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엔 순혈 올림픽, 2021년엔 혼혈 올림픽
오키나와 출신도 배제했던 일본
이번엔 ‘재패니스 드림’ 후예들이 기수 맡고 성화 점화자 전면 등장
조선일보 입력 2021.07.24 03:28
'도쿄 상공 떠오른 지구… 코로나 시대 첫 스포츠제전 막올랐다' 개회식서 드론 1824대로 연출 -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1년 미뤄진 2020 도쿄올림픽이 마침내 막을 올렸다. 23일 일본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회식에서 드론으로 지구를 연출했다. 드론 1824대를 정교하게 조종해 만든 지구본은 올림픽으로 하나되는 전 세계를 상징한다. 이날 개막한 도쿄올림픽은 오는 8월 8일 막을 내린다. /AFP 연합뉴스
23일 오후 8시, 일본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신국립경기장)이 환해졌다. 올림픽이 57년 만에 도쿄로 다시 왔다. 1964년 가을 열린 첫 번째 대회는 일본의 전후(戰後) 경제 회복을 세계에 공표하는 발판이었다. 일본 정부는 과거의 올림픽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살려 2020년 여름의 도쿄를 장기 불황과 동일본 대지진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도약대로 삼길 원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모든 게 기대와 달랐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대회가 1년 미뤄졌고, 여전한 반대와 우려와 침묵과 부재 속에서 성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57년 새 변화가 있었다. 개회식을 보면 알 수 있다. NBA에서 활약하는 하치무라 루이(23·농구)가 일본 대표팀 남자 기수를 맡았고, 테니스 여왕 오사카 나오미(24·테니스)가 성화 주자로 등장했다. 세계 정상급 스타인 이들은 피부가 검은 ‘하푸(half·일본 국적 혼혈인)’이다.
이들의 뿌리엔 일본이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umber one)’으로 군림하며 흥청거렸던 버블 호황기의 영화(榮華)가 스며 있다. 거품이 절정이던 1980~90년대 일본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다. 전 세계에서 특히 개발도상국 젊은이들이 간절하게 ‘재패니스 드림’을 꾸며 일본으로 향했다. 하치무라와 오사카의 아버지는 각각 베냉과 아이티 출신이다. 일본 여인과 사랑에 빠져 태어난 아이들이 장기 불황의 그늘 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나 오늘에 이르렀다. 이들은 다양하고, 조화롭고, 생기가 넘치는 일본인이다.
1964 도쿄올림픽 때 일본이 총 29개 메달(금16, 은5, 동8)을 따내 종합 3위를 했을 당시 간판 스타는 유도 최초 금메달리스트 나카타니 다케히데, 남자 체조 2관왕 엔도 유키오, ‘동양의 마녀 군단’ 여자 배구팀 등이 꼽혔다. 순혈주의를 앞세우는 분위기가 공고했다. 혼혈은커녕 오키나와 사람, 아이누인, 재일동포도 감히 낄 자리가 없었다. 1964년 올림픽을 계기로 고속 성장을 질주하며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이 세계관을 확장시킨 결과가 하치무라와 오사카의 등장이다.
◇하푸가 간판이 된 2020 도쿄
열린 마음으로 맺어진 사랑의 힘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먼저 하치무라의 이야기. 서아프리카 소국 베냉에서 너무 똑똑했지만 너무 가난했던 청년 자카리 쟈빌은 1990년대 초 엄청난 경쟁을 뚫고 역대 3번째로 일본 땅을 밟은 베냉인으로서 도야마(富山)현에 정착했다. 영어 교사이던 하치무라 마키코와 결혼해 장남 루이를 낳았다. 시골 마을의 흑일점이던 루이는 어릴 적 “흑인은 가라”는 따돌림을 겪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 농구공을 잡은 이후 일본의 자랑이 됐다.
하치무라, 오사카, 사니 브라운.
키 203cm 청년이 된 그는 2019년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일본인 최초 1라운드 지명(전체 9순위)으로 워싱턴 위저즈에서 2시즌 연속 풀타임 주전으로 뛴다. 하치무라를 앞세운 일본은 최근 NBA 소속 선수가 5명인 프랑스를 평가전에서 81대75로 이겼다. 하치무라는 “어릴 적 피부색이 부끄러워 숨기 바빴던 내가 일본을 대표하는 기수로 나서다니 현실이 꿈같다. 이번 올림픽이 많은 아이에게 희망을 선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1990년대 오사카(大阪)의 한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던 아이티 남자 레오나르도 프랑수아는 오사카 다마키와 사랑에 빠졌다. 1996년 큰딸 마리, 이듬해 둘째 딸 나오미가 태어났다. 장인이 “흑인 사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의절한 까닭에 살림살이는 옹색했다. 하지만 윌리엄스 자매의 성공을 보고 당장 단칸방 거실에 금부터 긋고 딸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쳤고, 나오미가 세 살 되던 해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중학교 때 프로 무대로 뛰어든 나오미는 2018 US오픈, 2019 호주오픈, 2020 US오픈, 2021 호주오픈을 제패하며 아시아인 최초 세계랭킹 1위까지 올라 ‘일본의 테니스 여왕'으로 사랑받는다.
그는 닛신·ANA 등 일본 기업 후원이 줄이어 이번 올림픽 출전 선수 중 둘째로 많은 연간 수입(6000만달러)을 자랑한다. ‘신칸센 서브’로 불리는 시속 200km 강서브가 특기인 오사카는 “올림픽 금메달로 일본 사회에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이라고 했다.
◇국적과 생김새는 같지 않다
일본 육상엔 ‘하푸’ 스타가 여럿이다. 2016 리우올림픽에서는 아스카 캠브리지(당시 23세)가 빛났다. 캠브리지의 아버지는 자메이카인,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그가 마지막 주자로 뛴 일본 남자 4X100 계주팀은 자메이카에 이어 아시아 최초로 은메달을 따냈다. 마지막 100m 구간, 우사인 볼트(자메이카) 바로 옆에서 일장기를 달고 질주하던 캠브리지의 모습은 국적과 생김새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본 사회에 각인시켰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선 사니 브라운 압둘 하키무(22)가 나선다.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후쿠오카(福岡)로 왔다. 2019년 당시 일본 신기록(9초97)을 세운 사니 브라운은 지난달 자신의 기록을 깬 야마가타 료타(9초95)와 손잡고 일본의 사상 첫 계주 금메달에 도전한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국제 결혼 커플이 10배 이상 늘었고, 요즘 도쿄에선 10쌍 중 1쌍꼴로 국제 커플이 탄생한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늪에서 탈출할 해법을 찾는 일본에 하치무라와 오사카, 사니 브라운은 새로운 활기를 넣어주는 에너지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열리는 올림픽에도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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