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고려성(高麗星)·나화랑(羅花郎) 형제 생가, 황산댁(黃山宅)

Jimie 2021. 3. 12. 05:44

 한국 1세대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사가 고려성(高麗星)과 작곡가 나화랑(본명: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고향집이다.

 

나화랑 (羅花郎): 조광환(曺曠煥), 탁소연

1950년대 나화랑 모습

 

나화랑은 또 손꼽히는 음악가족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그네 설움>, <고향에 찾아와도> 등 명작 가사를 남긴 작사가 겸 극작가 고려성이 그의 형, 1960년대에 활약한 가수 유성희는 그의 아내였다. 그리고 형제 음악가로 유명한 조규천·조규만·조규찬이 바로 나화랑의 음악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들이며 3형제가 가수겸 작곡가, 음반제작자로 활동한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집안이 대대로 천석꾼의 부호였다.아버지 조용묵(曺容默) 어머니 이진우(李珍愚) 사이에 네째 아들로 태어나 작사가 고려성은 그의 맏형이다.

 

본명은 조광환(曺曠煥). 1921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의 중앙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였다.

 

학업을 중단한 뒤 귀국해 1942년에 태평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했다가, ‘고려성(高麗星)’이라는 예명으로 활약하던 가요작사가이자 극작가였던 형 경환(景煥)의 주선으로 1943년 포리돌레코드사에 작곡가로 입사하였고, 같은 해 그의 처녀작「삼각산 손님」을 태성호(太星湖)가 불러 성공을 거두었다.

 

광복 후 한때 김천여중에서 교편을 잡았고 6ㆍ25전쟁 때는 육군 군예대에서 활약하였다. 환도 이후 케이비에스(KBS)의 경음악단지휘자로 활약하였다. 1955년 이후 맘보(mambo)라는 새로운 라틴계통의 리듬수법을 도입하여 신민요풍의 가요에 접목시키는 데 성공, 유행하게 하였다.

 

KBS가 남산으로 이전한 이후 대중음악방송이 확대되면서 방송과 음반을 통하여 새로운 곡들을 많이 발표함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59년 이미자(李美子)를 발굴,「열아홉 순정」을 부르게 했고, 앞서 남일해(南一海)를 발굴,「이정표」를 부르게 하여 두 사람 모두 인기가수가 되게 하였다.

 

그는 작곡활동 외에도 음반을 직접 제작, 판매하기도 하였다. 작품집으로는 1981년 회갑기념으로 출판된 『나화랑 창작가요집』이 있다.

600여곡의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삼각산 손님」·「도라지 맘보」·「열아홉 순정」·「무너진 사랑탑」·「이정표」·「청포도 사랑」·「뽕 따러 가세」·「푸른 꿈이여 지금 어디」·「울산 큰애기」·「행복의 일요일」 등이 있다.

 

1983년 별세.

 

 

국가등록문화재(775호) 황산댁(黃山宅) 고택(故宅)

* 고려성, 나화랑 생가인 황산댁(黃山宅) 고택(故宅)에서 김천문화원 주관, 창녕조씨지사공파종중과 황산댁 후원으로 

'작은 음악회' 개최

 

황산댁은 조선시대 김천지역을 대표하는 반촌으로 창녕조씨 집성촌인 봉산면 봉산마을 끝자락에 있는 고택이다.

황산댁(黃山宅) 고택(故宅)은 2020년 3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등록문화재(775호)로 지정됐다.

 

택호(宅號)인 황산(黃山)은 조한규(曺翰奎·1804-1864)의 부인 친정이 거창신씨 집성촌인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인데서 연유됐다고 전해진다.

 

사랑채 대들보에 기록된 상량문으로 미뤄 1801년(순조1년) 이조참의로 증직(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된 조언명(曺彦明)이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가옥은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곳간채로 이뤄졌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 짓는 내외문이 별도로 나 있다. 안채에서 텃밭으로 연결되는 쪽문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600석의 쌀을 저장했다는 곳간채는 김천지역 고택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어 대대로 천석꾼으로 불린 이 이 집안의 재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고려성(高麗星)[본명 조경환(曺景煥)]

한국 대중가요 토착기에 「나그네 설움」, 「어머님 사랑」, 「비오는 해관」, 「춘소화월」[백년설 노래], 「마상일기」[진방남 노래], 「금박댕기」[모란봉 노래], 「삼각산 손님」[구성진, 태성호 노래],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 「비에 젖은 주막집」[박재홍 노래], 「고향에 찾아와도」[최갑석 노래]와 8·15 해방 가요 제1호인 「남대문을 열어라」를 탄생시킨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출신의 가요 작사가이다.

 

1930년~50년대에 태평레코드사와 서울레코드사 등에서 작사가 박영호, 가수 백년설·박재홍, 작곡가 김교성·이재호 등과 함께 우리 민족의 애환을 대변하여 주는 가요를 양산, 보급시킴으로써 한국가요 예술을 진흥시킨 가요 작가이다.

고려성은 1939년 7월 29일~7월 30일에 조선일보사와 태평레코드사가 공동 주최한 ‘태평레코드 예술상 전국 콩쿨대회’를 김천극장에 유치하여 한국 대중가요 세대의 가수 진방남, 태성호, 백난아 등을 배출시킨 가요 프로듀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