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최양숙-가을편지-이동원

Jimie 2024. 5. 25. 04:56

 

 

최양숙 - 가을 편지

(1971 초판)

고은 작사 김민기 작곡, 김민기 기타연주. 최양숙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wiVT5bJ1jiE 

 

■ 최양숙(崔良淑) : 1937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이며, 대표곡으로 눈이 내리네(1958). 황혼의 엘레지(1966). 가을 편지(1974) 등이 있다.

 

함경남도 원산 명석 보통학교 시절 학업은 물론 콩쿨 대회에서 상을 독차지했던 탁월한 재능의 아이였다. 12살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터져 1951년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월남해 피난민을 위해 임시로 운영된 무학 여중에 다녔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지라 부친은 의대 진학을 원했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이사한 후,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성악가의 꿈을 안고 1954년 서울 예고에 입학했다. 여고 시절 반장은 물론 학교 운영 위원장을 맡았다. 1955년 제7회 전국 중고등학생 음악 경연 대회에서 성악 부문 1등을 수상해 교내외에서 촉망받는 성악가로 주목받았다.

 

1957년 서울예고 수석 졸업 후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진학했다. 1958년 대학 2학년 때 KBS 합창 단원으로 몇 달간 동남아 순회공연을 떠나면서 대중 음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오랜 항해의 지루함을 잊기 위해 선상 음악 경연 대회에서 출연해 샹송을 불러 큰 호응을 얻었다. '가수로 전향해 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1958년 가을 귀국 후, 눈이 내리네(1958)로 데뷔했다. 물론 대학생 신분이었다.

 



당시 여건에서는 명문대 학생이 대중 가수로 활동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에, 본명이 아닌 '주미옥'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방송국 합창단 활동을 접고, 서울 예고의 음악 교사로 1년간 재직한 후 1963년 다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66년에 발표한 황혼의 엘레지(1966)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가창력과 표현력이 뛰어났던 그녀는 해외 무대로도 진출했다.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 박람회장의 한국관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고, 일본에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으며, 그녀가 이때 사용한 예명은 베로니크(Veronique)이다.

 

1970년 다시 한국에서 새로운 음반 '꽃 피우는 아이'를 발표하며 국내 활동을 개시했고, 이 음반을 통해 '세노야' 등 포크 명곡들을 발표했다. 대중 가요 사상 가장 우아했던 여가수로 기억되는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성악에 기초한 클래식한 창법으로 대중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이끌어 냈다.

 

가을 편지(1974)는 가을을 대표하는 가요이다. 노래에 담긴 짙은 계절의 고독감은 여전히 향내가 진동했고 탁월한 서정성은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시키며 이 노래에 불멸의 생명력을 부여했다. 가을 편지(1974)의 절정은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대목일 것 같다.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운 심정, 이 보다 더 심오한 고독의 정의가 어디 있겠는가?

~ 어디선가 퍼온 사연임~

 

이동원 - 가을편지

https://www.youtube.com/watch?v=nm5GitqajxI 

 

 

이별의 노래, 향수, 가을 편지 등을 부른 가수

이동원(李東源, 1951년 4월 15일 ~ 2021년 11월 14일)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이북에서 부모가 피난 내려온 부산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 부모를 따라 상경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집안이 쑥대 밭이 된 적이 있었는데,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자  음악(기타)을 배워 명동에서 10년쯤 노래를 불렀다.

 

김민기, 양인, 서유석, 조영남, 트윈폴리오 등과 함께 활동하며 음악을 배우다가  가수가 되려면 내 노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호승 시인의 시에 노래를 붙인  '이별의 노래' 가  크게  히트하여  1970년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1989년 정지용 시인의 시를 노래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으리"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89년초 서울 여의도 한 책방에서 시인 정지용의 향수를 읽고 한국어와 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이동원은 그당시 최고의 작곡가 김희갑에게 곡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김희갑 작곡가는 '시가 길고 가사의 토씨 하나 바꾸면 안 되지 않느냐, 어렵겠다'며 그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끈질기게 메달려 설득한 결과, 1년여만에 곡을 받았는데...

 

이동원은 당시 서울대 음대 교수인 테너 박인수를 찾아가 듀엣을 제안했다. 박인수 교수는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동원 씨의 '이별 노래' 듣고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흔쾌히 수락하여  당시 13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큰 사랑을 받은 이 음반은 국내에서 성악가와 대중가수가 협업한 가장 성공한 크로스오버 음악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향수’를 부른 ‘국민 가수’

이동원은 2021년 11월 14일에 식도암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70세

 

‘향수’를 부른 ‘국민 테너’

박인수 교수는 2023년 2월 28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박인수는 1938년 3남 2녀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운 집안 형편에 유년 시절부터 과일행상,신문 배달 등을 하면서 고학하여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했다. 4학년 때인 1962년 성악가로 데뷔한 뒤 1967년 국립오페라단의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무대 주역으로 발탁됐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음악원과 맨해튼 음악원 등에서 수학한 뒤 미국 캐나다 등에서 ‘라보엠’, ‘토스카’, ‘리골레토’ 등 다수의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했다.

1983년 서울대 성악과 교수로 부임한 후 가수 이동원(1951~2021)과 함께 ‘향수’를 불러 큰 인기를 끌면서 ‘국민 테너’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