년 정율성은 나청(罗青)의 소개로 항일구망조직인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가입하여 이사를 지냈으며 뷔작 '오월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1937년 <77사변>후 정율성은 유명한 작곡가인 셴싱하이(冼星海) 와 알게 되었고 장기적으로 함께 합작으로 영화주제곡, 레코드취입 등을 하였다.
같은해 10월에 정율성은 가슴 가득 열정을 품고 연안(延安)을 찾아간 그는 섬북공학과 루쉰예술학원 음대에 차례로 입학하였다.
1938년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지도를 했으며 로쉰예술학원에서 성악교원으로 일하였으며 그후로 많은 곡을 만들었고 그중 가장 유명한 <연안송(延安颂)>, <연수요(延水谣)>, <보위대우한(保卫大武汉)>, <팔로군진행곡(八路军进行曲)>곡들은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1939년 1월에 정율성은 정식으로 중국공상당에 가입하고 1942년에 정설송(丁雪松)분과 결혼을 하였다.
1945년 해방으로 정률성은 부인과 함께 한반도에 돌아와서는 북한 노동당 황해도위 선전부장, 북한 인민군 클럽부장, 북한 인민군 협주단장, 북한 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군민에게 <8.15송가>, <조선인민진행곡>, <조선해방진행곡>, <신중국노래하다>, 대합창 <도문강>,<동해어부>등 10여부의 작품을 만들어 주었다.
1950년에 중국으로 다시 들어오면서 중국 국적을 정식 취득하였고 후에 북경인민예술극장에 배치되어 일하였다.
정율성선생은 1950년 12월 중국인민지원군 창작팀의 일원으로 유백우(刘白羽), 오양산존(欧阳山尊), 능자풍(凌子风), 리잉(李瑛) 등 과 함께 조선으로 갔으며 많은 곡을 만들었다.
1956년 선생은 중앙악단(현 중국 교향악단) 창작실로 옮겨 작곡을 계속 하였으며 공장·농촌·변방에 깊이 들어가 중국 땅을 답사하면서 새로운 창작 원료를 찾아다녔고, 노농병 창작을 위해 수많은 음악 작품을 썼다.
정율성선생 1976년 12월 7일 베이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해 팔보산 혁명묘지에 안장되었다.
생년의 수수께끼
정율성선생은 항일운동 당시 미성년자로 변신하기 위해 네 살 낮춘 결과 어떤 기록에는 1918년생으로 적었다. 그러나 한국의 친척·친구들의 상세한 고증을 거쳐 그해의 호적 자료를 비롯한 각종 서류를 점검한 결과, 1914년생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2005년 주한 중국문화참사관인 주잉제(朱英杰) 주한 중국문화센터 주임은 "정율성선생은 항일전쟁 당시 아시아에 희망을 준 음악가일 뿐 아니라 음악으로 평화를 주창했던 대표적인 음악가"라고 말했다.
2009년 왕전(王震) 전 중국 국가 부주석은 '작곡가 정율성선생은' 서문에서 "당대에는 중국애국가를 작곡한 녜얼(聂耳), 시안싱하이(冼星海)에 이어 걸출한 작곡가였으며, 중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음악 사업의 개척자 중 한 명이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2009년 정률성선생은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등 11개 부문으로부터 <"신중국 수립에 기여한 영웅 모범 인물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2005년11월11일 한국 광주시에서 유명 작곡가 정율성선생을 기리는 제1회 광주 정율성국제음악제를 개최하였고
2009년4월 인민음악가 정율성기념관은 하얼빈시 도리구 우의로 233호에 세워져 인민음악가 정율성의 62재 혁명음악 인생을 조명하였습니다.
--------------------------이상 바이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