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금강산 불교

Jimie 2024. 5. 17. 02:32

History & Human Geography

금강산 불교

Jimie 2020. 6. 8. 00:31

 

 

천하절승 금강산 불교

 

 

금강산 金剛山 비로봉 毘盧峰

 

주위에 일출봉·월출봉·영랑봉·마석암·석가봉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로봉(1,638m)을 경계로 서쪽을 내금강, 동쪽을 외금강이라 하고,

외금강의 남쪽 계곡을 신용금고 강, 동쪽 끝의 해안을 해금강이라 부른다.

 

비로봉 毘盧峰

강원도(북한) 금강군과 고성군 사이에 솟아 있는 산.

높이 1,638m. 금강산의 최고봉으로 태백산맥의 북부에 있다.

 

금강산(개골산, 봉래산)  한반도 북부, 태백산맥 북쪽에 솟아있는 세계적인 명산. 높이는 1,638m, 동서폭은 40㎞, 남북길이는 약 60㎞, 넓이는 약 530㎢에 이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개골(皆骨)·열반(涅槃)·풍악·기달(怾怛)의 다섯 가지 이름을 들고 있다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峯 1,638m) 을 중심으로 주위가 약 80km에 이르는데, 강원도의 회양 ・ 통천 ・ 고성의 3개 군에 걸쳐 있다. 4대 명찰인 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에 표훈사만 현존한다.

* 신계사는2004년부터 2007년까지 조계종과 조선불교도연맹의 남북공동사업으로 다시 복원됨.

전쟁의 상흔과 분단으로 상처 입은 한국 대표 불교성지

 

금강산 유점사의 예전 모습. 6 ·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현재는 터와 석탑만 남아 있다.

천하절승 금강산에 깃든 불교의 어제와 오늘

2015년 05월 28일 (목) 13:21:45                                                                                                     이지범

 내금강 표훈사 전경. 왼쪽에 반야보전이, 오른쪽에 능파루가 보인다. <사진 = 이지범>

 

금강산(金剛山)은 예로부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산이다. 이 산과 관련한 일화가 지금도 많이 전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이 말은 국내 유명 광고에서도 사용할 정도로 유명하다. 그리고 노랫말에 등장하는 ‘금강산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는 그만큼 금강산에 사암(寺庵)이 많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팔방구암자(八房九庵子)’의 와전이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내금강 유점사(楡岾寺), 장안사(長安寺)와 더불어 현존하는 표훈사(表訓寺) 그리고 다시 복원된 외금강 신계사(神溪寺) 금강산의 4대 명찰이었다. 이들 사찰은 ‘여덟 전각과 여덟 방사〔八殿八房〕 그리고 산내(山內)에 암자 아홉 개소를 두는 것’이 가람배치와 사격(寺格)에 따른 일종의 기본 원칙이었다. 옛날부터 팔방구암자가 있는 큰 사찰이 아니면 전각에 주련(柱聯)을 붙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의 팔방(八房)이 언제부터인가 말뜻이 와전되어 팔만(八萬)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금강산 4대 사찰 유점·장안·신계·표훈사

 금강산에 사암(寺庵)이 건립된 시기는 5~6세기부터이다. 대규모 사찰은 6~9세기에 금강산을 가득 채우게 된다. 이때 금강산 4대 명찰인 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등이 건립되었다. 그 밖에도 내금강에 정양사, 마하연사, 장연사, 문수사 등과 외금강에 발연사, 송림사, 도산사, 금장사, 삼장사 등 유명 사찰이 있었고, 또한 신림암, 안양암, 보덕암, 만회암, 영원암, 보운암, 상운암, 불지암 등 수많은 암자들이 세워졌다. 3대 옛탑〔古塔〕으로 불린 정양사·장연사·신계사 삼층석탑과 금장암 삼층사자탑, 화천리 오층석탑 등이 남아 있다.

지금 금강산에 현존하는 사찰은 내금강의 표훈사, 정양사, 보덕암, 마하연 칠성각, 불지암과 외금강의 신계사 등 6곳뿐이다. 유점사와 장안사, 신계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금강산 사찰과 암자는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이나 실화로 소실되었고, 1960년대 이후 전쟁 복구시기에도 대규모 홍수와 산불 등으로 소실된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서 신계사는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조계종과 조선불교도연맹의 남북공동사업으로 다시 복원됐다.

 

‘금강산인’은 조선 대표승려 의미

 

옛적에 우리나라 스님들은 스스로를 금강산인(金剛山人)이나 내금강인(內金剛人)이라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금강산에서 수행하는 승려임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뜻으로도 통했다고 한다. 이러한 지칭은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가장 자랑스러운 명칭 내지 호칭이었다.

