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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Jimie 2020. 7. 10. 07:35

추풍령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서울부산간고속도로준공기념탑[京-釜山間高速道路竣工記念塔]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 691번지 추풍령휴게소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탑으로, 1970년 12월 8일 제막식을 하였다. 경부고속도로(428km)의 중간지점(서울 기점 214.440km)인 추풍령휴게소의 해발고도 240.5m 지점에 세워져 있다.

탑신 아랫부분을 클로버 형태로 꾸민 기념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높이는 30.8m에 이른다. 기단(8단)과 탑신(69단)을 합쳐 77단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는 준공일(1970년 7월 7일) 그리고 고속도로 건설 중 희생된 77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추풍령휴게소 광장에서 기념탑으로 오르는 계단 역시 77계단으로 만들어졌다.

기단 전면과 후면에는 건설·번영·발전을 상징하는 부조작품이, 탑신 양 측면에는 번영·평화를 상징하는 여신상이 부착되어 있다. 4면의 기단에는 부조작품 외에도 ‘서울부산간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라는 글귀와 ‘고속도로의 노래’라는 시(詩), 경부고속도로 사업개요(공사기간·총연장·공사인원 및 장비·총공사비 등) 등이 적혀 있다.

 

 

 

 

 

 

‘平和統一祈願 詩碑' 一鵬 徐京保大宗師

 

 

平和統一祈願詩

 

光復當年國分斷
歡聲萬歲亦悲歌
氣毓山川祈統一
運回天地願和平


광복하던 해 나라가 분단되고
환성과 만세 또한 슬픈 노래였으라
기를 길러 산천의 통일을 기도하고
운을 돌려 세상의 평화를 바라노라.

 

 

 

 

 

 

 

 

 

 

 

 

서울부산간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서울부산간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 

■[2010 연중기획]한국 경제발전의 상징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기념탑 -주간경향

원문보기: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과속 건설’로 수많은 후유증 낳다

 

주간경향은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라는 주제로 2010년 연중기획을 진행한다. 1960~19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룬 경제 성장의 기틀이지만 그 뒤에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의 부작용이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1970년에 완공돼 우리나라 산업화의 이정표가 된 경부고속도로도 마찬가지다. 경부고속도로는 분명 한국 경제 성장의 탄탄한 밑돌이었지만 초대형 공사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사회적 후유증을 낳았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가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방문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편집자 주>


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에서 남쪽으로 여행할 때면 항상 ‘휴게소’라는 간판을 만나게 된다. 휴게소 가운데 두 곳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추풍령 휴게소와 금강 휴게소다. 상행선 추풍령 휴게소에는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있다. 기념탑에 새겨진 설명에 따르면 경부고속도로는 대구 시내 공설운동장에서 1970년 7월 7일 성대하게 거행된 준공식 이후 5개월이 지난 12월 8일 전 서울대 미술대학 송영수 교수에 의해 건립됐으며,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이뤄진 이 고속도로를 자랑하기 위해’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의 중간이며 가장 높은’ 추풍령에 높이 30.8m의 탑을 세웠다.

 

기념탑에 새겨진 ‘고속도로의 노래’


기념탑의 4면에는 경부고속도로를 계획하고 건설을 추진하던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과 다른 면에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의 7월 7일자 축사 일부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 아래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에 있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 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런 자랑이다.”

 

이 장관은 1961년 5·16 당시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유엔군 사령관이 동원하려고 했던 1군 사령관으로, 쿠데타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과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동기로, 졸업 후 성적우수자로 선정돼 박정희와 함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함께 유학한 각별한 사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두 사람이 헬리콥터를 타고 공사 현장을 시찰할 때 박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이런 데서는 각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아도 돼”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래서 5·16 쿠데타가 1군에 의해 진압되지 않은 것은 유엔군 사령관의 모호한 태도 때문이 아니라 이한림 장군이 진압을 위한 출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금강휴게소에 자리 잡은 위령탑


