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대구 대명동(大邱.大明洞) &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

Jimie 2021. 6. 6. 23:33

대구(大邱) 대명동(大明洞)의 유래

 

1592년(선조 25),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여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임진왜란이다. 1597년의 2차 침략전쟁은 정유재란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원군(援軍)을 보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번에 걸쳐 원군으로 조선 땅에 온 두사충(杜師忠)이란 풍수가(風水家)가 있었다.

 

두 번째로 올 때, 그는 조선에 가지 않겠다는 부인은 남겨두고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측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진린(陳璘, 1543~1607) 도독이 귀국하려하자 그는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조선 땅에 남았다.

 

그 후, 두사충은 호를 명(明)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의 모명(慕明)으로 바꾸고 달구현(達句縣, 지금의 대구) 경상감영 자리에 두 아들과 함께 정착하였다. 1601(선조 34년)에는 계산동으로, 그 후 다시 앞산경마장 부근으로 세거지를 옮긴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현재 대구고등학교 근처에 대명단(大明壇)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황제가 있는 북녘을 향해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대(大) 명나라를 기리는 제단을 만들었다고 해서 대명동이란 동네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사충(杜師忠)의 진실은

 

1991년 성주군에서 발간한 "내 고향 성주"라는 책에 두사청(杜思聽)라는 명(明)나라 풍수가의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 1549~1598) 장군을 따라 온 두사청은 성주와 칠곡 일대를 두루 살피고는 성주군 초전 홈실(椧谷), 대가 사도실(思道室), 수륜 윤동(倫洞), 선남 오도마을(吾道洞), 칠곡군 지천 웃갓(上枝)을 명당이라고 지목하여 "성주의 5명기(名基)"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두사청은 두사충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 많은 글에서 두사충은 한자로 <杜師忠> <杜思忠> <杜史沖> <杜士忠>으로, 또 두사청은 <杜思聽> <杜思廳>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비슷하거나 똑같은 부분이 많아서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 글에서는 그의 묘지가 있는 대구 만촌동의 묘비에 <杜師忠>으로 표기되어 있어 두사충(杜師忠)으로 썼다.

 

성주(星州) 대명동(大明洞)마을

 

대구의 대명동과 똑같은 이름과 유래를 가진 마을, 성주 대명동마을이다. 오늘은 성주의 대명동에 있는 대명단(大明壇)과 풍천재(風泉齋)를 찾아 나섰다.

 

성주에서 30번 국도를 따라 대구방향으로 가다 광영삼거리에서 다시 용암으로 가는 67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 용암면 문명2리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으로 난 마을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면 나지막한 산 속에 숨겨진 마을, 대명동이 있었다.

 

이 마을은 두사충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의 원군으로 온 유격파총 명암(明庵) 서학(徐鶴·1566∼1646)과 유격중군 명촌(明村) 시문용(施文用·1572∼1643)이 정착한 마을이다.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난 후 부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조선 땅에 남았던 것이다.

 

1637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은 조선에 남아있는 명나라 유민들을 모두 체포해 청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두 사람이 피신한 곳이 군성산 기슭 대명마을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조국인 명나라의 재기를 기원했으나, 1644년 청의 무력 앞에 명이 망하자,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게 된 것이다.

 

이 마을 뒤 산등성이에는 대명단(大明壇)이 있다. 서학과 시문용, 두 사람이 북쪽이 잘 바라보이는 마을 뒷산에 터를 잡아 돌로 단을 쌓고 고국 명나라를 향해 북망사배를 올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대명동이 된 것이다. 대구의 대명동과 성주의 대명동은 이처럼 같은 사연으로 인하여 마을이름과 그 유래가 같은 것이다.

 

<대명마을(大明洞) 뒷산마루에 있는 대명단(大明壇)>

 

풍천재(風泉齋)와 대명단(大明壇)

 

대명마을 뒤 산기슭 대나무숲 사이에는 서학과 시문용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를 지나면 바로 두 사람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풍천재가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다. 풍천재는 1834년에 세워졌으며, 유허비는 183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서학(좌), 시문용(우)의 유허비>

 

풍천재와 유허비는 최근 새 단장을 하였는지 오르는 길과 주변이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풍천재 양 옆에는 아주 크고 오래된 배롱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수령이 족히 100년은 넘는 것 같았다. 겨울 배롱나무의 앙상한 가지는 두 사람의 고국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같이 애처로워 보였다.

