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두만강’이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바친 노래라니요?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좌파 역사 분식에 이용된 한 많은 국민 가요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든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1938년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박시춘 편곡, 김정구 노래로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눈물 젖은 두만강’(이하 ‘두만강’)은 발매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고, 해방 후에도 꾸준히 사랑받았다. ‘두만강’이 ‘국민 가요’ 반열에 오른 것은 1964년 KBS 라디오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이하 ‘김삿갓’)의 주제곡으로 쓰일 때부터였다. ‘김삿갓’은 2001년 중단될 때까지 37년간 1만1500여 회 방송되었고, 한때 세계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북한의 실정을 풍자하는 ‘김삿갓’은 청취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덩달아 주제곡 ‘두만강’도 발표 30여 년 만에 ‘역주행’으로 빅히트곡 반열에 올랐다. ‘두만강’은 1981년 ‘한국인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1위로 뽑혔고, 1985년 9월 평양에서 있은 ‘남북 고향 방문 예술 공연’에 포함되기도 했다.
김정구는 원산의 ‘음악 가정’에서 성장했다. 형 김용환은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했고, 1935년 ‘인기 가수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인기 가수 정재덕의 남편이었다. 여동생 김안나는 도쿄에서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오페라가수와 대중 가수로 활약했다. 김정구는 1936년 김용환이 작곡한 ‘삼번통 아가씨’로 데뷔했다. “비단이 장수 왕 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통통 털어서 다 줬어/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왕서방 연서’ 1938)와 같은 ‘만요(漫謠·웃기는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작곡자 이시우와 가수 김정구의 증언과 인터뷰를 통해 ‘두만강’의 창작 과정은 속속들이 알려져 있다. “악극단 ‘예원좌’가 두만강 건너 도문의 여관에서 묵고 있을 때였죠. 잠결에 들으니 옆방에서 여인의 흐느낌 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이튿날 아침, 이시우가 여관 주인에게 물으니, 여인의 남편은 독립 투사였고, 일경에게 쫓겨 가족한테 연락조차 없었다. 남편이 도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인이 달려와 보니 남편은 이미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어디론가 끌려간 후였다. 여인의 슬픈 사연을 작곡가 이시우는 노래로 엮었다.(동아일보 1971.3.6.)
다른 지면에서 김정구는 그다음 상황을 회고했다. “1938년 오케레코드 공연단 일원으로 경상도 지방을 돌고 있을 때, 만주 하얼빈을 중심으로 악극단 생활을 하던 이시우씨가 숙소로 저를 찾아왔어요. 불쑥 악보를 하나 내밀더니 저한테 취입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가사나 제목도 없이 그냥 오선지에 멜로디만 그려놓은 악보였다. 이시우는 김정구에게 곡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공연단 일원이었던 작곡가 박시춘씨에게 악보를 들고 갔지요. 박씨는 악보를 보면서 콧노래로 몇 번 불러보더니 취입해도 괜찮겠다고 하더군요. 그러곤 즉석에서 전주와 간주를 붙여 편곡해 줬습니다. 가사는 뒤에 서울로 올라와서 녹음을 준비하면서 오케레코드사 문예부 일을 맡고 있던 김용호씨에게 곡의 사연에 맞게 만들어 달라고 했고요.”(조선일보 1991.2.21.)
대중가요 가운데 이보다 더 자세하게 창작 과정이 남아 있는 작품도 드물다. 이처럼 지난 세기 ‘두만강’에 대한 음악사적 사실 확인과 평가는 ‘완벽히 정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난데없이 2004년 ‘박헌영 전집’을 준비하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 연구의 권위자가 ‘놀라운 발견’을 발표했다.
“(1928년) 박헌영의 탈출 소식은 조선 민중들에게 빅뉴스였다. 영화 촬영차 두만강변에 와 있던 김용환(가수 김정구의 형)이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사를 지은 게 그즈음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그리운 내 님이여…’의 ‘내 님’은 다름 아닌 박헌영이었던 것이다.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사학)는 모스크바 문서 보관서의 자료와 가족들 증언을 통해 오랫동안 묻혀 있던 사실들을 발굴해 냈다.”(동아일보 2004.4.16.)
비슷한 시기 출간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에서 임경석이 제시한 ‘내 님’이 박헌영인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이 노래의 작곡자는 이시우, 작사자는 김용호이다. 하지만 작곡자와 달리 작사자인 ‘김용호’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 원경 스님의 증언은 다르다. 그에 따르면 이 노랫말의 지은이는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다. (…) 김용환은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변에서 접했다고 한다. 당시 영화배우로 활동 중이던 그는 영화 촬영차 관계자 일행과 함께 그곳에 가 있던 참이었다.” 두만강변에서 뱃사공을 보고는 박헌영의 탈출 장면이 떠올라 박헌영을 ‘그리운 내 님’으로 은유해 노랫말을 쓰고, 10년 가까이 서랍 속에 보관했다가 동생 김정구에게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작곡자와 가수의 일관된 증언을 부정한 근거는 놀랍게도 딱 하나,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의 일방적 ‘주장’이었다. 1941년생 원경 스님은 박헌영이 숨어 지내던 아지트에서 그를 뒷바라지하던 여성 정순년의 아들이었다. 할머니, 큰아버지, 남로당 조직원, 빨치산 대원 등의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몇 차례 만났다고 하지만, 박헌영의 월북 당시 그는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 대부분은 어린 시절 그를 키운 빨치산, 남로당 잔당에게 전해 들은 것이었다.
원경 스님의 증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에 부합하는 게 하나도 없다. ‘두만강’의 작사가 김용호는 오케레코드에서 근무하던 트롬본 연주자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두만강’ 외에도 가요 22편을 작사했다. 김용환은 영화배우로 활동한 바 없었고, 작곡가 데뷔 시기도 박헌영이 탈출한 지 6년 후인 1934년이었다. 박헌영 부부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원산에서 밀항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했다. 무엇보다도 ‘두만강’이 ‘미제의 간첩’ 박헌영에게 헌정하는 곡이었다면, 1985년 북한 당국이 평양 공연에서 김정구가 부르게 했을 리도 없다.
조계종 원로 의원을 지냈고, 2021년 입적한 원경 스님은 심지어 1928년 박헌영 탈출극의 기획자가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고 “‘님’은 (…) 박승직과 박헌영 사이를 연결하는 암호”(한겨레신문 2015.12.9.)라는 ‘창의적’ 주장을 제기해 여러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2004년 이후, 박헌영을 다룬 ‘특정 진영’의 기사, 논문, 단행본에서 ‘두만강’ 에피소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두만강’의 작곡가 이시우는 해방 이후 경찰 간부로 이직해서 ‘지리산 공비 소탕 작전’에 참여했고, ‘반공연맹 특무국장’ 등을 지낸 투철한 ‘반공 투사’였다. 그런 분이 창작한 국민 가요는 머지않아 ‘박헌영 헌정곡’으로 둔갑해 버릴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권혁종 “이 산하 이 노래: 눈물 젖어 돌아서던 유민의 한” 조선일보, 1991.2.21.
박찬호 ‘한국 가요사1′ 미지북스, 2009
손호철 ‘한 스님’ 이매진, 2023
안재성 ‘박헌영 평전’ 인문서원, 2020
이길범 “연예 수첩 반세기: 김정구와 두만강” 동아일보, 1973.3.6.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허부문, 국민 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의 ‘그리운 내 님’과 작사가 연구, 대중서사연구, 제29-2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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