무엇보다 기념탑의 압권은 탑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고속도로의 노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면 누구나 기념일마다 정해져 있는 ‘○○○의 노래’에 익숙해져 있겠지만 ‘고속도로의 노래’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침 햇빛 신선한 푸른 하늘 / 산 좋고 물 맑은 고운 고을
겨레와 숨결이 배어 든 곳 / 꿈에도 내 소원 조국 번영
달려라 자주의 길 / 달려라 부강의 길
천리를 주름잡는 고속도로 / 어제보다 내일을 바라보는 / 슬기를 이 나라 자손이다.
지혜와 정성과 힘을 뭉쳐 / 조상 때 맺힌 한 이루었네
달려라 자유의 길 / 달려라 평화의 길
세계를 앞당기는 고속도로 / 빛을 향해 달리는 우리 행진 / 뒷날의 역사를 증언하라
나약과 빈곤을 불사르고 / 고난과 시난을 이겼다고
달려라 승리의 길 / 달려라 통일의 길
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

 

이 노래는 7월 7일 개통 기념식에서 대구 지역 여고생들에 의해 시연됐다. 그런데 노랫말보다도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정신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노래의 앞에 붙어 있는 서두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 한밤과 새벽의 어귀에 섰다. 천년을 몇 번씩 살아온 겨레, 또 천년을 잉태한 영원히 젊은 의욕을 안고, 역사의 경사지에서 몸을 솟구쳐 일어섰다. 결코 기적도 아닌 현실의 개척자로 영광의 자서전을 새기는 우리, 조국의 하늘과 땅과 바다에 울려 나가는 힘찬 노래.”

 

1960년대 말 이후 새로운 국가 정신을 만들어 내는데 공헌한 이은상씨가 작사한 ‘고속도로의 노래’ 서두와 가사는 박 전 대통령이 노정한 경부고속도로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개통식 축사를 통해 경부고속도로 개통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산업 발전이 아니라 ‘무한한 민족적 자신을 얻은 것’이라고 했으며,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우리 국민의 민족적 에너지와 저력을 테스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를 ‘현실의 개척자이자 영광의 자서전을 새기는 우리’라고 표현했다.

 

1968년 벽두에 박 전 대통령은 뜬금없이 ‘제2경제론’을 들고 나왔다. 경제학에서 ‘제2경제’가 전략적인 중심 산업(제1경제)을 뒷받침하는 부문을 가리킨다면 박정희의 ‘제2경제’는 물질적 산업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신적 개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을 거치면서 국가안보, 국민정신을 강조하는 사업이 강화됐으며, 국민교육헌장 제정과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제막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박 전 대통령은 이씨를 통해 또 다른 국민정신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역사적 현장은 금강 휴게소에서 찾을 수 있다.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화려한 금강 휴게소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위령탑이 서 있다. 위령탑은 기념비보다 먼저 경부고속도로 개통일에 맞춰 건립됐다. 여기서도 이은상씨의 글을 찾을 수 있다.

 

세상에 금옥보다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이 가진 피와 땀이다. 크고 작은 어떤 사업이나 피와 땀을 흘리지 않은 것이 없고, 또 피와 땀을 흘리고서 무슨 일이고 이루지 못한 것이 없다. 여기 이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야 말로 피와 땀의 결정이니 무릇 2년 5개월 동안 연 인원 890만명이 땀을 흘렸고, 그 중에서도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신 이가 77명이었다.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 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여기 그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정성들여 이 탑을 세우고 이 앞을 지날 적마다 누구나 옷깃 여미고 묵도를 올리리니 혼들이여 내려와 편히 깃드옵소서. 웃으읍소서.

 

요즈음 신세대라면 구닥다리 같은 국가정신, 민족정신이 녹아 있다고 느끼겠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하는 명문이다. 그리고 추모문에 있는 ‘산업전사’라는 말이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대의 위정자들이 개통식에 가기 전에 위령탑에 먼저 헌화하고 갔다고 하니 이 또한 당시 위정자들과 마음 씀씀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완공 이전부터 부실공사 문제 불거져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은 1967년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처음 공표됐으며, 1967년 12월 13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국가적 차원의 사업으로 진행됐고, 완공된 날 모든 언론이 한국 역사 50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로 칭송했다.