 

<풍천재와 가지가 아름다운 배롱나무 세그루>

 

풍천재에는 명나라의 태조와 임진왜란 당시의 황제인 신종, 그리고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기일(忌日)을 적은 편액이 걸려 있다. 지금도 서학과 시문용의 후손들은 황제의 기일이 되면 대명단에 모여 북쪽을 향해 사배를 올린다고 한다. 나라를 잃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고국과 고향을 그리는 두 분의 마음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수 백년의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세 황제의 기일이 적힌 편액>

 

오랜 세월이 흘러 대명마을의 상징이 되어버린 대명단은 풍천재 뒤 산등성이에 있을 것 같은데 어디 쯤 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마을어른들은 모두 비닐하우스로 일하러 나갔고 아이들은 대명단을 모른다고 했다. 난감했다.

 

다행히 서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신 할머니 한 분을 만나 대명단의 위치와 가는 길을 알려주신 덕분에 어렵게 대명단을 찾을 수 있었다.

 

<풍천재 현판>

 

대명단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 백년 전 초하루와 보름만 되면 대명단 앞에서 북망사배를 올리는 서학과 시문용, 머나먼 타국 땅에서 고국을 그리는 그 심정은 일제시대 조국을 잃고 만주 벌판을 누비며 고국을 그리던 독립투사들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아버지 시윤제(施允濟), 아들 시문용(施文用)

명촌(明村) 시문용(施文用·1572∼1643)  절강성 포강(浦江) 태생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정곤수(鄭昆壽)가 주청사가 되어 중국에 가는데, 명나라에서는 병부시랑(현재의 국방부차관)인 시문용(施文用)의 아버지 시윤제(施允濟)가 조선 사신을 접견한다. 이날 시윤제는 조선의 사정을 전해 듣고 위로하며 "병부상서(현재의 국방부장관) 석성(石星)은 고향사람으로 나와는 친분이 두터우니 일이 잘 될 것"이라고 했다. 시윤제의 주선으로 석성의 집에 도착하여 조선의 어려움을 호소하니 석성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곤수의 백곡집(栢谷集)을 보면 북경에 도착하던 날, 시윤제(施允濟)가 석성(石星)과의 친분을 이야기한 내용과 조선의 어려움을 걱정해 주어서 사신 일행이 감격했다는 내용이 기록 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시문용의 아버지 시윤제는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에 정착한 시문용은 광해군(光海君, 1575~1641)때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오르고 의학과 병법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시문용의 후손들은 조국을 잃은 설움을 안고 타국에서의 힘든 삶을 이어간다. 실제로 영조(英祖, 1694-1724)때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가 명나라 유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왕에게 보고하였고, 왕은 시문용에게 병조참판직을 추증하고 후손들의 조세와 부역을 면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지원하기 위하여 왔다가 정착하여 수 백년 동안 삶을 이어온 시문용과 그 후손들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서학과 시문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풍천재>

 

명암(明庵) 서학(徐鶴·1566∼1646)의 사위, 석천(石洊)

 

2007년 방영된 "한국사 전(傳)"이란 KBS-TV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이야기가 <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라는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내용에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나오는데, 서학의 사위가 된 석천은 석성의 둘째아들이다.

 

홍순언은 중국어 통역관이었는데, 한번은 북경을 가는 길에 통주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청루(靑樓)에 들어가서 여자를 불렀다. 그런데 16세의 빼어난 미인이 소복을 입고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들어와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부모가 병에 걸려 모두 죽었는데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마지못해 스스로 이곳에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홍순언은 공금에서 거금 300금(지금의 1000만원 정도)을 주고 여인을 청루에서 풀어 주었고, 조선에 돌아온 홍순언은 공금을 횡령한 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대로라면 죽는날까지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라는 명나라와 200여년간 끌어온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니라, 이성계와 권력을 다투던 정적인 이인임을 아버지라고 잘못 기록한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바르게 고치는 일이었다. 종계변무는 조선 전기, 왕실의 최대 외교 현안이었다.

 

선조 때 명나라에서 이 책을 다시 편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번에도 이를 고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통역을 잘못한 죄'라며 수석 역관을 죽이기로 했다. 죽음이 두려웠던 동료 역관들이 홍순언이 빚진 공금을 대신 갚아주고 죽음의 사행길에 홍순언을 보내기로 하였다. 어쨌든 홍순언은 감옥에서 풀려나 북경에 가게 되었다.

 

1584년(선조 17) 홍순언이 북경의 입구인 조양문에 도착하자, 홍순언을 맞이한 사람은 명나라 예부시랑(지금의 외무부차관) 석성(石星)과 그의 부인이었다. 부인은 큰절을 올리면서 "그 은혜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고, 석성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통주에서 은혜 베푸신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내가 아내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의로운 선비요" 하였다. 그때서야 홍순언은 몇 년 전 통주의 청루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때 청루에서 나온 그 여인이 석성이라는 사람과 결혼했고 남편은 출세를 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던 것이었다. 석성의 도움으로 불가능했던 일을 의외로 쉽게 해결한 홍순언은 이일로 나라를 빛낸 광국공신(光國功臣)에 포함되어 종2품에 봉해지고 당릉군(唐陵君)이라는 군호도 하사받았다.