1900년대 미국 작가 님 웨일즈(Nym Wales)의 《아리랑》(1941년판)에서 ‘금강산의 붉은 승려’로 등장하는 김충창(운암 김성숙)과 상해 임시정부 등과 관련하여 독립운동을 한 수원 용주사 출신의 신상완(申尙玩) 스님은 스스로를 ‘금강산 승려’(‘日本이 韓國佛敎에 對한 壓迫’이란 논설,《韓日關係史料集》에서 실명 거론)라고 칭했다. 또 금강산이 그만큼 유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도 금강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불교성지로 알려졌다.

 

63개 말사 거느렸던 유점사(楡岾寺)

 

승려 3,000명이 살았다는 내금강 유점사(楡岾寺)는 《금강산유점사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남해왕 원년(4)에 창건되었고 53불(佛)의 연기(緣起)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느릅나무〔楡〕가 많아 붙여진 유점사는 12세기 중엽에는 500여 칸, 15세기 초에는 3,000칸의 승방을 가진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조선 말엽까지 49번의 크고 작은 화재를 겪었다. 일제 31본산의 하나로 1911년 이후에는 63개 말사를 둔 대찰로서 능인보전, 약사전, 산영루(山映樓) 등 6전(殿) 4당(堂) 3루(樓) 7각(閣) 3문(門)과 20여 동의 부속건물, 석등, 구층석탑이 있었다. 1951년 폐허가 되었고, 동종은 1974년에 묘향산 보현사 종각으로 옮겨졌다.

내금강 장안사(長安寺)는 신라 진흥왕 12년(551) 혜량(惠亮) 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원나라 기황후의 후원으로 불상과 대장경을 봉안하고 5층석탑을 세웠다. 전각은 비로전, 사성지전(四聖之殿) 등 70여 채로 1951년 이전까지 6전 2루 7각 2문이 있었다.

 

 

표훈사(表訓寺)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만폭동 어귀에 있는 조선시대 사찰이며 금강산 4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절이다.

676년 처음 세워 신림사라 부르다 1778년 완전히 새로 지었다. 670년(신라 문무왕 10년) 표훈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 세종대왕이 재건한 후 수차례에 걸쳐서 중수한 것이다. 1778년(조선 정조 2년)에 크게 보수했다. 사찰 뒤의 봉우리는 청학봉이다.

 

법기보살 주석처 표훈사(表訓寺)

 

내금강 표훈사(表訓寺)는 유일하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4대 명찰의 한 곳이다. 표훈·능인·신림 대사가 신라 문무왕 10년(670) 창건했다고 전한다. 20여 채의 건물들은 조선 정조 2년(1778)에 새로 중건하였다. 그 후 전쟁 때 많은 건물이 소실되고 반야보전, 영산전, 능파루(凌波樓), 어실각(御室閣), 판도방(判道房) 등과 칠층석탑이 남아 있다. 표훈사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이 살고 있는 중심지〔住處 〕이다. 영원암 터 부근에 두 개의 바위에 불상과 글씨를 새긴 삼불암(三佛岩)이 있다. 바위 앞면에는 아미타·석가·미륵부처님 입상을 새겼고, 뒷면에 60개의 작은 보살상을 가로 15줄, 세로 4줄에 높이 40㎝ 정도의 크기로 나란히 새겼다. 그리고 왼쪽 벽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높이 2.3m)을 선 자세로 새겼다.

표훈사의 산내암자 보덕암(普德庵)은 고구려 영류왕 10년(627)에 보덕(普德) 화상이 창건한 곳으로, 현재 건물은 순조 8년(1808)에 다시 중수한 것이다. “관음보살의 화현인 보덕각시가 여기에 살았다”는 전설이 서린 보덕암은 깊이 5m가 넘는 자연굴(窟)을 이용, 바위 절벽에 의지하여 세운 목조본전과 그 위에 5층석탑을 세웠으나 탑신은 없어지고 옥개석 3개만 남아 있다. 위의 평평한 곳에 지어진 판도방(대중방)이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에 소실되었다. 처음에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렸으나 지금은 우측으로 낸 돌계단을 이용할 수 있다. 본전은 길이 7.3m의 구리기둥 하나를 밑에 받쳐 세운 건물이다. 건물을 바위에 붙잡아맨 쇠줄은 구리기둥과 함께 조선 중종 6년(1511)에 설치했다. 17세기에 예조참판을 지낸 죽당(竹堂) 신유(申濡)는 금강산 보덕굴을 찾은 소회를 《죽당집》에 한시로 남겼다.