그러나 건립 과정에서부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순탄치 않았다. 세계은행(IBRD)으로부터 자금을 구하려고 했지만 IBRD는 남·북 종단도로 건설보다는 동·서 횡단도로 건설이 경제적으로 더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자금 공여를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고속도로 건설에 이용했다. 일본 경제협력기금을 통해 1968년 300만 달러, 1969년 500만 달러를 사용했다.

 

1968년 2월 1일 기공 때 공사를 철저하게 하기 위해 미국의 ‘데루 앤 캐터’ 회사 소속의 ‘D.H. 브리지’씨를 감리 책임자로 고용했지만 경부고속도로는 부실 시공으로 인한 시비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12월에 추진위원회가 조직된 지 2개월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전체 설계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가 시작됐고, 공사비 절감을 위해 당초 계획한 24m의 노폭을 22.4m로 줄였다. 좁은 노폭과 건설비 절약을 위해 중앙분리대 등 안전시설 미비는 이후 고속도로에서 중앙 차선을 넘는 정면 충돌사고로 인한 대형 교통사고 원인이 됐다. 시공 기간도 문제가 됐다. 원래 1971년에 완공하기로 한 공사는 1970년으로 1년 단축됐으며, 그나마 1969년 초에는 당시 건설부 장관에 의해 또다시 1년 단축해 1969년 중에 완공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도 전에 부실시공 문제가 나온 것도 이처럼 공기를 단축한 데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잘하고도 욕먹는’ 전철 밟지 말아야

 

개통 1년만에 전 노선에 대한 덧씌우기 공사가 착수됐고, 이로 인한 추가 소요 경비가 건설비의 10%가 되는 42억3000만원에 달했다. 완공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건설부는 대기업이 맡은 구간을 쪼개 군소 사업자들에게 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부실 시공이 발생했다. 공사별로는 삼부토건 9%, 현대건설 5.6%, 동아건설 5.4% 순으로 부실 시공이 드러났다. 다른 고속도로가 기층과 표층을 합쳐 아스팔트가 섞인 층의 두께가 20㎝ 안팎인 데 반해 경부고속도로는 7.5㎝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도 부실시공의 결과였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경부고속도로가 누워 있으니 망정이지 서 있었다면 벌써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10년이 지났을 때 전체 보수·유지비는 원래 공사비를 넘어선 상태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와 재벌 사이의 유착관계는 또 다른 부작용을 드러내기도 했다. 바로 부동산 투기다.

 

우마차가 겨우 통행하던 서울~과천~용인~오산 간을 연결하는 구한말 시대의 국도가 경수고속도로 제1차 구간으로 결정되자 주변의 지가전쟁이 점차 양성화되기 시작했다.

 

“지가 경쟁의 거점은 수원시에서 서남방 8㎞ 떨어진 서울 오산 용인 수원 도로를 연결하는 용인군 기흥면 신갈리 네거리. 12월에 접어들어 신갈리에는 하루 평균 30여대의 고급승용차가 찾아들고 말쑥한 차림의 서울의 부동산 브로커들이 50여명이나 몰려들어 황폐했던 촌락은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작년말께 한평에 최하 8원에서 최고 35원씩 매매되었던 임야가 요즘에는 10배가 껑충 뛴 최하 80원에서 최고 130원으로 땅값이 형성. 특히 낚시터와 여름철 유원지로 유명한 기호 저수지 주변의 땅값은 한평에 무려 180원으로 홋가되고 있으나 사겠다는 사람만 있고 팔겠다는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의 땅매매는 거의 전부가 비밀에 붙여져 있으며 밤에만 거래되는 두더지 작전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으로 마련되었다는 S재벌이 기호 주변의 요지 12만평을 지난 3월말까지 완전 매점해 버렸고 그 때 사들인 땅값이 한평에 단돈 20원, 지금은 이곳 땅값은 7배가 넘는 150원 꼴. S재벌 이외에 3개의 학교재벌이 신갈리 일대와 기호 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변두리지점을 약 5만평이나 매점하고 있다.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지가전쟁은 일단락된 셈이다.