 

그 뒤 정곤수가 원군을 요청하러 갔을 때에도 홍순언은 막후에서 활약했다. 그때 시윤제가 병부시랑이었고 석성(石星)은 병부상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명나라는 원군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해인 1598년 홍순언은 세상을 떴다. 파병을 주장했던 석성(石星)은 막대한 군비소모의 책임을 지고 투옥되었다가 1599년 결국 옥사하고 만다. 석성은 옥사하기전, 가족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조선으로 귀화하라고 유언을 남긴다. 석성(石星)의 두 아들과 부인은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왔는데, 그의 둘째아들 석천이 서학의 사위가 된 것이다.

 

 

숨겨진 마을, 대명동 뒷산의 대명단은 서학과 시문용, 서학의 사위 석천, 석천의 아버지 석성, 시문용의 아버지 시윤제, 석천의 어머니와 역관 홍순언에 얽힌 그 한 많은 사연들을 감춘 채 역사가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출처 :  절강시씨 자료집/시문용 시조님  / 시종헌(파주)  성주기행 대명동 풍천제

 

,,,,,,,,,,,,,,,,,,,,,,,,,,,,,,,,,,,,,,,,,,,,,,,,,,,,,,,,,,,,,,,,,,,,,,,,,,,,,,,,,,이하 관련 참고자료,,,,,,,,,,,,,,,,,,,,,,,,,,,,,,,,,,,,,,,,,,,,,,,,,,,,,,,,,,,,,,,,,,,,,,,,,,,,,,,,,,,,,,,,,,

 

*금 삼천냥을 해어화채(解語花債;기생의 몸값) 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사신을 수행, 명나라에 간 역관(譯官) 홍순언은 "삼천냥으로 미녀를 살 수 있다"는 방을 

보고 그 여인을 무조건 도왔다. 용모가 아름다운, 유(兪)씨 성을 가진 그 여인은 명나라 예부시랑의 딸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가는 사신을 수행한 홍 역관은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부인이 된

유씨 부인과  남편인 석성(石星)의 도움으로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원군을 받게 됐다.

 

하지만 명의 신종은 막대한 군비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성에게 물어 투옥시켰고, 1599년 그는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석성(石星)의 두 아들과 부인은 '조선으로 건너가라'는 석성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왔는데, 

큰 아들 석담(石潭)은 유씨를 모시고 해주에 이르러 해주 석씨가 됐으며 조선은 석담을 수양군(首陽君)으로 봉하고 수양산 인근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둘째 아들 석천(石洊)은 1597년 성주에 이르러 성주 땅 운수 꽃질에 터를 잡아 성주 석씨가 됐고 그가 바로 서학(徐鶴)의 사위다.

* 2015년 인구 해주석씨  941명, 성주석씨 255명이다.

 

* 주의 5명기(名基)

명나라의 풍수가 두사충(杜思忠)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왔다가 귀화하여 대구에 살면서 성주 지역을 둘러보고 지목한 풍수지리상 다섯 명당.

초전면 월곡리 홈실, 수륜면 수륜리 윤동,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선남면 오도리 오도마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웃갓마을(이곳은 인조 이전까지 성주목의 속현인 팔거현이었다).

홈실마을 전경(산자락에 붙어 마을의 중심인 덤뒤, 안골, 뒷미마을이 보인다.)
△성주의 다섯 곳 이름난 터의 으뜸.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벽진이씨의 집성촌  홈실, 입향조는 시조 이총언의 7세손인 광록대부 이방화(李芳華)인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세 임금에 걸쳐 벼슬한 이견간(李堅幹)의 대에 마을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홈실(椧谷) *명(椧·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물을 당긴다는 뜻) ,

1317년(충숙왕 4년), 이견간(李堅幹)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황제가 지어준 이름으로 덤뒤(濟南), 안골(內谷), 뒷미(陶山), 새뜸(新溪), 배나무골(梨洞) 다섯마을이다.

*성주육이(星州六李)-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광평이씨, 경산이씨,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가리이씨를 말한다. 가리는 옛 성주목의 속현이다.

△문안공(文安公)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을 배향한 문곡서원 (汶谷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600(초전면 월곡2길 13)

 1750년(영조 26)에 세워진 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