흔들흔들 암자는 허공에 걸려 있고 揺揺庵子架虛空
구리기둥 하나 벼랑에 버팀목 받쳤구나. 本費撑一柱銅
얼마나 많은 유람객들 비바람을 그었던고 幾個遊人庇風雨
보덕대사, 그 공로 천추에 자랑하리. 千秋猶誦普師功

 

금강의 심장 마하연

표훈사의 산내암자 마하연(摩訶衍)은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 내금강 오지의 소식을 교환하는 통문(通門)의 요지였던 마하연은 최남선이《금강예찬》에서 “모든 금강의 심장”이라고 표현했다. ㄱ자 구조로 된 법당과 53개 승방이 있던 큰절로 조선 순조 31년(1831) 중수하였다가 1970년대 초에 발생한 대홍수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잔해가 표훈사 앞까지 떠내려 왔다고 한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고 칠성각만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내금강의 정양사(正陽寺)는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위치하고 양지바른 곳으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유점사의 말사로 백제 무왕 연간(600년)에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 강운(降雲) 대사가 창건하였다. 신라 문무왕 1년(661) 원효 대사가 재창하고 고려 태조 왕건이 크게 중창했다. 조선 영조 27년(1751) 중수된 정양사는 반야전, 약사전, 헐성루(歇惺樓) 등 건물이 있었으나 전쟁 때 폭격으로 일부 소실되었다. 그 후 약사전을 다시 수리할 때 처마 밑기둥들이 없어지고 문틀이 바뀌고, 대형 ‘흰코끼리’ 벽화까지 사라지는 등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나옹화상 원불 ‘묘길상’

백운대구역 화개동에 위치하는 마애불 묘길상(妙吉祥)은 한반도의 최대 마애불이다. 높이 40m의 거대한 암벽에 새겼으며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상을 부조했다. 높이 16m, 넓이 10m(연화대좌의 길이)이고, 앞면에는 3단 축대(石階)가 있고 그 위에 세워진 높이 3.66m의 석등은 북한 국보급 문화재 47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기 묘길상암(庵)을 중창한 나옹(懶翁)선사가 직접 원불(願佛)로 새겼다고 한다. 손모양〔手印〕으로 미루어 이 마애불은 아미타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말 강원도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은 문수보살의 별칭이 묘길상임에도 불구하고 옆에 위치한 암자의 이름을 빌어 행서(行書)체 글씨를 쓰고 오른쪽 옆 바위에 음각으로 새긴 후부터 붙여진 이름이 묘길상이다.

내금강 백운동의 불지암(佛地庵, 佛池庵)은 묘길상 인근에 현존한다. 신라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세조 때와 광해군 11년(1619)에 중건된 이후 조선 후기까지 연혁은 자세한 것이 없다. 그러나 순조 24년(1824) 중수와 그 후 칠성각을 건립하고 탱화를 조성했다고 한다. 불지골의 ‘금강약수’(金剛水)가 유명하다. 유점사 말사로서 20세기에는 백용성 선사가 1903년 상비로암(上毘盧庵)에서 선회(禪會)를 처음으로 개설하고 더불어 이 암자(佛地庵)에서 동안거(冬安居)를 보냈다.

 

남북공동의로 복원한 신계사(神溪寺)

 

외금강의 신계사(新溪寺, 新戒寺)는 신라 법흥왕 6년(519)에 보운조사(普雲祖師)가 창건하였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선조 30년(1597)에 세운 대웅전, 만세루, 어실각, 최승전(最勝殿), 수승전 등 여러 당우들은 1951년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불에 타 소실되고 삼층석탑만 남아 있었다. 그 후 남북공동 복원사업으로 2007년 10월 13일 낙성되었다..

내금강 삼불암에서 표훈사로 가는 길 오른쪽 백화암(百花庵) 터에는 인조 10년(1632)년에 세운 <청허당휴정대사비>가 있다. 이곳에는 2~4.5m 크기의 비석 4기와 부도 5기가 있다. 대부분 17세기 전반기에 세워졌다. 서산대사의 부도와 비를 묘향산 보현사와 이곳에 세운 것은 그 당시 배불적(排佛的) 상황을 고려하면 금강산의 불교가 덜 억압받고 보호받을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5대 사고본을 절 근방으로 옮기고 승려가 관리할 수 있도록 제안한 사명대사의 바람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용성·금오·효봉 등 고승 수행처