 

1차 매진작전에서 엄청난 폭리를 본 일부 재벌들은 2차 작전으로 수원-신갈리 간의 땅을 매입하기 위해 소유자 확인에 나서고 있어 내년 3월 경이면 또 한번 땅값 전쟁의 바람이 불 것이라고 이곳 주민들은 내다보고 있다.”(경향신문 1967년 12월 12일자)

 

기념탑에 있듯이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이다. 또한 경부고속도로가 한국의 경제 성장 과정에서 한 역할에 대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경부고속도로를 보면서 당시 위정자들의 앞을 내다보는 눈과 희생자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슴이 답답한 것은 왜일까.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이른 시간 안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했던 그 추진력이 빚어낸 수많은 후유증 역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 후유증은 비단 공사 기간에 돌아가신 ‘산업전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 고속도로 이용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오늘 또 다른 많은 사업이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다. 때론 이러한 사업들이 국민의 여론이나 정서와 관계없이 미래를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사업들이 경부고속도로같이 미래 한국 사회에 크게 공헌할 수도 있으며, 1971년 대선에서처럼 2012년의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빠르고 일방적인 추진으로 인해 후유증이 생긴다면 우리는 40년 전에 만들어진 경부고속도로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잘하고도 욕먹는….

<박태균·서울대 교수>

 

 

* 註) 블로거- '어느 시골 소년의 추상(追想)'

(辱)한다?

(辱)먹을 사람이 있어야 욕(辱)하지.

 

(辱)먹는다?

(辱)하는 사람이 있어야 욕(辱)먹지.

 

욕(辱)이란 남을 흠집내고 욕보이는 말로 ‘욕설(辱說)’이라고도 한다.

욕은 크게 보아서 대가리(머리)·주둥이(입) 등의 비속어 및 남녀의 성기며 성행위를 지칭하는 따위, 또는 개와 같은 짐승을 가리키는 따위, 쌍스런 표현이나 ‘뒤져라’, ‘꺼꾸러져라’ 따위,  사나운 표현으로 남을 흠집내고 욕보이는 말이다.(사전)

 

***********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

비판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위업을 그 뉘라서 욕이야 하겠는가!

 

아무리 돌아보아도 천만번 잘 한 일인데...

세상 만사는 다 때가 있는 법이고 기회는 언제나 기다려주는 것도 아닌데...

 

~'공격성이나 가학성(加虐性)의 욕'이 아닌 애칭(愛稱)으로 쓰거나 농으로 한다면 모를까...그래도 그것도 아니다.

왜? 욕할 사람도 없고 욕먹을 사람도 없고, 욕먹을 사람도 없으니 욕할 사람도 없다...~

잘하고도 욕먹는...?  위 박교수의 언급은 정말 이상하다. 비판과 욕을 혼용한 것인가 오용한 것인가?

잘 했는데 왜 욕하나?

 

*만약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시의 역사나 나라가 처한 시대상황에 대하여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거나 이해하고 싶지도 않거나 무조건 반대하는 얘기만 듣고 세뇌된 사람이거나.... 그 정도라면 이건 어이 설명을 할 수가 없고, 굳이 이해하자면.....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없겠다.

 

"아무리 가난해도 왜 굶어 죽어?  라면이라도 끓여먹지"  "가뭄에 왜 모내기를 못하여 흉년이 들어?, 수도물이라도 끌어들이지"  "왜 가난해? 돈이라도 찍어 내지" ...... 아무리 상황을 몰라도 설명을 하면  알아들어야 할 일을  따지고 드는 철부지같은 막되먹은 머리들... 그렇게 도저히 사람의 말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한 사람들만 아니라면야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을  감히 욕이야 할 수는 없으리라. 순리(順理)이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일은 누구도 엄두조차 낼 수도 없었고 그런 배포도 배짱도 혜안도 웅지도 없었던 작은 새가슴 조리며 살던 우리 겨레 앞에 오천년 꿈같은 빛나는 금자탑 우뚝 세웠으니 역사에 우러러 이 어이 칭송하지 않을 수 없는 천하의 기적을 우리 힘으로 우리 앞에 있게한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 철학과 영단을 높이 기린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공표하면서, 서울에서 아침 먹고 부산에서 점심먹고 서울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이른 바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묶는 고속도로 시대가 열린다~. 1962년? 여름 어느날, 라디오 뉴스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잠꼬대 같은 소리, 뜬 구름 잡는 헛손질 같아  철없이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시골 중학교 소년은 그저 어안이 벙하였던 그 날의 충격적 기억이  지금에 더욱 새삼스레  새롭다.

 

전기도 전화도 수도도 없었던 농촌, 해마다 보릿고개 넘던 찢어지는 가난의 시절에, 한양천리 개나리 봇짐지던 나그네 길인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더니  이게 바로 그 짝이 아니던가.

(* 1945년 해방, 남북분단과 좌우익 대립의 소용돌이 정국, 1950~53년  6.25동란으로 폐허가 된 잿더미 나라...1960년대초 까지 1인당 국민소득은 미화 100달러 미만으로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것이  당시 '참혹한 한국의 참상'. 그것이었다.) 

 

꿈은 꾸는 자의 몫이던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안 되면 되게 하라.

하면 된다.

 

'공업입국, 국가재건',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강의 기적'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오천년 가난을 벗어나고자 불철주야 열성으로, 나약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의욕과 용기와 자신감,그리고 긍지와 희망을 불어 넣기에 한결같았으며 쉼표없는 새마을 노래를 계속 불러대었다.

 

새벽종이 울리고 또 새벽종이 울릴 때가 지나가도록, 

하루 25시간, 눈코 뜰새 없이  밤을 낮삼아 문자 그대로 불철주야 일만 한 일중독자들의 한 시절... 

(아마 1960년대, 70대가 그러하였고 1980년대, 90년대가 그러하였으리라.) 

 

서울부산간고속도로 건설, 울산 중화학 공단 조성, 새마을 운동, 등으로 온 나라안 산업이 활기차게 역동하던 그 사이,

거짓말 처럼 보릿고개가 없어지고 오천년 가난은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 없이 사라졌으니 실로 '꿈같은 새역사 창조의 기적'이 이 땅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위정자와 국민의 위업, 실로 장하다~, 진실로 위대하다~, 어이 아니 찬양할 손~!!!.

 

革命家 朴正熙.

명실공히, 진실로 가난을 알고 나라와 민족의 살 길을 선각.실천한 우국충정의 애국자였음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음이로다.

 

하루 스무다섯시간 뼈빠지게 일하며 앞만보고 달린 우리의 선대 어른과 선배님들, 나의 학우.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과 한 시대를 동고동락한 후배들이어 ... 아름다운 고난의 그 시절이 그립지 아니한가요. 고난을 딛고 일어선 추억이 아름답지 않은가요. 위대한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고난 세월이 벅차고 보람찬 인생 , 하늘이 내려주신 행운일 줄이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렇다.

 

춘궁기 배고픈 굶주림과 보릿고개 넘던 시절 찢어지는 가난, 이름하여 '오천년 가난'을 겪으며 살았던 소년에게, 어제일 처럼  생생히 기억나는 가난한 시골 민생이며,  구궝새 슬피울던 뒷동산, 그 때 굶주림에 지친 봄날 하루해는 왜 그리 길기만 했던지...

 

아련한 꿈길 같은 그 시절을 추상(追想)하노라면 그래도 새록새록 그리운 그 시절,

그 때 시골소년으로서야, '오천년 꿈같은 기적'앞에, 절로 찬가(讚歌)~, 노래 나오는 것을!

하늘에 소리치며 노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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