근대에 들어와 금강산 표훈사(주지 崔圓虛)를 비롯한 금강산불교회가 중심이 되어 “금강산이 《금강산》을 냈다”고 할 만큼 문학과 인문지리 등 문화·사상계를 이끌었다. 이 잡지에는 김운악(金雲岳)·강대련(姜大蓮)·강성인(姜性仁)·김정섭(金正燮)·박범화(朴梵華)·장석상(張石霜)·송만공(宋滿空)·송종헌(宋宗憲)·김동산(金東山)·임석진(林錫珍)·정병헌(鄭秉憲)·감선월(甘船月)·이고경(李古鏡)·김경봉(金鏡峯)·오이산(吳梨山)·황보응(黃普應)·이병호(李炳浩)·박도수(朴度洙)·김영호(金泳鎬)·정취흔(鄭聚昕)·이종욱(李鍾郁)·김보연(金寶蓮)·이환해(李幻海)·유보암(柳寶庵)·김법용(金法龍)·김일운(金一雲)·이보담(李寶潭)·이명교(李明敎)·조응준(趙應俊)·박한영(朴漢永)·방한암(方漢巖)·박원응(朴圓應)·김청암(金靑庵)·김정해(金晶海)·황금봉(黃金峯)·현의용(玄懿龍)·이춘산(李春山)·김적음(金寂音)·고탄옹(高坦翁)·박대야(朴大冶)·박영철(朴榮喆)·한만희(韓萬熙)·이승우(李升雨)·이혼성(李混惺) 등 조선불교계 고승과 사회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리고 금오 선사가 1911년 안변 석왕사로 출가해 3년간 정진하고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도암 긍현(道庵亘玄) 선사를 은사로 하여 계를 받았다. 10여 년 동안 마하연과 안변 석왕사 선방에서 수행하였다. 송광사 효봉 선사는 1925년 금강산 유점사로 입산하여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石頭)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근대 고승들의 은사였던 만공·용성(龍城)·혜월(慧月)·도봉(道峰)·석두·남전(南泉)·상월(霜月) 등은 1920년 서울에서 당대 최고의 불교탐구기관으로 ‘재단법인 선학원(禪學院)’을 설립하였다. 이곳은 여운형·서정희·신명균·김법린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의 요람으로 사용하였고, 금오선사는 57세가 되던 1953년 5월 선학원의 조실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남북불교는 수행과 문화 그리고 교류까지 모든 면에서 단절되었다.

 

금강산불교회 문화·사상 주도

북한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사찰과 문화재를 휴양소나 관광명소 또는 문화학습소 등으로 활용하고 한편으로, 한국전쟁 때 파괴된 사찰을 복구하였다. 특히 1988년 5월 5일 묘향산 보현사의 ‘석탄절(釋誕節) 기념법회’는 해방이후 처음 열린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였다. 이런 법회는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중지되었던 금강산의 불교행사는 1989년 5월 내금강산 표훈사에서 초파일 봉축법회와 탑돌이가 개최되면서 재개되었다.

그동안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 단독으로 개최하였거나 남북불교도 조국통일기원법회 등의 법회는 평양 광법사, 금강산 표훈사, 묘향산 보현사, 개성 영통사 등에서 매년 열렸다. 부처님오신날에 사용하는 사각, 육각 형태의 북한식 연등은 다듬은 나무를 기본 소재로 하여 골조를 만들고 흰색종이를 붙인 다음, 연등 중앙에다 세로 형태의 주체 글씨체로 ‘석탄절’ 문구와 맨 밑에 불기와 날짜를 ‘불기 2559. 4. 8’ 형식으로 표기한다. 또 봉축과 4.8 이외에도 자주, 평화, 강성대국, 결사옹위 등 정치적 글귀를 연등의 문구로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앞으로 북한불교의 초파일 풍경이 본래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심성까지 다 비추고 담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첫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유점사와 신계사. 둘째줄 삼불암과 백화암 부도군. 셋째줄 보덕암과 묘길상, 마하연 칠성각. 넷째줄 내금강 만폭동 양사언 등 글씨와 표훈사 초파일 탑돌이, 표훈사 봉축등. <사진 = 이지범>

 

*팔만구암자에 대한 해석.

 

첫 번째로 글자 그대로 八萬九菴子, 8만 9개의 암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는 팔람구암자 八藍九菴子, 8개의 큰절과 9개의 암자입니다.

마지막으로는 팔방구암자 八房九菴子입니다.

 

금강산에는 4대 명찰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신계사가 있었습니다.

이들 사찰은 ‘여덟 전각과 여덟 방사〔八殿八房〕 그리고 산내(山內)에 암자 아홉 개소를 두는 것’이 가람배치와 사격(寺格)에 따른 일종의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옛날부터 팔방구암자가 있는 큰 사찰이 아니면 전각에 주련(柱聯)을 붙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의 팔방(八房)이 언제부터인가 말뜻이 와전되어 팔만(八萬)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표훈사 보덕암(表訓寺 普德庵)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